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고진·네그리 등 2000년대 한국 지식인 사회 이슈로 부상해외 유명 저널 통해 국내 소개… 인터넷 발달로 틈새 시장 형성

1-슬라보예 지젝(사진제공 : 마티 출판사)
2-가라타니 고진
3-안토니오 네그리(사진제공 : 세종서적)
4-조르조 아감벤(사진제공 : 새물결 출판사)
5-자크 랑시에르(사진제공 : 궁리)

들뢰즈, 벤야민, 라깡. 한때 한국의 지식인 사회를 뒤흔들었던 지식인이다. 해외 유명 저널에서 발표, 인용되는 지식인은 국내 지식인 사회에도 영향을 주게 마련이다. 일반 독자들이 신문과 전문잡지를 비롯한 매체를 통해 혜안을 얻듯, 지식인 역시 국내외 석학의 분석을 바탕으로 사회 현안을 분석하게 된다.

국내 지식인들의 저서, 비평, 칼럼, 강연, 토론 등을 통해 소개, 인용되는 이른바 ‘지식인의 지식인‘은 우리 지식사회와 현실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

최근 정보를 얻는 매체가 과거에 비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국내 지식인 사회에 소개되는 해외 석학의 숫자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소개된 사상이 인용되는 기간은 더 짧아 졌다. 국내 지식인 사회를 움직이는 ‘지식인의 지식인’은 누굴까? 2000년대 들어 최근까지 한국 지식인 사회 이슈가 된 지식인을 소개한다.

슬라보예 지젝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을 빼놓고 2000년대 한국 지식인 사회를 말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수 년 전 젊은 평론가들을 중심으로 라깡을 더듬어 올라가 정신분석학을 비평에 도입했던 시도 역시 지젝의 영향이라 볼 수 있다.

1949년 슬로베니아에서 태어난 그는 류블랴나 대학에서 철학과 사회학을 전공해 1972년 철학 박사학위를, 파리 8대학에서 자크 라깡의 정신분석학을 전공해 두 번째 박사학위를 받았다. 라깡의 정신분석학과 마르크스주의, 헤겔의 독일 관념론 같은 철학적 주제를 SF 소설과 할리우드 영화, 모차르트와 바그너의 오페라 등 다양한 장르의 문화 예술을 통해 분석한다.

1989년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을 출간하며 지식인 사회에 이름을 내민 그는 이후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1993)’, ‘까다로운 주체(1999)’ 등 논쟁적인 저서를 발표해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주의 이후 세계에서 가장 주목 받는 학자로 손꼽힌다. 또한 이라크 전쟁, 9.11테러, 전체주의 같은 정치적인 이슈에 대해 발언하면서 최고의 행동하는 지성인이 됐다.

최근 국내에 그의 대표 저서 ‘시차적 관점(마티 출판사)’이 번역 출간됐다. 지젝은 ‘어떤 천체를 두 지점에서 보았을 때 대상의 위치가 달라 보이는 것’을 뜻하는 천문용어 ‘시차(Parallax)’에서 개념을 빌려와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관점이 발생하는 ‘시차적 간극’에 대해 설명한다.

국내 지젝에 관한 지식인들의 발언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도올 김용옥은 최근 한 일간지의 대담에서 ‘효경’을 주해ㆍ번역하는 데 라깡의 정신분석에서 도움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는가 하면 동ㆍ서 문명을 비교하면서 ‘철학의 록스타’라는 슬라보예 지젝의 시각에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지난해 촛불시위가 한창일 때 논객 김정한은 ‘그대 왜 촛불을 끄셨나요?’에서 지젝의 말을 빌려 자신의 의견을 밝힌 바 있다.

최근 문학평론가 김홍중 씨는 비평 ‘행복의 예술, 그 희미한 메시아적 힘’에서 지젝의 이론을 빌려 한국문학의 새로운 현상을 분석한 바 있다. 문화연대 부설 연구기관의 무크지 ‘문화사회’ 3월 호에서는 발터벤야민의 역사철학과 슬라보예 지젝 이론을 다루기도 했다.

