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문화사 읽기] '김광석 평전' '신성일 인터뷰집' 등 출간 개인사 정리당시 사회상 조명

최근 한 시대를 풍미한 문화예술인의 삶을 조명하는 시도가 활발하다. 음악인인 故 김광석의 평전 <김광석 평전-부치지 않은 편지>와 영화배우 신성일의 인터뷰집 <배우 신성일, 시대를 위로하다>가 잇따라 출간되었다.

영향력 있는 문화예술은 한 시대의 징후이거나 특징적인 반응이므로, 유명 문화예술인은 그 자체가 하나의 ‘현상’이다. 그들의 개인사에는 시대 사회적 맥락이 밀접하게 관계된다. 두 책에서 흥미로운 부분 역시 그 접점이다. 개인의 삶을 정리함으로써 한 인간은 물론 한국의 문화사까지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김광석, 1980~90년대 청춘의 대변자

“김광석에게 ‘나의 노래는 나의 힘, 나의 삶’이었듯이 남아 있는 우리에게도 그의 노래는 ‘나의 힘, 나의 삶’이다.”

<김광석 평전-부치지 않은 편지>의 출발점은 저자 이윤옥의 “김광석 열혈 팬”이라는 정체성이었다. 그 열정으로 김광석의 음악인생을 따라간다.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드러낼 수 있을 것 같은 익숙함”을 지닌 동시에 치열하게 고뇌하며 살았던, 하지만 의혹이 남은 죽음을 맞은 한 인간에 대한 이해가 중심 축이다.

그래서 이 책은 그의 음악에서 위안과 힘을 얻으며 “1980년대와 1990년대의 격변기”를 살았던 세대가 스스로에게 바치는 송가이자 진혼곡이다. 김광석의 방황과 성공, 갈등과 모색은 때때로 “이 땅에 태어나 진실한 삶을 살려 노력했던 한 청년의 자연스런 걸음”으로 수렴된다.

그러나 한 시대와 세대를 두루 매혹하는 문화적 상징에는 당대의 공통 감각이 정확하게 담겨 있을 수밖에 없는 법이다. 김광석의 개인사에는 그의 걸음을 훼방하거나 붙들고, 부추기거나 달리 어찌할 수 없게 만든 사회적 정황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것들을 꼼꼼히 짚고, 김광석의 음악 세계와 이어나감으로써 이 책은 한국문화사에 대한 한 기술(記述)이 된다.

저자는 “김광석 음악인생의 이력은 그가 활동하던 시기의 시대상과 무관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이후 “유신시대와 별다를 것 없는 공안정국”이 조성되었고, 문화예술에 대한 검열도 극심했다. 이 시기에 밑으로부터 퍼져나간 음악이 포크음악이었다.

1970년대부터 대학가 노래패들을 중심으로 불려진 비판적 포크음악은 80년대 들어 ‘사회 참여적 저항가요’의 역할을 담당한다. 이는 대규모의 대중 집회가 활성화된 사회 분위기에 의한 것이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 <광야에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등이 이때 대중화된 저항가요의 예다. 김광석의 토대는 이런 흐름을 이끈 노래패들이었다. ‘메아리’, ‘노래를 찾는 사람들’, ‘새벽’ 등에서 활동한 이력은 김광석의 음악에 “진정성과 진지함”을 불어 넣었다.

하지만 김광석이 끝끝내 사랑 받았던 것은 감성을 건드리는 서정성 때문이기도 했다. 책은 1980년대 후반부터 김광석이 몸담은 ‘동물원’에서 그 징조와 의미를 찾아낸다. “1987년 민주화항쟁과 대선이 군사정권의 연장이라는 결말로 이어지면서 사회 전반은 무력감과 패배감이 지배한다. 젊은이들은(중략) 사회체제의 변화를 소망했지만 결국 변해야 하는 것은 자신들이었다. 순수했던 열정은 꺼지고 제도권으로 흡수되어가는 자신과 주변을 보면서 상실감을 느껴야 했던 세대. ‘동물원’은 그런 이들의 대변자이며 젊은 날의 일기장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서태지가 등장하면서 한국 대중음악에 지각변동을 일으킨 1990년대 초반에도 김광석은 건재했다. 그것은 1995년 1000회라는 전무후무한 횟수에 도달할 만큼 그가 고집했던 소극장 공연 때문이었다. 책은 한 관객의 증언을 옮긴다. “1990년대 들어 대중가요는 일방적으로 들려주기 위한 노래로 바뀌어 가더군요. 노래가 안 되면 춤으로 어필하고.(중략) 즐기면서도 공감할 수 없는 노래들이지요.(중략) 하지만 김광석의 공연은 관객과 정서적으로 공유하는 것이 많았어요.”

