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 다문화를 품다] 서울국제여성 영화제 등 한국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기회 제공

지난 2월28일 인천여성의전화에서는 특별한 시사회가 열렸다. 네 쌍의 부부가 자신들의 첫 '영화'를 대면하는 자리. 어떤 부부는 아들의 출산 과정을 담았고, 어떤 남편은 아내의 이상형이 무엇인지 묻는 인터뷰 장면을 찍었다. 어떤 아내는 결혼 전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기도 했다. 소재도 구성도 다 달랐지만 이들 간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1-다문화 영화 '반두비'
2-다문화 영화 '로니를 찾아서'
3,4-이주노동자영화제
5-이주여성 영화제작 워크숍에 참가한 강호구 씨

다문화 부부, 카메라를 들다

남편들은 한국인이고 아내들은 그들과 결혼해 이주한 필리핀, 베트남인이라는 것.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주최하고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주관, 인천여성의전화가 후원한 이주여성 영화제작 워크숍 '다문화 부부가 만드는 함께 하는 카메라'에 참가한 부부들이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손희정 프로그래머는 "이주여성이 자신을 표현하고 한국인 남편을 비롯한 한국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기회"로서 이 워크숍을 기획했다고 말했다. 낯선 카메라 언어를 함께 배우고 다루어본 부부들의 소감은 남다르다. 강호구 씨는 "아내 개인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아내의 모국인 필리핀 문화와 다른 국가에서 온 이주여성들에 대해서도 관심이 생겼다"고 말했다.

이주여성 영화제작 워크숍은 올해로 3회째를 맞는다. 작년까지는 이주여성 혼자 참가했고 부부가 함께 하는 방식은 올해 처음 시도됐다. 그만큼 결과물들은 '관계'에 대한 메시지를 많이 담고 있다. 다문화 가정을 꾸리며 사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들과 공존하며 살 수밖에 없는 한국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필요한 고민인 셈이다.

그래서 이들의 카메라에 포착된 풍경은 평범하되 뜻 깊다. 아니 평범해서 더욱 뜻 깊다. 이 사회가 과연 한국인 김연국 씨와 베트남인 죽 마이 씨의 아들 '상익'이가 행복하게 살 만한 곳인가, 저 평범한 일상들이 소중하게 지켜질 수 있는 곳인가를 반추하게 되기 때문에.

이 영화들은 4월9일부터 16일까지 열리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기간에 정식으로 상영된다.

이주민, 영화를 통해 스스로 발언하다

디지털 카메라가 보급되면서 영화는 사회적 소수자인 이주민들이 자신의 상황을 스스로 기록하고 표현할 수 있는 대안 미디어로 자리잡고 있다. 2006년부터 시작된 이주노동자영화제는 그 한 예이다.

매년 8월 경 열리는 이주노동자영화제에서는 한국뿐 아니라 각국의 이주민들에 관련한 영화들이 상영된다. 이주노동자의 방송 MWTV와 각 지역의 이주노동자 커뮤니티가 공동 주최한다. 이주민들의 현실을 알리는 것을 넘어 이주민들 스스로 사회 속에서의 삶을 성찰하는 장이다.

집행위원장인 방글라데시 출신 마붑 알럼 씨는 이 영화제가 "비단 한국사회의 상황만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노동자 이주, 국제 결혼, 다문화 가정 자녀 출산 등은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이다. 한국사회에서 사람들이 이주할 수밖에 없는 이유, 이주의 현실, 그들을 아우르려는 문화 다양성 정책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은 곧 이 시대의 삶의 조건을 고민하는 출발점일 수 있다.

이주민 주인공 독립영화

독립영화계에서도 이주민을 주제로 한 영화 편수가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서울독립영화제, 인디다큐페스티벌, 전주국제영화제 등에서 이주를 소재로 삼은 단편영화들은 단골메뉴가 되었고 올 봄에는 이주민이 주인공인 세 편의 장편영화 '반두비', '로니를 찾아서', '처음 만난 사람들'이 개봉한다.

영화의 내용도 달라지고 있다. 서울독립영화제의 조영각 집행위원장은 "이전에는 이주 자체를 소재로 삼았던 영화가 많았다면 이제는 이주민들이 우리 주변의 일원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분석했다. 이주민들의 캐릭터도 다양하고 친근해졌다. 그만큼 이주민을 낯설고 이질적인 존재로 보는 것을 넘어, 이들과 어떻게 관계 맺으며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신동일 감독의 '반두비'가 좋은 예다. 이 영화는 한국인 여고생과 방글라데시 출신 이주노동자 간의 우정을 그린다. 이혼한 엄마, 엄마의 새 애인과 함께 사는 여고생이 어느날 한 이주노동자의 지갑을 주워서 챙기려 했다가 그에게 붙잡힌다. 엉겁결에 소원 하나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가 그의 떼인 월급을 함께 받으러 다닌다. 간략한 시놉시스만 봐도 현실을 직시하되 일상적으로, 경쾌하게 풀어내려는 시선이 느껴진다. 제목인 '반두비'는 벵갈어로 '참 좋은 친구'라는 뜻이다.

