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문화] disrespect의 준말로 힙합서 유래유교 정서와 결합한 '한국형 디스' 뿐인가

“너는 내 발꿈치의 때만도 못해. 다음 챔피언은 나야. 이 패배자야!”

세상에, 저렇게 예의 없을 수가. TV를 보던 내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든 것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미군방송 AFKN에서 방영해주던 프로 레슬링 프로그램의 한 장면이었다. 우람한 레슬러들이 온 몸을 날려 격투쇼를 벌이던 링 위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들이 대기실에서 쏟아내는 말들이었다.

상대를 정확히 찍어 비하하는 저 말들이라니. 비방은커녕 상대방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조심스러운 대한의 아들, 딸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그냥 열심히 하겠다고 할 일이지… 남의 눈이 두렵지도 않나?’

이번에는 장면을 바꿔서 한 아이를 따라가보자. 키가 작은 사내 아이는 자판기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버튼을 눌러 코카 콜라 캔을 2개 뽑는다. 캔을 따서 마시는 대신 바닥에 내려 놓은 아이는 두 발로 캔을 하나씩 딛고 높이 위치한 펩시 콜라 버튼을 눌러 제품을 뽑는다.

그리고는 바닥의 코카 콜라 캔 2개는 그대로 버려둔 채 유유히 사라진다. 다름 아닌 펩시 콜라의 광고다. 예의 없는 프로 레슬러들을 볼 때처럼 생소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번에는 약간 다르다. 이런 재기 발랄함이라니. 기껏 지켜왔던 예의가 형식적으로 느껴지고 배려는 고리타분한 것이 돼 버린다. 그리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 나라에는 왜 디스(diss) 문화가 없을까?’

동방예의지국에 떨어진 디스 문화

디스(diss)는 ‘disrespect’의 줄임말로 힙합에서 유래한 단어다. 태생부터 배틀(battle: 전쟁, 경쟁)의 성격을 띠고 발전한 힙합 문화에서는 패거리를 나눠 랩과 그래피티, 비보잉, 디제잉 등을 통해 상대 크루를 공격하는 것이 일반화 되어 있다. 상대방의 실명을 거론하는 것은 물론이고 지면에 옮길 수 없을 정도의 거친 욕설이 난무하기도 한다.

직설적인 모욕과 비방, 그리고 적대감이라는 불편한 감정에 대한 거리낌 없는 노출… 디스는 힙합 계를 넘어서 미국 정서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중요한 문화다. 동시에 동방예의지국인 대한민국과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단어이기도 하다. 공개적으로 하는 욕지거리라니 어디 가당키나 한 이야기인가.

그러나 최근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라는 프로그램에서 우리는 ‘한국형 디스’를 목격할 수 있었다.

“어떻게 저런 옷을 만들고 당당하게 통과할 수가 있어?” “저 옷은 영 아닌 것 같은데... 뭔가 뒤에서 밀어주는 세력이 있는 것 아닐까요?”

미국의 인기 프로그램인 프로젝트 런웨이를 국내 케이블 방송사에서 수입했을 때 관심사는 한 가지였다. 거침 없이 서로를 욕하는 서양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한국에서는 어떻게 구현될 것인가? 결과는 포맷은 물론 문화까지 사온 것으로 판명이 났다. 출연진들은 어설프나마 서로를 비방했고 서툴게나마 자화자찬을 했다. 혹시 PD가 출연진들에게 시킨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해외 판과 비슷한 광경이 연출됐다.

(좌)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에서 출연진 간의 갈등 (우) 한국의 음성적 디스 문화를 보여주는 디시 인사이드

우리 문화는 차라리 자학의 문화다. 한 집단에서 어느 정도로 자신을 낮추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성이 판단되고, 일원으로 받아 들여지느냐, 아니냐가 결정된다. 자신을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것은 아직은 건방진 것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자학의 문화인 동시에 지극한 예절의 문화다. ‘무개념’ 신세대와 막말이 판치고 있다고 하지만 허울로나마 예의와 장유유서 정신이 끈질기게 득세하고 있다.

‘국민 MC’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길에서 얻어 먹은 500원 짜리 아이스크림 값을 지불하기 위해 다시 가게를 방문하고 ‘슈퍼 아저씨’를 ‘선생님’으로 부르는 유재석 만큼은 되어야 한다. 강호동은 걸핏하면 코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한다. 적어도 주류 사회에서는 아직까지 예의와 서열이 무섭도록 강요된다.

최근 급격하게 밀려 들어오는 서양의 디스 문화는 우리의 자학 문화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완전히 상충하는 것들이 만나 이뤄내는 일그러진 하모니가 TV를 통해 뿜어져 나오고 있다. 이른바 ‘한국형 디스’다.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에서 일어난 출연진들 간의 전쟁은 1대1이 아닌 집단전이었다. 한 명을 두고 여러 명이 뒤에서 수근 댔고, 개별 인터뷰에서도 그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 문제는 폭탄이 터지고 난 후였다. 자신에 대한 뒷담화를 눈치 챈 피해자가 집에 가겠다고 울부짖자 정작 수근거렸던 장본인들이 그를 잡아 말렸다.

한 남자 출연진은 잘 모르고 비방한 것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누군가 욕을 하면 욕을 들은 놈보다 욕한 놈이 더 나쁜 놈이 되는 우리의 정서가 그대로 드러났다.

표면적인 예의를 벗은, 진짜 한국인들의 디스를 보고 싶다면 인터넷을 켜면 된다. “한국의 디스는 디시에 있다”는 말이 있듯이, 커뮤니티 사이트인 디시 인사이드에는 온갖 종류의 격렬한 비방이 난무한다. 문희준은 이곳에서 ‘무뇌충’이 되었고, 대통령도 ‘2메가’로 격하됐다. 단, 모두 익명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뒤에서’라는 말은 한국 디스 문화의 특징을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다.

한국의 힙합씬은 어떨까? 디스의 원산지인 힙합계라면 그래도 한국의 색깔이 덜하지 않을까?

“진짜로 디스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어요.”

힙합 가수 김 디지의 말이다. 그는 정부, 대통령, 같은 힙합퍼들을 가리지 않고 거침없이 디스하는 곡을 발표해 온 것으로 유명하다.

“앞에서 욕해 놓고 뒤에서 전화 와서 ‘형님, 죄송해요’하고 사과한다니까요. 쇼 비즈니스적 측면이 강해요.”

그의 말에 따르면 디스가 최초로 양지로 나온 사례는 김구라다. 그러나 그가 보여주는 디스 역시 대한민국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흔히 비교하는 미국 토크쇼 진행자 제이 레노가 아무 죄책감 없이 시종일관 가볍게 비웃는 것과 달리 김구라는 끊임 없이 비방하는 동시에 끊임 없이 사과한다.

최근 그가 진행자로 있는 프로그램에 하늘 같은 선배인 최양락이 출연했을 때는 다리를 모으고 입을 다무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장유유서형 디스다.

유교 정신에 입각한 한국의 디스 문화를 가리켜 왜곡 됐다고 보는 시각도 일부 존재한다. 그러나 진심으로, 화끈하게 욕하지 않았다고 해서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도 우습다. 왜곡된 것인지, 그저 한국형이라고 이름 붙이면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각자 판단할 일이다.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