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음식 전쟁 중] 고급화·차별화·정부 지원 업고 일식·프랑스식 세계화 치열한 경쟁후발주자 한식, 세계 음식 자국화하는 일본서 배워야

1-와인전문점 매드포갈릭 '보졸레누보' 판매
2-랍스터 떡볶음
3-프랑스 와이너리 전시회
4-스시레스토랑
5-대표적인 세계 고급요리로 꼽히는 일본 전통 정찬 가미세키요리

지난 달 말, 급증하는 일식 전문점 때문에 화가 난 파리 시민들이 시청에 청원서를 냈다. 이대로 라면 바게트 가게도 찾기 어려운 날이 올테니 식당 수를 제한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청원서 제출을 위해 시민들은 서명운동까지 벌였다고 한다.

파리시에는 550~600곳의 일본 음식점이 성업 중인데다, 파리 한복판인 생탄(Sainte-Anne)거리가 아예 '일본 구역'으로 불릴 정도로 일식 붐이 대단하다.

파리 시민들의 청원서 사건이 흥미로운 이유는 세계 식문화의 격전 양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음식의 세계진출은 어마어마한 부가가치를 창출할 뿐 아니라 그 나라의 이미지를 상승시키는 등 문화적 효과도 크다. 프랑스, 일본, 미국, 태국 등 세계 여러나라에서 자국 요리를 세계시장에 심기 위해 열을 올리는 이유다.

최대 음식 대국인 프랑스와 일본을 중심으로 세계의 치열한 음식전쟁에 대해 살펴보고, 한식 세계화의 현황와 문제점도 짚어본다. 또, 음식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어떤 전략과 전술이 필요한지 전문가에게 들어본다.

프랑스인들 "우리 음식이 최고인데..."

프랑스 국민의 자국 음식에 대한 자부심을 생각해 볼 때 일본 음식점의 증가에 발끈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세계를 점령한 미국 가공식품 체인점도 프랑스에서는 힘을 못쓰는 형편이다. 버거킹은 이미 10년 전에 프랑스에서 철수했고, 스타벅스도 파리와 리옹, 두 도시에서만 영업을 하고 있다.

주한 프랑스 문화원 이현지 대외 홍보 담당관은 "이는 정부차원의 보호 때문이 아니라 민간인들의 자국 음식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각별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자국 음식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남다른 자부심은 세계적으로 프랑스 음식이 최고라는 인식을 심어줬다.

세계적으로 프랑스 요리를 먹는 것은 높은 사회적 신분과 문화수준을 상징한다. 와인을 모르면 교양인 취급을 받지 못한다. 우리사회의 보졸레 와인과 프랑스 와인 배우기 열풍만 봐도 프랑스 음식의 위상과 상징성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또, 끊임 없이 맛과 메뉴의 차별화, 고급화 그리고 레스토랑의 인테리어 같은 시각적 효과에 노력을 기울인 것도 프랑스 음식이 세계 일류요리로 입지를 굳히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노력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프랑스 정부는 와인, 치즈 등 프랑스산 식품과 농산물의 해외진출을 돕기 위해 1961년부터 소펙사(Sopexa)라는 기관을 만들어 운영 중이다. 한국을 비롯해 세계 35개국에 진출한 소펙사는 관련 업체의 해당 국가 진출에 필요한 컨설팅을 제공하며, 세미나와 마케팅 활동, 언론홍보도 지원하고 있다.

와인행사, ‘프랑스 음식문화 축제’와 프랑스 와인의 1인자를 뽑는 '한국 소믈리에 대회' 같은 행사도 주관한다. 소펙사의 이러한 적극적인 활동은 국내에서 프랑스 와인열풍을 일으키는데 일조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밖에 프랑스 정부차원에서 최우수 요리사를 지정해 해외에 파견하고, 원산지품질등급표시제(AOC)를 통한 식품위생 관리도 철저히 하는 등 자국 음식을 정책적으로 보호하고 육성하고 있다.