'로니를 찾아서' 역시 '사람'에 주목하는 영화다. 한 태권도장 사범이 원생을 모집하기 위해 벌인 시범 경기에서 평소 무시하던 방글라데시 출신 청년에게 진 후,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그를 찾아 다닌다는 내용. 그를 찾는 과정에서 돈을 벌기 위해 고향을 떠나온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사람에 주목하는 다문화 영화

이주민들 각자는 한 개인이지만, 이들의 삶의 조건과 이들을 둘러싼 시선은 지극히 사회적이다. 주류 언론의 대안 미디어로서의 독립영화는 이주민들을 사회적 소수자라는 점에서 주목해 왔다. 이런 정치적인 접근은 이들을 통해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환기하는 데 기여했지만 동시에 이주민들을 고통 받는 계층으로 틀 지워버리는 한계가 있었다.

최근 영화 속에 등장하는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이주민들은 다른 어떤 의미보다도 먼저 공존의 대상으로 다가온다. 일상적으로 스쳐 지나가고, 관계 맺고, 손을 잡거나 다툴 수 있는, 지금 여기에 엄연히 살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

조영각 집행위원장은 "한 편의 영화가 사회 전체의 가치관을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영화가 그것을 바꾸어 나가는 중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왼쪽) 손희정 프로그래머 / (오른쪽) 마붑 알럼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손희정 프로그래머
"이주여성에 자신을 표현하는 영상 언어 제공"


이주여성 영화제작 워크숍의 기획 의도는?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이주여성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영상언어를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을 통해 이주여성의 삶을 보여주고 싶었다. 사람들의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작업으로서 기획했다. 결과물들은 DVD로 만들어 교육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부부를 대상으로 워크숍을 진행한 이유는?

시민단체에서 진행하는 이주민 대상 프로그램의 초점이 대부분 이주여성 교육에 맞춰져 있더라. 이런 과정을 통해 여성들은 의식이 고양되고 평등을 지향하게 됐는데 정작 남편, 가족들에게는 그들과 교감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교육 기회가 없었다. 이주여성들이 목소리를 내고 소통하며 살기 위해서는 주변 사람들도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참가자들의 반응은 어땠나?

워크숍이 끝난 후 모든 부부가 "서로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고 했다. 올해 참가한 아내들은 한국에 온지 1~2년밖에 되지 않아 한국어가 서툴었기 때문에 이제까지 깊은 소통이 어려웠었던 것 같다. 사이가 안 좋았던 부부도 이런 과정을 통해 화해할 수 있었다. 남편은 화면에 찍힌 아내의 불만을 보고 그것을 이해하게 되었고, 아내는 어떻게 불만을 표현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 한국에 사는 고통을 치유하는 계기도 된 것 같다.

이 워크숍의 장기 목표는?

작년 워크숍에 참여했던 히로코라는 여성은 미디어 활동가가 되었다. 이주여성들이 그렇게 주체적으로 미디어를 운영하도록 돕는 것이 장기 목표다. 여러 시민 단체들과 함께 진행함으로써 미디어 교육이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도록 하고 있다. 다문화 사회를 만드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반두비' '로니를 찾아서' 주연 마붑 알럼
"한국인들 이주민을 새 가족으로 받아주었으면"


'반두비'와 '로니를 찾아서'에는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반두비'는 감독의 전작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 엑스트라로 나온 것을 계기로 출연하게 됐다. 그가 이주민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만드는 것을 도와달라고 했다. 주인공 역할 남자배우를 찾아 달라고 했는데 어렵더라. 그 와중에 시나리오도 읽고, 감독과 이주민의 상황에 대해서도 토론했는데 둘이 영화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같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로니를 찾아서'는 이주민 센터에서 연락을 받고 출연하게 됐다. 이 영화에서도 출연 외에 시나리오에 참여하고, 다른 출연자들을 섭외하는 역할을 했다.

영화를 촬영한 소감은?

한국인 스태프, 배우들과 함께 오래 지내고 힘들 때는 서로 어깨도 주물러 주기도 했다는 것이 가장 인상 깊다. 한국인과 이주민들이 이렇게 편한 관계가 될 수 있다는 현장에서의 깨달음이 곧 이 영화들의 메시지인 것 같다.

한국사회에서 이주민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한국사회는 잘 사는 사회의 문화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다. 기존 언론에서는 이주민들에게 범죄자 같은 이상한 역할을 강요한다. 우리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주민을 불쌍하거나 우스운 캐릭터로 만들어 버리는 몇몇 방송 프로그램은 편치 않았다.

관객들이 이 영화에서 무엇을 보기를 바라나?

국적과 피부색이 달라도 친구가 될 수 있고, 누구든 어디서 오래 거주하면 그 사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 이주노동자들 스스로도 따뜻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았으면 좋겠다. 한국인들은 이주민을 새로운 '가족'으로 받아들여주었으면 한다. 이주민과 같이 살기 위해 준비해야지 우리를 도와달라는 것이 아니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