가라타니 고진

지젝의 ‘시차적 관점’을 있게 한 지식인이 일본의 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柄谷善男) 이다. ‘시차적 관점’의 서문에서 지젝은 이렇게 썼다. “가라타니 고진은 저서 ‘트랜스크리틱’에서 ‘시차적 관점’의 중요한 잠재력에 대해 주장하려고 노력한다.” 지젝의 책이 2006년에 출간된 점에 미루어 볼 때 2001년 작인 가라타니 고진의 책에서 ‘시차적 관점’이라는 근본 주제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1941년 일본에서 태어난 가라타니 고진은 문학평론가에서 출발해 역사, 건축, 철학 등 전방위 문화예술 평론가로 변신했다. 비서구인의 주변부적 문제의식과 서양의 근현대사상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결부시켜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하는 사유방식으로 서구에서도 각광 받고 있다. ‘인문학계의 무라카미 하루키’라 할 만큼 국내 젊은 인문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2006년 국내 번역 출간된 ‘근대문학의 종언’은 국내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고진은 2003년 “미국은 1950년대에, 일본은 1980년대에, 한국은 1990년대 말부터 문학이 급속히 쇠퇴했다”고 지적한 바 있고, 그의 언급을 시발점으로 한국문학의 위기가 문학계 화두가 되어 왔다.

문학평론가 서영채 씨는 ‘역설의 생산: 문학성에 대한 성찰’(문학동네 2009년 봄호)에서 “문학 위기에 대한 담론은 199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인 유행이 시작되어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고 지적하며 2004년에 발표한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을 본격적인 논쟁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문학평론가 권성우 씨 역시 ‘추억과 집착- ‘근대문학의 종언’과 그 논의에 대하여’(‘안과 밖’ 2007년 상반기호)에서 “가라타니의 ‘근대문학의 종언’은 지금 이 시대, 우리에게 문학은, 비평은 무엇인가를 근본적으로 되묻고 있다”라는 말로 고진이 국내 문학계에 던진 파장을 설명한 바 있다.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을 직접 번역한 평론가 조영일 씨는 고진의 서적을 바탕으로 한국문학계를 비판한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을 지난해 출간한 바 있다.

안토리오 네그리

이탈리아 좌파정치 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는 1933년 이탈리아 파노바에서 출생했다. 21세기 가장 급진적인 정치사상가이자 ‘아우토노미아(자율성, 자주성)’운동의 창시자다. 1957년 23세 때 독일 역사주의에 관한 논문을 발표, 박사학위를 받고 1960년대 후반 아우토노미아 사상을 발전시켜 이탈리아 비의회좌파운동에 참여했다.

현재 마르크스에서 들뢰즈,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를 아우르는 최고의 지성으로 평가 받는다. 대표적인 저서는 ‘지배와 사보타지(1977)’, ‘마르크스를 넘어선 마르크스(1978)’, ‘제국(2000)’ 등이 있다.

지난 해 마이클 하트와 공저한 ‘다중(Multitude, 세종서적)’이 국내 출간됐다. 2000년 출간된 ‘제국’에서 한 발 더 나아간 형태다. 그는 제국주의 시대에서 지배 권력의 대항자였던 인민, 대중, 노동계급의 개념을 세계화시대를 맞아 ‘다중’으로 지칭한다. 네그리는 세계화의 네트워크 권력이 더 치밀하게 강화될수록 다중의 저항적 잠재력도 커진다고 말한다.

국내 젊은 소장학자들을 중심으로 그의 연구가 활발하다. 특히 그의 최근 저서 ‘다중’은 자율평론(http://waam.net)에 기고된 원고의 일부가 국내 유통되면서 원서 출간과 동시에 국내에 이론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인문·사회과학학 교육원 ‘다중지성의 정원’은 네그리의 ‘다중’개념에서 이름을 빌려온 것이다. 이곳에서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안토니오 네그리를 비롯해 마르크스, 들뢰즈 등의 강의를 하고 있다.

조르조 아감벤과 자크 랑시에르

국내 지식인 사회에서 가장 핫(Hot)한 인물은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과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다. 최근 문예지와 학술지를 중심으로 이들의 저작과 이론을 비평에 도입한 평론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지난해를 기준으로 이들의 저서가 번역, 출간되는 수가 부쩍 늘어났기 때문이다.

