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계 '엄마'에 빠지다] 최근 출판·공연·영화·미술 등 '엄마 신드롬' 전방위 확산

1-연극 '어머니'
2-소설가 신경숙
3-소설가 공지영

“엄마 미안해, 이렇게 엄마를 먼저 떠나게 돼서.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 찾아서 기다리고 있을게. 엄마 딸로 태어나서 지지리 속도 썩였는데 그래도 난 엄마 딸이라서 참 좋았어. 엄마, 엄마는 이 아름다운 세상 더 보고 오래오래 더 기다리면서 나중에 다시 만나.”

지난 9일 타계한 고 장영희 교수가 어머니 이길자 씨에게 남긴 4문장 100글자의 작별인사다. 빼어난 수필가였던 그녀는 삶의 마지막 순간, 엄마를 부르며 이승을 떠났다. 엄마를 향한 그리움이 가득한 유서는 그녀의 열정적인 삶과 더불어 대중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엄마로 대표되는 가족 코드는 한국 사회 대표적인 정서다. 프랑스 작가 르 클레지오는 지난 12일 이화여대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한국사회는 개인주의가 많은 힘을 발휘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가족이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고 한국 문화의 특성을 말하기도 했다.

진부한 소재인 엄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출판가를 비롯해 공연, 영화, 미술에 이르기까지 문화계 핫 키워드가 됐다. 요즘 부쩍 엄마를 테마로 한 문화 작품이 눈에 띄는 이유는 뭘까? 10년 전 외환위기 때의 ‘아빠 신드롬’과는 무엇이 다를까?

대세는 엄마!

동국대 이해랑예술극장이 작년 9월 재개관부터 올해까지 올린 장기 공연을 보면 자못 흥미롭다. 첫 작품은 배우 손숙이 출연한 ‘어머니’. 올해 초 강부자 주연의 ‘친정엄마와 2박 3일’을 올렸고 다시 4월부터 손숙의 ‘어머니’를 무대에 올리고 있다.

간혹 다른 작품을 올리고 있지만, 장기적으로 인기를 모은 작품은 이 두 개다. 오는 24일 ‘어머니’를 끝내고 나면 다시 ‘친정엄마’를 앵콜 공연하게 된다. 기획사 컬비스의 허상진 씨는 “올해 레퍼토리는 ‘엄마’를 테마로 한 연극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부터 연극계 트렌드가 ‘엄마’로 집중되는 면이 있어요. 올해 초 막을 내린 ‘잘자요 엄마’도 성황리에 진행됐고(객석 점유율 95%), ‘친정엄마’,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도 상당히 반응이 좋았습니다. 시류성을 생각하다 보니 비슷한 테마의 작품을 선택하게 된 것 같습니다.”

출판가에서 엄마 파워는 지난해부터 감지 됐다. 작가 공지영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는 엄마가 해주는 소소한 잔소리 같은 느낌을 전하는 에세이다. ‘엄마 마음’으로 쓴 이 책은 공지영이란 스타 파워와 맞물려 지난 해 문학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올랐다.

신경숙 소설 ‘엄마를 부탁해’는 가정에서 어머니의 부재로 인해 겪는 가족 간의 갈등을 다뤄 어머니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는 작품이다. 지난 10월 출간된 책은 현재 판매 60만 부를 훌쩍 넘었다.

1995년 출간된 ‘사랑하는 나의 엄마에게’도 14년 만인 지난 4월 개정판이 나왔다. 지금은 고인이 된 피천득, 이청준을 비롯해 소설가 최인호, 영화감독 배창호, 배우 최불암 등이 자신의 어머니 이야기를 짧은 편지글 형식으로 쓴 에세이집이다. 출판사인 샘터사는 개정판이 출간된 지 20일 만에 재판을 찍었다.

‘어머니 그리고 엄마’도 유년시절 애틋했던 엄마에 대한 기억을 되새긴다. 드라마 작가 김수현, 소설가 윤후명, 배우 방은진 등 문화계 인사 29명이 어머니에게 쓴 편지글을 엮었다. 이 책을 펴낸 한국미술경영연구소는 출간과 더불어 이달 31일까지 특별기획전 ‘어머니’를 연다. 전시회에는 김흥수, 이만익, 송영방, 김형근, 황주리 등 화가와 사진작가 조선희, 소설가 윤후명 등 22명이 참여했다.

영화계에서는 5월 말부터 엄마 이야기가 쏟아진다. 28일 개봉예정인 봉준호 감독의 ‘마더’는 살인죄로 내몰린 아들의 무고함을 밝히기 위해 사투하는 엄마 이야기가 줄거리다. 엄마라는 다소 진부한 소재에도 불구하고, 김혜자, 원빈 등 쟁쟁한 출연진과 감독의 명성이 맞물려 개봉 전부터 이슈가 되어왔다.

하반기 개봉 예정인 정기훈 감독의 ‘애자’는 유난스러운 성격의 딸과 사는 엄마가 시한부 삶을 통보받은 뒤 딸과 화해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억척 엄마에는 배우 김영애가, 유난스런 딸에는 배우 최강희가 출연한다. 21일 개봉 예정인 최지영 감독의 ‘바다 쪽으로 한뼘 더’는 기면증을 앓는 18살 딸과 40살 엄마에게 온 로맨스를 그린 작품이다.

이들 영화는 장르를 떠나 모두 엄마의 억척스러운 모성을 그렸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왜 엄마에 꽂혔을까?