소펙사 한국사무소 정석영 부장은 "프랑스 음식이 세계 최고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음식을 단순한 제품이 아닌 총제적인 문화로 인식하고, 단기적 효과보다 장기적 효과에 집중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프랑스인들은 자국의 와인을 말할 때 '떼루아(Terroir)'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프랑스어로 원래 토양을 의미하는 이 단어는 포도가 자라는 토양과 기후조건과 역사, 철학, 농부의 혼 등 와인이 만들어지는 모든 환경을 뜻한다. 프랑스인들이 와인을 문화와 동급으로 여기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6-전복갈비찜
7-홍계탕
8-광주요 조태권 회장
9-파리에 있는 라멘집
10-샤를 쿠엥트로 르 꼬르동 블루 아시아 지역 회장이 7일 롯데호텔에서 열린 '한식 세계화 2009 국제 심포지엄'에서 발제자로 연설을 하고 있다

일식, 요리 지존국 프랑스를 이길까

이처럼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의 요리를 자랑하는 프랑스의 최고 심장부를 장악한 일본음식의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전문가들은 일본이 일찍부터 프랑스 요리를 겨냥해 달려온 결과라고 말한다. 100여 년 전, 메이지유신과 함께 본격적으로 서양요리를 도입한 일본은 "서양보다 뛰어난 음식을 만들자"는 집념으로 돈가스, 오므라이스, 단팥빵 등 서양과 일본요리를 절충한 새로운 스타일의 요리를 만드는데 열정을 쏟아 붓는다. 그때, 가장 훌륭한 서양요리로 인정 받는 프랑스요리를 목표로 삼았다는 것이다.

일본의 식문화 전문가 오카다 데쓰의 저서 '돈가스의 탄생'에는 이러한 과정히 자세히 소개돼 있다.

그리고 불과 수십 여년 만에, 스시와 사케 등 일식은 고급음식으로 평가받으며, 파리는 물론, 서울과 뉴욕 등 세계 주요도시의 심장부마다 진출해 붐을 일으키고 있다.

일식은 가장 단기간에 세계화에 성공한 보기 드문 사례로 꼽힌다. 일식의 세계화에서 요리의 고급화와 차별화는 기본이고, 정부와 민간 차원의 다각적인 노력도 빼놓을 수 없다. 일본 농림수산성은 2007년부터 해외에 있는 2만 개가 넘는 일식당에 대한 품질관리에 나섰다. 위생관리와 조리기술 보급 등을 정부 차원에서 하며, 인증제를 실시하는 것이다.

또, 같은 해에 '일식당 해외 보급 추진기구(JRO)'도 설립해 일식의 저변확대에 힘쓰고 있다. JRO를 통해 일본 정부는 일식을 프랑스, 중국요리와 함께 세계 3대 요리로 만들고, 2010년까지 전세계의 일식 애호가 인구를 12억명으로 늘린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JRO는 주요 국가에 현지조직을 세워 일식당 간의 정보교환과 홍보활동도 지원하고 있다.

지금 추세로라면 일본정부의 목표는 실현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더구나 일식은 프랑스 요리와 달리 대중화에도 성공한 경우로 평가 받는다. 대부분의 프랑스 요리는 높은 가격과 까다로운 식사예법으로 일반인들이 가까이 하기 힘들다는 한계가 있다. 프랑스 요리는 이탈리아의 피자나 스파게티 같은 대중적인 단품요리가 없는 게 약점으로 지적된다.

반면, 일식은 가이세키나 스시 같은 고급요리뿐 아니라 라멘, 우동 등 음식도 널리 보급해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파리 시민들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일본 라멘 집을 시기를 넘어 위협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음식전쟁의 후발주자로 뛰어든 한국

이밖에도 세계 여러나라가 치열한 음식경쟁에 뛰어들어 경합을 벌이고 있다. 이 중 태국은 프랑스나 일본 등과 더불어 성공적인 음식 세계화 사례로 거론된다. 태국 정부는 "태국을 세계의 주방으로"라는 구호 아래 세계 4대 요리로 꼽히는 태국음식의 세계화를 국가적인 프로젝트로 추진해오고 있다.

2001년부터 태국 상무부 산하에 '키친 오브 더 월드(Kitchen of the World)'라는 음식 세계화 본부를 두고, 해외 태국 레스토랑 인증서 발급을 통해 태국 레스토랑의 인지도 향상 등에 힘쓰고 있다. 태국은 2000년 5500개였던 해외의 태국 음식점 수를 8년 만에 두배 이상으로 늘리는 등 자국 음식 세계화의 가시적 성과를 톡톡히 올리고 있다.

이 같은 음식 세계화 바람에 뒤질세라 최근 우리 정부도 '한식세계화 추진단'을 발족시키며 음식경쟁에 뛰어 들고 있다. 지난 4월 7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와 농림수산식품부 주관으로 '한식 세계화 2009 국제심포지엄'이 열렸다.