시대사회의 첨예한 정황을 음악의 뿌리로 삼을 만큼 정직한 동시에 개개인의 나약함과 상실감마저 어루만질 수 있는 감수성이 있었고, 무엇보다 관객과 통하려는 노력을 보였던 한 음악인의 생을 정리함으로써 ‘김광석 평전’은 문화예술의 한 이상향까지 넌지시 제시한다.

“지난해 촛불 집회 때 안치환은 광화문 한가운데서 수만의 군중을 앞에 두고 <광야에서>를 노래했다. 군중들은 안치환의 등장에 한껏 고무되었고 광화문은 <광야에서>를 따라 부르는 군중들의 목소리로 뒤덮였다. 뒤이어 양희은의 <아침이슬>이 이어졌다. 촛불집회에 참여한 40대의 남성이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아들에게 말햇다. “저기 김광석이도 있었으면 좋겠다.””

신성일, 대중의 욕망이 만들어낸 최초의 ‘무비스타’

한편 <배우 신성일, 시대를 위로하다>에서 전문 인터뷰어 지승호는 한국영화사에서 차지하는 위치 때문에 신성일을 주목한다. 1960~70년대 매년 20~50편의 영화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 그의 “무비스타”로서의 입지는 독보적인 것이었다. 서울 인구가 200~300만 명이고 전국 개봉관이 13군데에 불과했던 1970년대 중반 그는 <별들의 고향>(1974)으로 관객 36만 명을, <겨울여자>(1977)로는 49만 명을 동원하는 기록을 세웠다.

저자는 당시 대중들이 신성일에 자신의 욕망을 투영했음을 지적한다. “공지영 소설 ‘봉순이 언니’에는 “그런 아버지의 마르고 단정한 실루엣이 카바이드 불빛에 비추어지자 나는 아버지가 신성일보다 잘생겼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고, 그런 아버지에게 내가 너무 야멸차게 대한 것이 좀 후회도 되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럴 정도로 당시 신성일은 잘생긴 남자의 대명사였다. 그리고 즐길 거리라고는 영화말고는 별것이 없던 그 시절 신성일은 최고의 청춘스타였으며, 만인의 연인이었다."

대중의 욕망을 담보하는 스타의 ‘당연한’ 역할은 신성일을 통해 비로소 한국 대중문화에 도입되었다. 신성일과 그의 평생 파트너 엄앵란은 스타 시스템의 촉매이자 첫 산물이었던 것이다.

1962년 <아낌없이 주련다>로 “연기에 눈떴다”라는 평을 받은 후 신성일은 새로운 배우를 필요로 했던 당시 영화계의 주요 인물로 등극하게 된다. 그가 출연한 1964년작 <맨발의 청춘>이 스타 시스템의 출발점이라는 저자의 지적에 신성일이 대답한다.

“그렇죠. 스타 시스템이 시작됐죠. 그런 기미는 <청춘교실>에서 이미 보였다고 할 수 있어요. <청춘교실>에 엄앵란, 신성일, 최지희, 남미리, 방성자 등 젊은 배우들이 많이 등장햇어요. 그러고 난 다음 결정적으로 <맨발의 청춘>의 두 주인공이 완전히 작품을 끌고 갔어요. 그러니까 스타 시스템의 정착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죠. 그 후로 두 사람이 출연한 작품이 엄청나게 제작되었고, 히트도 합니다.”