1942년 로마에서 출생한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미학적 시각을 지닌 비평가로, 현재 베네치아 건축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마르틴 하이데거와 발터 벤야민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그는 미학과 정치를 넘나들며 인간을 ‘말하는 동물’로 정의했다.

미셸 푸코의 생철학과 칼 슈미트의 비상사태를 토대로 로마시대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를 현대 정치를 비추어 쓴 책 ‘호모 사케르’로 주목받았다. 대표 저서로 ‘아우슈비츠의 남겨진 것’(1998), ‘예외상태’(2003) 등이 있으며 지난 해 ‘호모 사케르’가 국내 번역 출간됐다.

철학자 이진경은 저서 ‘모더니티의 지층들’에서 아감벤의 이론을 빌어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다. 현대사회론을 포괄적으로 소개한 이 책에서 이진경은 현대자본주의와 인권의 개념을 설명하며 아감벤을 도입한다.

문학평론가 복도훈 씨 역시 ‘목소리가 사라지는 곳으로 문학이 가야한다’(문예중앙 2007년 가을호)에서 아감벤과 지젝의 이론을 소개하며 한국문학사에서 ‘소리’와 관련된 고찰을 시도하고 있다.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의 수제자였던 자크 랑시에르는 1960년대 ‘자본론 읽기’의 공저자로 이름을 알렸다. ‘자본론 읽기’가 1990년대에 한국어로 번역되면서, 랑시에르는 한국의 지식인 사회에도 크게 각광받기 시작했다. 1968년 프랑스 학생운동을 기점으로 랑시에르는 스승인 알튀세르를 엘리트주의자라고 비판하며 독자적인 길을 걷는다.

영화광인 그는 미학과 정치의 관계를 분석한 저술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지난 해 ‘무지한 스승’, ‘불화’ 등 6권의 책이 잇따라 국내 번역 출간되면서 다시 주목 받게 됐다.

인문학, 특히 문학 비평분야에서 랑시에르는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최근 문학 비평이 ‘언어의 새로움’에 치중된 상태에서 ‘말 없는 말’(문학의 언어는 일상생활에서 쓰는 소통의 언어와 달라지며 문학성을 쟁취한다는 랑시에르의 문학 개념) 등 랑시에르의 이론은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분석하기 좋은 텍스트가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문학평론가 차미령은 비평 ‘소설과 정치’에서 작가 황정은의 소설을 분석하며 랑시에르의 저서 ‘감성의 분할’을 인용하고 있다.

평론가들의 반응을 반영하듯, 계간지 ‘문학과 사회’ 올해 봄호에서는 자크 랑시에르의 인터뷰를 특별기고 형식으로 소개했다.

이들 ‘지식인의 지식인’은 흔히 해외 유명 인문 사회과학 저널을 통해 국내 지식인 사회에 소개된다. 국내에서 발견되는 특징 중 하나는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지식인의 지식인’의 저서가 대중을 대상으로 한 ‘틈새 출판시장’을 형성했다는 점이다. 이미 하나의 브랜드가 된 지젝의 저서들과 최근 1,2년 사이 각광받기 시작한 조르조 아감벤과 자크 랑시에르가 이에 해당된다.

가라타니 고진의 저서 ‘근대문학의 종언’은 이미 ‘읽을 사람은 다 읽은’ 유명 저서가 됐다. 모두 포털사이트 서평 카페에서 인터넷 서평꾼을 통해 소개된 후 유명세를 탔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가장 영향력 있는 인터넷 서평꾼 중 한 명인 로쟈(본명 이현우, 서울대 노어노문과 출강 중)는 전공인 러시아와 비교할 때도 한국에 유독 많은 지식인이 소개되고, 이들 서적이 소비된다고 말한다. 그는 “러시아에서는 지극히 한정된 지식인 사회에서 사상가들의 이론이 소개된다.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것은 푸코와 들뢰즈 정도”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은 대학과 대학가 주변 등 이들 사상가들의 이론이나 고급 담론을 소비하는 시장이 형성되어 있는 듯하다. 새로운 사상가와 이론이 소개되고 맛보기 식으로 회자된 다음 지식인, 이론가로 넘어간다”라고 말했다.

한국의 인터넷 문화는 지식인의 이론과 저서를 소비하는 데도 영향을 미치게 된 셈이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