심포지엄에서 정부는 2017년까지 한식을 세계 5대 음식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지난해 10월 발표한 한식 세계화 프로젝트의 세부전략인 '한식 세계화 추진 전략'이 발표됐다.

전략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 보면, 정부가 2013년까지 500억원 규모의 '식품산업 투자펀드'를 조성해 외식창업을 촉진하고, 요리학교를 세워 스타 요리사를 배출할 예정이다. 또, 특급호텔에 한식당을 늘리는 등 '스타 한식당' 키우기 프로젝트도 추진한다. 2017년까지 세계적인 한식당과 프랜차이즈 업체 100개를 육성하는 방안도 나왔다.

한식을 세계인의 입맛에 맞게 개발하는 등 중장기적인 연구개발 계획도 세우고 있다. 또, 전문인력 자문위원을 구성해 인테리어와 식기 등 한식당의 고급화를 지원하고, 농식품 이력 추적과 식품위해요소 중점과리요소(HACCP) 기준을 확대 적용해 한식의 안전성을 높인다는 방침이다. 한식의 세계화, 성공할 수 있을까.

세계 음식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민간기업 차원에서 먼저 과감히 한식 세계화의 출사표를 던졌던 광주요 조태권 회장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식 세계화 프로젝트를 현실적인 잣대로 평가한다.

조 회장은 "지금 단계에선 일본이나 태국처럼 해외 레스토랑 인증서 발급이나 요리사 양성기관 설립은 전혀 의미가 없다"고 잘라 말한다.

프랑스나 일본의 사례에서 보듯이 음식의 세계화에서 선행되어야 할 것은 자국 음식에 대한 국민의 호응과 인식이라는 것이다.

"다른 나라 사람들을 감동시키려면 먼저 자국민을 감동시켜야 해요. 한식당 하면 요정을 떠올리거나 싸구려 밥집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던 때가 불과 몇 년 전입니다. 한식엔 도통 돈을 안 쓰려고 했죠. 그런 상태에서 어떻게 한식을 다른 나라 사람에게 팔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한식에 대한 평가절하된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우선 최고급 요리, 일명 '수퍼스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조 회장은 새로운 개념의 한식당 '가온'(지난해 건물 임대 문제 등으로 잠시 문을 닫은 상태다)을 열고, 홍삼과 오골계를 고아낸 육수에 자연송이와 전복 등을 넣어 끓인 홍계탕, 랍스터와 함께 만든 떡볶이, 전복을 넣은 된장찌개 등 값비싼 식자재를 사용해 만든 수퍼스타 요리를 탄생시켰다.

그의 시도를 냉소적으로 바라봤던 이들이 서서히 변해갔다. 비싼 한식을 외면하던 우리나라 상류층 가운데 가온을 찾는 단골고객이 늘어가자, 아랍의 왕자 등 세계 부호들도 이곳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가온에서 거둔 한식 세계화는 절반의 성공"이라고 자평하며 "아직도 자국민의 혀를 감동시킬 만한 수퍼스타급 한식이 부족하고, 한식에 대한 국민의 인식도 낮은 상태"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가면 한식의 세계화는 요원한 일이라고 꼬집는다.

조 회장은 얼마 전, 한국계 미국인이 미국 뉴욕에서 운영하고 있는 퓨전 쌈 바 '모모후쿠'를 세계적으로 성공한 한식당으로 소개한 기사도 한식의 세계화에 대한 잘못된 인식의 사례로 지적했다.

"모모후쿠라는 식당 명 자체가 누가 들어도 일본어인데, 어떻게 한식당이라고 하겠어요? 우리는 돈가스, 빵, 불고기, 라면 등 세계 음식을 자국화하는 일본의 세계화 전략을 배워야 해요."

한식이 세계시장에 진출해 인정 받기 위해선 막대한 자본력을 투입해야 하는 것은 물론, 더욱 치밀하고 전략과 조직력이 요구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왜 굳이 한식의 세계화에 성공해야 할까.

무엇보다 경제적인 이유가 가장 크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무역적자는 133억 달러. 이 가운데 100억 불이 커피와 위스키, 와인, 관광에서 발생했다. 지금 우리나라의 문화적자가 엄청나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다. 그래서 21세기엔 문화 없이 선진국 대열에 오를 수 없다는 얘기가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전세화 기자 cand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