이런 식으로 곳곳에서 신성일 개인 사정에 대한 서술은 곧 한국영화사의 생생한 증언이 된다. 유신개헌 이후 박정희 정권 하에서 액션영화가 주름잡았던 70년대 초 한국영화의 경향에 대해 신성일은 “시달리고 짓눌린” 결과라고 말했다.

“정치적으로 경직되어 있던 시대잖아요. 지도자의 위치, 지도자의 생각, 지도부에 있는 사람들의 움직임 등이 만드는 분위기가 일반 가정에도 알게 모르게 다 침투해 들어갔어요. 그런 데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집단이 문화인, 예술인인 것 같습니다. 뭔가 답답한데 탈출구는 찾지 못하고, 영화 제작은 해야겠고... 그래서 건달 얘기, 김두한 영화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팔도졸업생>, <1대1>, <할복> 이런 것이 다 액션물이거든. 검열에는 문제가 없었으니까. 등장인물 저희들끼리 싸우는 거지, 이념적으로 싸우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 작품들로 그럭저럭 끌고 가는 영화계였으니, 참으로 답답한 상황이었죠.”

그래서 이 책은 단지 한 원로 영화배우의 사담에 그치지 않는다. “지난 세기의 연대기와 풍속사를 담고 있으며, 1957년에서 21세기에 이르는 한국영화사의 만화경을 담고 있다.” 나아가 대중문화가 사회에서 어떻게 기능했고, 외압에 의해 일그러지며 이어져 왔는지에 대한 역사적 교훈까지 던져준다.

"평전은 끝이 아니다… 다양한 재조명 필요"
'김광석 평전-부치지 않은 편지' 저자 이윤옥 인터뷰

제법 오래 전부터 이 책을 기획하고 계셨던 것 같다.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

학창시절부터 김광석씨의 조용한 팬이었다.. 이미 8~9년 전에 쓰려고 마음먹었던 책이지만 김광석씨 유족간의 문제도 있었고, 대중음악가의 '평전'에 대해 출판사측의 관심도 부족했다. 외국에선 한 시대를 풍미하던 대중예술가들에 대한 평전이 많다.

하지만 한국은 자신들의 대중예술가들은 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 책은 한국 대중예술가들에 대한 평전 작업의 선두에 있다고 생각한다.

김광석의 팬이 된 계기가 있나.

고등학교 때부터 좀 일찍 사회문제에 눈을 떴다. '노찾사' 1집 때부터 팬이었는데 고등학생신분으로 대학축제에 기웃거리면서 그를 처음 보았다. '동물원'도 좋아했고 그러다 보니 김광석이 솔로로 데뷔한 후에 자연스럽게 그를 따라가게 되었다.

책을 쓰시면서 김광석에 대해 새롭게 이해하게 된 부분이 있나.

'참 자신을 닦달하면서 살았겠구나'라는 점이랄까. 살아가는 순간순간이 치열했던 사람이 아닌가 싶다. 워낙 잘난 창작자들 사이에서('새벽'은 당시 최고의 엘리트집단이었고 '동물원'의 멤버들도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가창력 하나로 버틴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그 속에서 인간적인 고뇌도 있었을 것이고 자신이 그저 그런 가수로 끝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도 많았더라. 나는 그가 '타고난 가수'라고 생각했는데 지인들은 의외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 그보다는 부단히 자신을 갈고 닦은 가수라는 것이다. 타인에게는 어렸을지 몰라도 자신에게는 무척 원칙적인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책을 완성하신 소감은 어떤가.

책의 에필로그 부분에도 밝혔지만 이 책은 그저 '김광석평전'의 처음일 뿐 끝은 아니다. 외국의 경우 한 인물을 놓고 여러 작가들이 책을 내기도 한다. 김광석에 대해서도 그랬으면 좋겠다. 나는 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작가는 아니기 때문에 김광석의 음악을 위주로 한 재조명에는 많이 미흡했다. 이런 부분이 앞으로 조명되었으면 한다.

한국 사회와 문화에서 '김광석'이 갖는 의미를 요약 정리한다면.

