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의 정신] 잉크 때문에 낭패 본 보험 외판원의 발명품, 인류에 편리함 선사

1-워터맨 카렌 컬렉션
2-둥글고 두터운 만년필의 디자인을 슬림하게 바꾼 워터맨 익셉션 (Exception)라인
3-에드슨 125주년 만년필(EDSON 125ans Limited Edition). 워터맨의 창립 125주년을 기념해 만들어진 만년필은 창립연도인 '1883'이라는 숫자에 의미를 두고 1883개의 에드슨을 제작, 한정판으로 내놓았다.
4- 여성용 만년필 오다스(AUDACE)

우리가 현재 일상생활에서 주로 사용하고 있는 필기구는 볼펜 혹은 펜이다. 연필로 정성들여 글씨를 쓰던 초등학생 시절을 지나 중․고등학생 때는 사용이 편리하다는 이유로 간편한 샤프펜슬로 필기를 하고 대학생이 되고 성인이 되면서 드디어 연필과 샤프에서 해방되어 지워지지 않는 펜을 사용하게 된다.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의 권고로 올바른 필기 습관을 위해 연필을 사용해야 했고 조금 자란 중학생이 되어서도 어른들이 사용하는 펜은 지우개로 지워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어른이 되어서야 이러한 간섭과 제재에서 자유로워지면서 펜의 사용을 통해 '나도 어른이 되었음'을 확인했다. 성인이 된 것에 대한 축하선물로 만년필이 꼽히는 것에도 이러한 뜻이 담겨있는 것은 아닐까.

만년필은 깃털로 만든 펜의 끝을 유리병에 담긴 잉크에 살짝 담군 후 그 잉크의 힘을 빌어 글씨를 썼던 원리를 적용시킨 것으로 문자의 기록, 필기에 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불러왔다.

인류에 만년필을 선사해 세계의 역사와 문화를 풍성하게 장식한 만년필의 근원(a fountain of a fountain pen)은 워터맨이다.

1883년 루이스 에드슨 워터맨(Lewis Edson Waterman)이 만년필을 세계 최초로 발명하면서 만년필의 역사가 시작된다. 그리고 이로 인해 만년필의 역사와 함께 필기문화가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

워터맨의 창립자 루이스 에드슨 워터맨은 뉴욕에서 보험 외판원으로 일했었다. 어느 날 중요한 계약을 성사직전에 두고 마지막 단계로 고객의 사인을 받기 직전 일어났던 일이 그의 인생에 있어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계약서 위에 펜에 묻어있던 잉크가 떨어진 것이 그것인데 그 일로 인해 그는 계약을 이루어내지 못했고 그 사건이 그로 하여금 잉크가 흐르지 않는 펜을 발명하게 한 것이다. 한 보험 외판원의 에피소드가 인류에게 전혀 새로운 문화를 선사하게 된 것이다.

찍어서 사용하던 잉크의 통을 작게 만들어 펜 속에 장착시켜 잉크가 펜촉으로 나오게 하는 원리로 만들어진 만년필의 첫 시작은 모세 현상을 이용한 만년필 '레귤러(Regular)'였다. 워터맨은 레귤러를 시작으로 회사를 설립한지 5년 만에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펜이 됐다.

이때부터 해외 진출이 시작되어 1926년에 프랑스에 공장을 설립,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면서 코크 스토퍼와 작은 유리관으로 구성되어 있는 잉크 카트리지를 발명하고 특허를 획득하는 등 만년필을 더욱 발전시켜 나가게 된다.

C.F(카트리지 필러)라 불리는 만년필의 로켓과 같은 모양을 통해 파격적인 디자인을 선보이고 만년필에 클래식한 디자인을 적용시켜 걸작품으로서의 만년필의 면모를 과시하기도 한다.

C.F는 제너럴 모터스 오토모빌 스타일리스트의 디자인으로 27년간 베스트셀링 아이템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기도 했다. 1992년에는 열이 높거나 고도의 비행에도 샐 위험이 없는 피드 시스템(Feed system)을 적용시켜 '에드슨(EDSON)'이라는 새롭고 획기적인 만년필을 내놓으면서 또 한 번의 주목을 받았으며 손에 꼭 맞게 설계된 인체공학적 만년필을 출시하기도 했다.

워터맨은 1919년 베르사이유 조약 서명 시 로이 죠지경에 의해 사용되기도 했는데 이는 현대에 와서도 '중요한 서명을 위해서는 좋은 만년필을 사용한다'는 인식을 낳기도 했다. 뉴욕 월가의 비즈니스맨들이 필수적으로 만년필을 지니는 것도 이러한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글을 통해 워터맨을 높이 평가하고 작품을 쓸 때 가장 선호하는 펜으로 워터맨을 사용하는 등 <톰소여의 모험> 마크 트웨인과 <달과 6펜스>의 서머셋 모옴은 워터맨과의 인연이 깊은 작가들이다.

세계 최초로 대서양 횡단비행에 성공한 찰스 린드버그는 워터맨으로 항해일지를 기록했고, 영국에서 호주를 비행한 첫 여성 비행사 에이미 존슨 또한 워터맨의 사람들 중 한 사람으로 남았다.

1-둥근 형태에서 벗어난 사각디자인의 만년필 '슬림 라즈베리(Exception Slim Raspberry)'는 모양과 색상을 통해 만년필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꾼다
2-헤미스피어 래디언스(Hemisphere Radiance)
3-둥글고 두터운 만년필의 디자인을 슬림하게 바꾼 워터맨 익셉션 (Exception)라인

워터맨은 만년필을 발명한 것뿐 아니라 발명가로서 만년필에 대한 선입견을 없애고 인식을 확장시키기도 했다. 세계 최초로 여성을 위한 만년필을 선보여 일반적으로 남성의 필기구라인식되어온 만년필에 대한 개념을 전환시킨 것.

이는 사회적인 업무 중에서도 고위의 역할을 하는 대부분이 남성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 남성과 여성을 동등한 입장으로 바라보는 관점에서 비롯된 것으로 결국 여성이라는 넓은 고객층을 확보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성의 스타일과 여성의 관심사를 고려하여 디자인된 많은 모델들은 여성에 대한 배려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남성에 비해 작고 얇은 손을 지닌 여성들의 필기감, 재킷 안주머니에 만년필을 넣고 다니는 남성들과 달리 핸드백 등에 넣고 다닌다는 점 등을 감안해 만들어진 제품들이 그것이다.

색상에는 펄을 가미하고 보석과 꽃에서 영향을 받은 도안을 통해 투박했던 만년필에 상큼한 여성미를 풍기게 하고 작은 마스카라를 연상시킬 정도로 얇게 잘 빠진 만년필은 남성적인 무게감을 덜어냈다.

워터맨은 과거 자신의 씁쓸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실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만년필을 고안해냈다. 실용성을 강조하는 워터맨이 현재까지도 수공작업을 고수하는 것은 고객이 만년필을 사용함에 있어 그 편안함을 100% 활용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배려를 아끼지 않는 것이다.

워터맨 만년필이 세기를 넘는 세계적인 만년필로 인정받는 것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이들과 편리함을 나누기 위해 발명되었기 때문이다. 누구를 위함인지, 어떠한 목적을 지니는지에 대한 확고한 방향이 일구어낸 워터맨의 발명품 만년필은 인간을 위해 명품이 지녀야 할 가치를 함께 발견해냈다.



글, 유진 미술세계 선임기자 사진, (주)항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