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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스트라' 시대 열리나
[마에스트라 그들은 누구인가] 한국 첫 여성 지휘자 김경희 교수 이어 성시연·여자경 등 두각




이인선 기자 Kelly@hk.co.kr





(사진 좌) 김경희 (사진 우측 위) 성시연 (사진 우측 아래) 여자경


2008년 12월, 세계 인권선언 60주년 기념 연주회가 열린 바티칸. 교황 베네딕트 12세와 추기경들, 그리고 이탈리아의 나폴리타노 대통령이 자리했다. 100여 명의 오케스트라 단원이 착석한 가운데, 검정색 드레스를 입은 한 여인이 무대 위로 걸어들어왔다. 미모의 금발미녀가 자리한 곳은 바로 포디엄. 지휘봉을 든 그녀의 팔이 움직이자, 오케스트라는 하나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바티칸에서 연주한 최초의 여성 지휘자(마에스트라)로 기록된 그녀는, 스페인 출신의 지휘자 인마 샤라였다.

여성 지휘자를 만나는 일은 더 이상 낯설지 않지만 그렇다고 익숙하지도 않다. 그들에게 ‘최초의’라는 수식이 붙는 일이 적지 않고, 그들의 등장이 이슈를 양산할 정도로 포디엄은 여성들에게 보수적이고 엄격하고 제한적이었다. 역사가 오래되고 자부심이 큰 오케스트라일 경우 그 벽은 더욱 높고 견고하다.

한국에서 여성 지휘자가 탄생한지 올해로 만 20년이 되었다. 1989년, 숙명여대 김경희 교수(50)가 대전시향과의 연주를 통해 최초의 여성 지휘자의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동양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독일 국립음대 지휘과에서 라벤슈타인을 사사한 그녀는 50여 명의 지휘자가 등록되어있는 (사)한국지휘자협회의 유일한 여성이기도 하다.

현재는 숙명여대 SM심포니와 함께 과천시립아카데미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는 그녀는 한국의 여성 지휘자의 역사와 함께 걸어왔다. 하루에 세 팀, 9시간을 지휘하는 날도 있을 정도로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온 그녀의 두 팔에 자리한 단단한 알통은 지난 20년의 세월을 소리없이 말해준다.

세계적으로도 여성 지휘자가 부재하던 시절, 대학에서 작곡을 전공한 43킬로 그램의 자그마한 동양인 여자가 지휘를 하겠다고 독일에 도착했을 때 지도교수의 첫 마디는 “여자는 싫다”였다. 결국 지휘를 비롯한 다른 능력까지 검토한 후에야 라벤슈타인 교수는 “여자라는 점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네가 가진 달란트를 인정한다”면서 ‘예스’와 ‘노’의 중간 대답인 ‘야인’이란 말로 그녀를 받아들였다.

5년 반의 유학생활 끝에 귀국한 그녀를 처음 맞아준 곳은 대전시향이었다. KBS 인간극장은 그녀를 밀착취재하며 한국 최초의 여성 지휘자에 대한 호기심어린 대중의 시선을 반영하기도 했다.

김경희 교수는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의 상황은 “훨씬 좋아졌다”고 한다. 20년 사이 국내외에서 활동하는 한국 출신의 여성 지휘자들도 늘었다. 성시연, 여자경, 채지은, 김봉미, 이선영, 김은선 등이 대표적이다. 그 중에서도 최근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이들은 성시연과 여자경. 미국 굴지의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부지휘자로 활동하던 성시연(33)이 지난 2일, 서울시향 부지휘자로 영입되었다. 두 교향악단에서 성시연은 당분간 부지휘자를 겸임하게 된다.

2008년 1월 서울시향의 정기연주회에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을 지휘하며 한국 무대에 데뷔한 그녀는 이후 몇 차례 서울시향과 호흡을 맞춰왔다. 오랜시간 고심했지만 자신이 소속된 대형 클래식 매니지먼트사 IMG아티스트의 권유에 용기를 얻어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서울시향은 솔직한 교향악단이에요. 발전하는 단계여서 그런지, 지휘자의 역량에 따라 그날 그날의 연주가 크게 달라지죠. 흥미롭기도 하고 그렇기에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 함께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성시연은 여성 지휘자이기 때문에 어떠한 차별을 받아본 적은 없다면서, 오히려 이슈가 되는 점을 이용하라는 조언을 듣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이슈에 앞서 중요한 것은 실력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여느 여성 지휘자들의 말과 같다.