언젠가 박경리 선생님이 "우리 역사와 우리 민족의 기본 정서는 비극적 세계관"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접한 적이 있다. 슬픔은 극소수의 특권층을 제외한 우리 사회 모든 이들의 기본적인 정서라고 생각한다. 김광석의 음악에는 아주 짙은 슬픔이 배어 있고, 이 슬픔에는 일종의 자기 정화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있다.

또 김광석의 음악에는 '소통'이 있었다. 그는 무대에서 말이 많았고 늘 노래를 통해 관객과 공감대를 형성했던 가수다. 그런데 요즘은 사회 전반적으로 일방통행이 대세지 않나. 무엇을 느낄 사이도 없이 내 앞을 홱홱 지나가는 느낌이라고 할까. 우리 모두가 바라는 사회라면, 또 우리 모두가 향유할 수 있는 문화라면 결코 일방적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문화사의 구심점으로 주목받은 문화예술인들

사회문화적 의미에서 가장 주목받은 '스타'는 아무래도 서태지다. 국내 대중음악계를 뒤흔들었던 그의 등장과 그를 둘러싼 담론들은 학계의 진지한 탐구 대상이었다. 이동연의 <서태지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1999)와 김현섭의 <서태지 담론>(1999) 등이 그 산물이다.

연구자들은 서태지를 통해 문민정부가 들어선 후 대중의 문화적 욕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문화산업이 발전하고 독특한 하위문화를 형성한 신세대가 출현한 90년대 초반의 사회상을 읽어낸다.

서태지 이전 한국 최초 '슈퍼 스타' 조용필에 대한 조명도 있다. 홍호표의 <조용필의 노래, 맹자의 마음>(2008)은 '조용필 현상'을 유학적 관점에서 분석한 책이다. 한국인의 정서에 유학적 바탕이 있다는 전제 하에 대중의 '민심'을 얻은 조용필의 노래에서 맹자 사상을 발견해낸다.

영화인들을 중심으로 영화사를 정리한 결과물들 중에는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임권택 감독을 인터뷰해 쓴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2003), 제자 유지형이 스승인 김기영 감독을 인터뷰한 <24년간의 대화>(2006) 등이 특기할만 하다. 정성일은 영화학에서는 평가절하되었던 대중적 감독 임권택의 영화 세계를 감독 자신의 맥락에서, 또 시대사회적 맥락에서 치밀하게 직조한다.

예를 들면 <장군의 아들>에서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향수를 담고, 그 기호들의 질서를 회복하려는" 동시에 "90년대 신세대를 염려하는" 감독의 의도를 읽어낸다. 그리고 임권택 감독의 '인본주의'를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과 한국전쟁, 박정희 정권을 낱낱히 겪은 그의 개인사에서 발생한 것으로 지도 그린다.

김기영 감독은 인터뷰 중 "이승만 대통령이 성병으로 얼굴이 문드러진 밤의 여인들을 대낮에 강제로 끌어내어 자신의 지지 시위를 시킨 독재정권의 시대"에 저항하기 위해 만든 영화 <초설>에 대해 고백한다.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삼각지의 빈민가를 뒤지던 중에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지. 첫눈이 내리던 어느날 밤, 통행금지 사이렌이 울리고 나서 새벽 두서너 시쯤 된 시각에 칠흘 같은 밤거리를 진동하며 뛰어가는 일군의 아낙네들을 발견하게 되지. 한 손엔, 호미와 세면대야를 든 여인네들이 머리에 검은 두건을 쓰고 두꺼운 군복으로 무장한 채 용산역 철조망 사이로 숨어들어 철도 감시원과 짜고 석탄을 도둑질하는 것이었어. 그 석탄은 팔려나가 서울시민을 따뜻하게 해주는 연료 역할을 했고 이들은 석탄을 판 돈으로 연명을 하는 그런 광경을 본 순간 바로 이런 걸 영화로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했지."

그런 그가 처음으로 만든 작품이 한국전쟁 당시 USIS(미공보원)의 '리버티 뉴스'였다는 사실은 역사적 아이러니처럼 보인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