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하는 스토리텔링] 스토리텔링 기법의 전시·공연 등 대중을 끌어들이는 매력 발휘

“30번의 미소를 보냄. 23번 받음.
샌드위치 4개가 수락. 1개는 거절.
담배 2갑이 수락.
42분간의 대화”


이 기기묘묘한 리포트는 프랑스의 미술가이자 사진작가인 소피 칼과 깍쟁이 뉴요커들이 나눈 교감의 흔적이다. 이 프로젝트는 그 과정을 고스란히‘고담 핸드북’이라는 책으로 남겼다.

작업의 과정을 중시하는 소피 칼에게선 그간 여러 차례의 흥미로운 프로젝트를 찾아볼 수 있는데, 그 안에서는 언제나 이야기가 흐른다. 그 안에는 이미 그녀가 직접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의 흐름은 예측이 불가능하다.

1980년대 그녀는 베니스의 한 파티에서 만난 남자를 2주간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었고, 한 번은 어머니를 통해 고용한 사립탐정에게서 자신의 일상적인 생활을 사진으로 받아보기도 했다. 그리고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폴 오스터의 소설 리바이어던(‘거대한 괴물’로 번역출판되었음)의 등장인물이기도 했던 그녀는 폴 오스터에게 이 같은 요청을 한다.

자신을 위해 캐릭터를 지어내면 자신이 최대 1년간 캐릭터처럼 살아보겠다고. 그 프로젝트의 캐릭터 중 하나가 ‘하나의 공공적 장소를 내 것처럼 가꾸고 뉴요커에게 미소 보낸다. 샌드위치와 담배를 나눠준다. 최대한 오래 대화한다’를 실천하는 것이었고, 그 성과 중 일부가 기묘한 리포트로 보여지는 그것이다.

소피 칼과 폴 오스터가 만들어가는 이야기는 단지 한 사람의 체험이 아니라 상호 커뮤니케이션으로 발전한다. 이야기를 시작한 이들과, 그 이야기에 참여한 이들이 함께 하나의 스토리를 완성하는 것이다. 이는 문학에서 나타나는 서사적인 구조와는 다른 차원이다.

소설가 김탁환(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은 최근의 저서‘천년습작’에서 ‘문학성’과 ‘이야기성’을 이같이 구분한다. “문학과 달리 이야기는 문학을 변주한 응용이 아니라, 각 이야기 갈래마다 다양한 본질이 있고 그 본질을 문학의 틀에서 벗어나 배우고 익혀나가야 한다”라고.

소피 칼이 직접 참여하면서 이야기를 만들어간다면 섬뜩한 범죄 사진에 매료된 멜라니 풀렌은 재현을 통해 이야기를 묶어낸다. 풀렌은 살해당해 선혈이 가득 고인 여성의 마지막 순간을 재구성한다. 그녀의 사진 속에서 시체 역할을 맡은 모델은 명품 의상과 구두를 입은 채인데, 풀렌은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죽음을 흥미거리로 받아들이는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LA 경찰의 범죄 기록 사진을 작품 소재로 쓰는 그녀는 과거의 사건을 통해 현재의 선정적인 흥미거리로 전락한 죽음을 짚어낸다.

차와 말을 교역했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차마고도’.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교역로인 이곳의 삶과 문화를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담아내고 있다. 전시는 그들의 생활 도구를 단지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한 스토리텔링 기법을 사용한다.

교역상인 마방의 인생 여정을 따라 ‘희망의 길, 차마고도를 향해 떠나다’, ‘차의 고향, 운남과 사천에 도착하다’, ‘행복한 발걸음, 집으로 돌아오다’, ‘소금교역, 히말라야를 넘어 네팔로 가다’, ‘오체투지, 샹글리라를 찾아가다’, ‘죽음 그리고 환생, 자연에 순응하다’로 엮어낸다.

다큐멘터리 ‘차마고도’를 구성한 윤영수 방송작가는 이를 위해 전시에 직접 참여해 맥락에 맞는 스토리를 적어냈다. 이 같은 이야기에 생활상을 재현한 전시는 차마고도의 문화를 입체적으로 구성하며 관람객의 발길을 끌고 있다.

지난 달에 막을 내린 구스타브 클림트의 한국전시는 클래식과 미술의 만남으로 화제가 됐었다.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벽화 ‘베토벤 프리즈’. 화음쳄버오케스트라는 벽화가 걸린 전시장에서 베토벤의 현악 4중주 12번을 연주했다. 합창교향곡과 같은 시기에 작곡된 곡이라는 점에 착안한 것. 미술과 음악의 교감, 클림트와 베토벤의 만남은 시공을 뛰어넘어 변주되었다.

1-소피칼의 '고담 핸드북'
2-멜라니 풀렌
3-프라다 트랜스포머 프로젝트

그림에 담긴 깊숙한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미술평론가 이주헌 씨는 아트 스토리텔러라 불린다. 책과 강연을 통해 대중들과 만나오고 있는 그의 가장 큰 강점은 그림이 태어난 배경과 작가, 미술사조 등을 이야기 안에 녹여낸다는 점이다.

“요리에 비유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야기가 없다면 미술사조나 작가에 대한 정보는 그야말로 날 재료를 먹는 것과 같아요. 날 것으로 소화 가능한 사람이 있기도 하겠지만 이야기가 더해지면 어려운 것 같던 그림은 누구나 소화가능한 요리가 되거든요.” 대중과의 소통의 벽을 허물어뜨리는 것은 문화예술계에서 보여지는 스토리텔링의 존재 의미이기도 하다.

국내에서 <퀴담>과 <알레그리아> 두 편의 작품을 공연한 태양의 서커스는 과거 서커스단이 갖는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걷어냈다. 오금 저리는 아슬아슬한 묘기가 아니라 몸짓과 음악, 의상, 기예가 어우러지는 판타지에 관객들은 매료된다. 각각의 코너로 단절된 모듬쇼와 같았던 서커스가 스토리로 연결되면서 가능했던 성과다.

지난 4월 말, 경희궁 앞에 설치되면서 지나치게 상업적인 공간이라는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 했던 프라다의 트랜스포머 프로젝트. 그러나 이 시대에 걸 맞은 이야기를 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네덜란드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 렘 쿨하스가 설계한 건축물은 크레인으로 회전하면서 방문객들에게 전혀 새로운 경험을 제공한다. 이 프로젝트는 그 자체로서 말할 거리를 제공한다.

“동양과 서양, 역사적 공간인 궁과 미래의 공간, 비상업적인 공간과 상업적인 공간, 그리고 이탈리아와 한국이 어우러짐으로써 요즘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컨버전스가 들어간 스토리텔링이 되었다”는 것이 스토리텔링 전문가의 분석이다.

5개월간 지속되는 프로젝트에는 처음으로 ‘웨이스트 다운-미우치아 프라다의 스커트’가 전시되었다. 6월 말부터는 영화관으로 탈바꿈되면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자인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이 선정한 영화가 상영된다.

컨설팅 회사의 대표이자 스토리텔링의 전문가인 아네트 시몬스는 클라이언트인 기업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야기는 힘을 훔치는 게 아니라, 힘을 창조해내는 도구이다. 일단 이야기의 위력을 알고 나면, 이후에 어떤 일을 하든지 더 이상 공식적인 지위를 빌릴 필요가 없어진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 상대가 내게 다가올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사실의 나열이 아니다.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한 이야기, 그것은 예술이 가진 권위나 도도함을 앞선다.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