[의료계, 인문학에 길을 묻다] 안락사·맞춤아기 등 윤리적 답변 논리 못 찾아 인문 교육 속속 도입

국내 한 대학병원의 로봇수술 장면. 눈부신 첨단의학기술도 안락사 문제 를 둘러싼 윤리적 논쟁 등의 의료문제는 해결해주지 못하고 있다(위)
영국의 스카이 리얼 라이브즈 채널은 안락사 순간을 방영했다. 주인공 은 운동 신경 퇴행증을 앓다 2006년 9월 안락사를 택한 전직 대학 교 수 크레이그 유어트. 유어트는 부인과 마지막 키스를 나눈 뒤, 강력한 진정제를마시고, "감사한다"는 마지막 말과 함께 눈을 감았다. 유어트 는 온 몸이 마비된 채 '살아있는 무덤'처럼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안락사를 금지하는 영국을 떠나 스위스에 있는 안락사 지원 병원 디그 니타스를 찾았다고 말했다. 스카이 TV는 존엄사와 안락사를 둘러싼 논 쟁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방영 배경을 밝혔다.(아래)

의료계에서 인문학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는 분위기가 점차 확산되고 있다.

지난 13일, 대한의료커뮤니케이션학회 주최로 '의료 커뮤니케이션 교육내용의 현황과 문제점 그리고 대안모색'이라는 주제의 심포지엄이 열렸다.

의료현장에서의 보다 나은 의사소통을 위해 의료계는 물론 수사학, 언론홍보학 등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 모여 현재 보건의료 관련 학과에서의 의료 커뮤니케이션 교육과정의 문제점을 심도 깊게 짚어 보는 자리였다. 또, 지난해 가을 '21세기 의료인문학'이라는 주제로 국내외 전문가들을 초청해 의학교육에서 인문학의 중요성에 대한 논의를 펼치기도 했다.

2006년 탄생한 이 학회는 최근 의료계가 임상기술의 발전뿐 아니라 사회적 소통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말해준다.

또, 연세대 의대를 시작으로 가톨릭의대 등 대학별로 드문드문 시도됐던 인문교육이 2000년 이후 전국 의과대학으로 확대돼 '의료인문학' '의철학' '의료사회학' 등 다양한 커리큘럼과 강좌가 도입되고 있다.

인제대의대는 2007년 8월 인문의학 연구소를 만들어 매년 7~8회의 인문의학 학술행사를 개최하고, 책자를 발간하는 등 인문교육과 연구의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가톨릭의대 인문사회의학 연구소는 지난해 여름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를 초빙해 의료윤리와 의료인류학 등에 관한 심포지엄을 열어 국내 의료윤리 교육의 발전방향을 모색했다.

의학을 과학 일변도의 시각에서 벗어나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바라본 책들도 계속 나오고 있다.

인문의학 연구소는 인간과 건강, 고통 등에 대해 새로운 이해에 도달하는 것을 도울 목적으로 '인문의학: 인문의 창으로 본 건강', '인문의학: 고통! 사람과 세상을 만나다' 등 인문의학 시리즈를 발간하고 있다. 의학도들에게 인문학적 소양을 심어줌으로써 인간미 있는 의사를 양성하려는 목적으로 씌어진 '따뜻한 의사'도 지난해 국내에 번역출간 됐다.

의료계가 자꾸만 인문학이라는 이질적인 분야에 눈을 돌리는 이유는 뭘까.

최첨단 의학기술도 '안락사'나 '착상전유전자진단법(PGD)'이라는 의학기술을 이용해 유전질환의 위험성이 없는 아이를 선택해 낳을 수 있는 '맞춤아기' 등을 둘러싼 윤리적 논란에 대해서는 답변할 능력이 못 된다.

거액의 치료비 때문에 빈곤에 내몰린 암 환자와 그 가족의 경제적 고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외로움의 병을 앓는 환자에 대해서도 손을 쓸 수 없다.

과학만으로는 온전할 수 없는 의학. 인문학과의 접촉이 더 나은 의술을 펴는데 열쇠가 되어 줄까.

환자를 위해 '생각하는 힘'길러주는 인문학

김철수(80세·가명)씨는 말기 암환자다. 이 환자는 담당 주치의에게 마지막 순간에 심폐소생술이나 기관내 삽관과 같은 생명연장장치를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임종을 맞이하고 싶다는 의견을 자주 밝혔다. 하지만 서면이나 유언장으로 그 의사를 밝히진 않았다. 환자는 예상보다 빨리 숨을 거둘 상황에 놓였다.