2008년 러시아 상트페테스부르크에서 열린 국제지휘콩쿠르에서 여성으로는 최초로 3위로 입상하며 화제가 되었던 지휘자 여자경(37)은 올해 또 한번 이슈가 되었다. 20주년을 맞은 예술의 전당의 교향악축제에서 여성 지휘자로는 처음으로 지휘대에 서게 되었던 것. 초청된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 혹은 상임지휘자가 추천한 객원지휘자가 아닌 다음에는 오를 수 없는 무대이다. 여성 지휘자들이 중앙 무대에서 적잖이 소외되어 왔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녀는 상임지휘자가 공석인 KBS교향악단과 함께 호흡을 맞췄다. 귀국 후 어린이 음악회를 통해 만난 KBS교향악단 단원들의 요청에 의해 교향악 축제 무대에 서게 되었다. 지난해 귀국하기 전까지 비엔나의 메이저 오페라 하우스인 폭스 오퍼(Volksoper) 오케스트라에서 음악코치 겸 지휘자로 활동했던 그녀는 이후 KBS , 프라임필, 서울시향, 대구시향, 코리안심포니 등과 연주해왔다. 올 여름에는 예술의 전당에서 매년 인기리에 공연되는 오페라 ‘마술피리’의 지휘를 맡으며 차근차근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여성이 아닌, 지휘자로서 포디엄에 선다는 그들은 수십년간 음악을 해온 전문연주자들을 이끌어야 하는 만큼 ‘지휘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고 말한다. 단원들을 설득할 수 있는 것은 첫째가 실력이고 그 다음이 포용력이다. “다니엘 바렌보임 같은 모습이었으면 좋겠어요. 모든 악보를 외우고 있어서 리허설할 때 악보가 없어요. 연주를 듣고는 ‘세컨드 트럼본 세 번째 마디에서..’이렇게 얘기하는 철저한 사람이지요. 단원들이 믿고 따라올 수밖에 없는 지휘자예요.”(여자경)

언젠가 자신이 여자이기 때문에 가꿔온 꿈까지 포기할 수 없었다고 말했던 성시연은 권위적이기보다는 휴머니티를 겸비한 지휘자를 꿈꾼다. “음악을 통해 자유로워지는 방법을 일러주셨던 스승, 롤프 로이터를 닮고 싶습니다.”(성시연)

베를린 필하모닉의 수장 사이먼 래틀은 지휘자 세계의 한정된 기회에 대해 날카로운 지적을 한 적이 있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오류를 저질러야 한다. 당신이 나만큼 많은 잘못을 범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중략) 젊은 지휘자들에게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젊은 영국 지휘자들을 속으로 얕잡아 보고 있는 영국 오케스트라들은 신참들에게 작업할 기회를 주지 않아 스스로의 미래를 망치고 있다. 악단은 또 어디서 배울 것인가.

지휘자들은 서로 의사소통을 나눠야 할 대상이다. 단원들의 반대와 빈정거림 때문에 젊은 지휘자들은 소통할 기회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 젊은 지휘자 속에서 소수자인 여성 지휘자들도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검증된’ 콩쿠르나 해외에서의 경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여성 지휘자에게는 무대에 설 기회조차 없는 경우도 많다. 클래식의 기득권층이라고 할 수 있는 남성 음악감독들과 지휘자의 도움과 배려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거친 편견과 높은 장벽을 온몸으로 겪어낸 김경희 교수는 말한다. “지휘는 개성적인 작업이에요. 지휘자마다 독특한 해석력과 칼라가 있는 것이지, 남자와 여자가 존재하는 게 아니거든요.” 머지않아 그들은 여성 지휘자가 아닌, 지휘자 000로 불리기를 바라고 있다.

지휘계 여성파워 떨치는 4인방


현재 세계무대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여성 지휘자는 네 명 정도 꼽을 수 있다. 조앤 팔레타, 마린 앨솝, 시몬 영, 시안 장으로, 명문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활동하며 그야말로 지휘계에서 여성 파워를 떨치는 이들이다.

미국의 조앤 팔레타(55)는 버펄로 필하모닉과 버지니아 심포니의 음악감독을 맡고 있다. 그녀는 버펄로 필하모닉과의 열정적인 레코딩 작업을 해오고 있는데, 두 차례의 그래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미국 출신의 여성 지휘자 매린 앨솝(49)은 미국 메이저 교향악단의 최초의 여성 음악감독으로 잘 알려져 있다. 2005년 볼티모어 심포니의 상임지휘자로 내정된 그녀는 불세출의 실력을 기반으로 볼티모어 심포니와의 계약기간을 2015년까지 늘렸다.

호주 출신의 지휘자로, 특히 오페라에서 명성이 높은 시몬 영(48). 1993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슈타츠오퍼와 2005년 상임지휘자가 없는 세계 최정상의 빈 필하모닉과 연주한 첫 여성 지휘자로 기록되어 있다. 2005년부터 함부르크 슈타츠오퍼와 함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로 이름을 올린 2015년까지 함부르크 슈타츠오퍼의 음악감독으로 남게 됐다.

뉴욕 필하모닉의 부지휘자였던 중국계 미국인 지휘자인 시안 장(36)은 2009-2010시즌 밀라노 베르디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으로 영입되며 거센 파워를 입증하고 있다. 2002년 마젤 빌라 국제 지휘 콩쿠르에서 1위로 입상하며 뉴욕필의 로린 마젤에게 발탁되는 영예를 누렸다. 2008년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교향악단인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를 지휘한 첫 여성이 되었고 밀라노 베르디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 취임을 통해 이탈리아 교향악단 최초의 여성 음악감독으로 역사에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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