수많은 문화예술가들이 왜 지금 엄마를 찾을까? 소설가 신경숙 씨는 ‘엄마를 부탁해’ 출간 후 가진 인터뷰에서 “문학적으로 엄마의 자리를 만들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엄마에 대한 소설이 많은 것 같아도 처음부터 끝까지 엄마가 중심이 돼서, 이끌어 나가는 소설은 거의 없어요. 오롯이 엄마의 이야기로 채워진 글을 쓰고 싶었지요. 현실에서도 그렇잖아요. 엄마에게 의지해서 많은 것들을 해결해서 살지만, 사실은 엄마는 주변의 인물로만 존재했던 것 같아요. 문학에서도 엄마는 그런 존재로 있었던 것 같고요.”

작품의 후반부에 속하는 ‘에필로그- 장미묵주’편에서 작가인 딸이 피에타 상을 바라보는 장면은 작가의 이런 의도가 직접적으로 드러난 곳이다. 신 작가는 “가난이나 희생으로 인생을 살아온 엄마의 삶을 예술적 자리로 모셔다 드리겠다는 마음으로 피에타 상과 엄마를 일치시켜 그렸다”고 말했다.

봉준호 감독은 지난 달 영화 ‘마더’ 제작발표회에서 “엄마만큼 원초적인 단어가 없다. 태어나서 처음 쓰는 단어다”라는 말로 엄마가 갖고 있는 사회 문화적 보편성을 말한 바 있다.

“영화를 온도에 비유할 순 없겠지만 예전작품과 비교해서 훨씬 더 뜨거운 영화다. 엄마라는 식상하리만치 평범한 소재를 다루지만 오히려 새로운 영화다. 엄마란 존재가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다.”

신경숙 작가와 봉준호 감독의 경우 삶의 주변부에 머문 엄마의 존재를 작품 중심으로 부각시키겠다는 의도가 있던 셈이다.

한편 엄마를 소재로 한 작품이 각광 받으면서 기존의 작품을 다시 선보이는 사례도 있다. 연극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어머니’ 등은 모두 10년 이상된 작품이 새롭게 인기를 모은 사례다.

‘사랑하는 나의 엄마에게’를 편집한 샘터사 방유진 씨는 14년이 지난 올해, 개정판을 낸 이유에 대해서는 “책이 나온 지 십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 책을 찾는 독자가 많았다. 첫 페이지에 엄마 이야기를 독자가 직접 쓸 수 있는 페이지를 만들었는데, 책을 읽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께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쓰는 공간이다. 선물을 받은 어머니는 곧 어머니의 어머니를 떠올리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방유진 씨는 “1995년 초판은 원고지 한 매 분량으로 부모님께 보내는 편지를 받은 캠페인을 했고 이 원고를 모은 것이 책이다. 이 캠페인에174명이 참여했다”고 덧붙였다. 14년 전 문화예술계 인사 100 여명이 참여할 정도로 ‘엄마’는 문화계 오랜 키워드인 셈이다.

4-에세이 '사랑하는 나의 엄마에게'
5-이만익 '오남매와 어머니'
6-영화 '마더'
7-연극 '잘자요 엄마'
8-연극 '친정엄마와 2박 3일'

엄마로 대표되는 시대상

그렇다면 대중이 ‘엄마’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이들이 팍팍한 경제 현실에서 오는 대중의 무력감을 꼽는다. 10년 전 외환위기 당시 ‘아버지’를 키워드로 한 소설, 드라마, 영화, 노래 등이 인기를 끈 것과 같은 맥락으로 현실에 대한 위기감을 ‘가족의 재건’을 통해 해소한다는 것이다.

대중문화 평론가 김봉섭 씨는 “엄마는 주기적으로 나오는 문화코드다. 최근 현상이 특이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지금이 경제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상황이고, 과거 아버지를 통해서 가족의 재건을 이뤘던 것처럼 지금 엄마를 통해 가족의 상징성을 되찾고 싶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중문화 평론가 이영미 씨는 더 나아가 “10년 전 ‘아버지’를 키워드로 한 문화가 부각 될 때 보다 상황이 더 심각하다”고 말한다. 가부장사회에서 대중이 어머니에게 심리적 위로를 받는 것은 ‘아버지에게 더 이상 기대할 것 없다’는 절망감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현재 문화예술 작품에 나타난 엄마는 일종의 ‘판타지’를 갖고 있다.

김봉섭 평론가는 “드라마 ‘내조의 여왕’이나 영화 ‘마더’의 경우 강한 여성상이라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이외에 ‘엄마를 부탁해’, 연극 ‘어머니’를 비롯한 대다수 작품은 추억 속의 어머니 상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과거 전통적인 어머니 상을 통해 모성에 대한 일종의 판타지를 만드는 셈이다. 이 콘텐츠 들은 푸근한 고향의 이미지를 대중에게 심어 줌으로써 현실을 단념시키는 기능도 한다.

이영미 평론가는 “연극 ‘어머니’나 ‘친정 엄마’의 어머니는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하기 보다는 수십 년 전의 어머니, 나아가 인간 역사에서 축적되어온 어머니를 그리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아버지가 아니고, 엄마일까? 이영미 평론가는 “인간 세상이 싫을 때 마지막으로 기대는 존재가 ‘엄마’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서양 신화의 ‘가이아’는 엄마이자 대지, 초자연을 뜻한다.

“엄마는 인간이기도 하지만, 자연이란 맥락에서 인간이 아니기도 합니다. 지금 대중문화에서 그려진 엄마는 현실 속의 엄마보다는 전통적 모성과 가깝습니다. ‘어머니’ 같은 연극에 대중이 열광하는 건 이 문명과 삶에서 가족의 재건에 대한 희망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이 모성에서 그 해답을 발견했다고 봐야겠지요.”

현재 대중문화에서 그려지는 ‘많은 엄마들’은 인간 세상 이전의 존재라는 말이다. 엄마에 열광하는 대중문화는 극도로 불안한 우리 시대를 반영하는 셈이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