이 소식을 듣고 미국에서 돌아오려는 장남은 적극적인 심폐소생술과 생명유지장치로 연장을 원하고 있다. 최소한 자기가 귀국할 때까지 만이라도 아버지의 여명을 유지시켜달라고 부탁을 한다. 이 순간 환자는 의식이 이미 혼탁해 그 의사를 다시 확인할 방법이 없다.

얼마 전 지도교수 옆에서 이 같은 상황을 목격한 고려대 혈액종양내과 전임의 박용 씨는 고인의 뜻에 따라야 하는지, 아니면 보호자의 의견에 따르는 것이 인간중심의 의술인지를 놓고 심한 내홍을 겪었다. 그리고 고민 끝에 환자의 뜻에 따르는 것이 옳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경우 고인의 뜻보다는 보호자의 의견을 따르는 의사가 종종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유족과의 갈들을 최소화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고인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되지요. 인간중심의 의술이라는 것을 의학적으로 타당한 범위 내에서 환자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위와 같은 상황에서는 의미 없는 생명 연장을 며칠 더 하는 것 보다는 고인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박 씨의 지도교수인 김병수 교수는 "인간을 배제한 과학중심의 의료 교육만으로는 이처럼 의료현장에서 마주치게 되는 윤리적 딜레마에 대한 해법을 찾을 수 없다"며 "의사는 법, 철학, 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인문학자들과 토론을 통해 환자를 위한 최선의 방법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인제의대 인문의학 연구소 강신익 소장은 인간을 위한 의술을 펴기 위해서는 '생각하는 힘'을 가진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의료인문학 교육의 최종 목표라고 강조한다. 삶의 고투의 흔적이며, 사람의 다면체적이고 변화무쌍한 모습이 담겨 있는 인문학을 통해 삶과 사람에 대한 통찰력을 얻기 때문이다.

강 소장의 의료인문학 수업시간. 학생들은 인문학적 관점을 접목시켜 안락사를 비롯해 의료현장에서 벌어지는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지 토론을 벌인다. 또한, 강의를 통해 건강과 고통이라는 현상을 생물학적 관점에서 한 발작 떨어져 사회, 문화, 경제, 철학 등 다양한 측면에서 조명해보도록 한다.

(왼쪽)강신익 교수

고통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 환자의 영혼을 어루만지다

가정불화로 속을 썩다 위장병이 생긴 환자가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환자의 얼굴은 보지도 않고, CT촬영 등 검사결과만을 토대로 약을 처방한다. 환자의 삶이 질병을 초래했으나 의사는 그 삶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그에게 환자는 하나의 인격체가 아닌 질병에 불과하다.

강신익 소장은 "건강은 신경계와 면역계, 정신계 등과 복잡하게 얽힌 현상으로 정신과 신체로 이분화한 기계적 의료는 효과가 없다는 것이 과학적으로도 밝혀지고 있다"며 "환자가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질병을 고치는 기술이 아니라 환자의 인간적인 측면을 고려한 인문학적으로 통합된 진료"라고 말한다.

국립암센터 암예방검진센터 서홍관 박사는 의사이자 시인이다. 그는 책 '인문의학: 고통! 사람과 세상을 만나다'에서 고통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제시한다.

현대의학에서 강조하는 객관성은 고통을 신체적 통증에 국한해 정의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그 결과 인간의 고통을 덜어주어야 하는 것이 의사의 의무에도 불구하고, 의학 교육이나 연구, 의료현장에서 굶주림이나 외로움, 이별 등으로 인한 인간의 고통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쏟지 않게 되었다. 또, 냉철해야 한다는 의미가 냉정해야 한다는 의미로 왜곡되는 현실이다. 서 박사는 이 같은 의료계의 관행에 대해 자성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그는 의사가 환자의 고통을 돕기 위해서는 "고통과 신체적 통증의 차이를 이해하고, 고통은 인간에 의해 경험되는 것이고, 그 인간은 특별하기 때문에 개별화되어야 하며, 고통을 알기 위해서는 그에게 물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인문학은 삶의 현장에서 겪는 환자의 고통을 이해하고, 영혼까지 돌볼 수 있는 자질을 길러준다.

그러기에 2003년 연대의대가 의대 최초로 문학강좌를 도입하는 등 많은 의과대학에서 문학과 심리학 등의 인문학 강의를 제공하며, 미래의 의사들에게 인간적인 공감의 자질을 길러주고 있다.



전세화 기자 cand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