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한국문화의 새로운 힘] 우니 르콩트 감독의 '여행자'입양아 감독과 국내 제작사 합작해 세계 진출하는 새 모델 보여줘

(위) 주인공 진희역을 맡은 배우 김새롬 (아래 좌) 우니 르콩트 감독 (우) 영화 촬영 장면

영화 <여행자>는 70년대 한국의 한 보육원을 배경으로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9살 소녀가 프랑스로 입양되기까지의 이야기다. 감독인 우니 르콩트 자신도 비슷한 처지였다. 어린 시절 프랑스로 입양되어 30년 넘게 살았다. 한국어는 잊었어도 언젠가 입양과 관련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가 프랑스어로 쓴 시나리오는 번역되어 스크린에 한국어로 살아났다. 올해 칸 국제영화제에서 이 ‘한국 영화’는 신인감독상 격인 황금카메라상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었다.

영화 <여행자>는 그 내용에서나 제작 과정에서 모두 한국영화의 외연을 넓힌 사례로 주목할만 하다. 한 디아스포라 감독의 경험은 삶에 대한 성찰의 시선으로 이어졌고, 그를 둘러싼 해외 합작은 한국영화가 세계영화계로 진출하는 한 통로이기도 하다.

디아스포라의 시선, 보편적 성찰로 이어지다

지레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의 또 다른 버전으로 오인되기 쉽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이야기는 주인공 소녀 진희가 입양되어 보육원을 떠나는 순간 멈춘다. 매스미디어와는 초점이 다르다. 해외입양아의 전형적인 멜로드라마 사연에는 관심이 없다.

대신 가장 다루어지지 않았던 시기에 확대경을 들이댄다. 한 사람이 처음으로 가족관계, 집으로부터 물리적으로 분리된 채 제 존재를 끔찍할 정도로 실감하는 시기. 살아 있고, 지나 보내는 자체가 대단한 사건이어서 역설적으로, 누구도 감히 상세히 다루어낼 수 없었던 그 시기를 <여행자>는 담아낸다.

중심에는 사람이 자신을 뒷받침해주던 관계와 터를 잃는다는 것이 무엇이고, 또 그 충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생존하게 되는지에 대한 성찰이 있다.

이를테면 이런 장면들이다. 아빠가 자신을 보육원에 맡기고 떠난 후 진희는 밥도 먹지 않고 시무룩해 있다가는 탈출할 것처럼 담장 위에 올라간다. 수녀님들은 다치기 전에 내려오라며 호들갑을 떨지만, 무뚝뚝한 ‘엄마아줌마’는 대문을 활짝 열곤 “나가라”며 들어가버린다. 보육원을 나갔던 진희는 얼마 못가 제 발로 돌아온다. 아무도 없는 부엌 구석에서 스스로 밥솥에 남은 누룽지를 긁어 먹는다.

그러다 어느날은 다짜고짜 원장을 찾아간다. 아빠가 데리러 온다고 약속했다면서 집에 한번 찾아가봐 달라고 말한다. “전주시 다가동 33-5”라고 또박또박 주소를 읊는다. 하지만 그 주소지에 다녀온 원장이 진희네 가족이 벌써 이사를 갔으며, 아빠가 다시는 안 오실 것이라고 일러주자 진희는 난폭하게 군다.

마침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인형을 갈기갈기 찢는다. 보다 못한 ‘엄마아줌마’가 진희를 데리고 나가 손에 몽둥이를 들려준다. 차라리 빨랫줄에 널린 이불을 때리라며. 그 여린 몸에서 화와 고통이 얼마나 솟아났으면, 진희의 몽둥이질이 매섭디 매섭다.

겨우 정을 붙인 언니 숙희가 혼자 먼저 미국인 양부모에게 입양되자 진희는 보육원 뒷산에서 땅을 판다. 몇날 며칠 오목한 구덩이를 만들더니 제 몸을 누인다. 채 꼴도 갖춰지지 않은 가슴과 배, 팔뚝과 종아리에 흙을 덮는다. 마침내 얼굴까지 묻곤 잠시 꼼짝도 않더니 푸푸, 가쁘게 숨을 뱉는다.

감독 자신은 “자전적 이야기라기보다 기억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낸 픽션”이라고 말하지만, 이런 성찰이 상실의 체험에 바탕하지 않았을리 없다. 또 그만큼 치열했기에 입양아의 상황뿐 아닌, 모든 삶에 적용되는 보편성을 띠고 있다. 디아스포라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일종의 교훈인 것이다.

디아스포라 감독, 한국으로 돌아와 세계로 가다

우니 르콩트 감독은 그가 10살이던 1976년 프랑스로 입양되었다. 이름부터가 그 흔적이다. ‘우니’는 감독의 한국 이름인 '은희'를 딴 것. 뿌리를 잊지 말라는 양부모의 배려였다.

쓰지 않는 한국어는 잊었지만, 입양의 경험은 남았다. 그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어, 패션과 관련한 일을 하는 틈틈이 1년짜리 프랑스국립영화학교 시나리오 과정을 밟았다. 그 결과물이 <여행자> 시나리오였다. 이를 본 프랑스 제작사 글로리아 필름 관계자가 합작할 한국 제작사를 찾았다. 마침 영화 <밀양> 홍보차 프랑스를 방문했던 이창동 감독과 한국의 나우필름이 영화 제작에 합류했다.

이후 우니 르콩트 감독과 이창동 감독은 여러 번 시나리오를 주고 받으며 설정과 표현 등 세부사항을 한국적으로 조율했다. 예를 들면, 영화 속에서 진희가 부르는 ‘당신은 모르실 거야’는 이창동 감독이 삽입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보육원 아이들의 헤어스타일과 의상은 감독이 자신의 옛 사진과 70년대 한국의 자료들을 참고해 결정했다.

영화는 한국에서 촬영되었다. 경기도 청평의 한 한의원을 배경이 되는 보육원으로 개조했다. 스태프 역시 모두 한국인이다. 단, 한국어를 하지 못하는 감독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영어를 할 수 있는 인력을 충원했다.

감독이 가장 공을 들인 것은 배우 캐스팅. 까다로운 오디션을 통과한 주연배우 김새론은 감독의 어린 시절과 많이 닮았다. 주조연 배우를 제외한 나머지 출연진은 촬영이 이루어진 청평 아이들이다.

한 디아스포라 감독의 시나리오는 이렇게 제도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한국 영화’로 탄생했고, 칸 국제영화제를 통해 세계에서 호평 받았다. 올 여름에는 뉴욕, 토론토 영화제에서도 선보일 예정이다. 동시에 ‘프랑스 영화’로도 분류되기 때문에 프랑스 내에서의 배급은 이미 결정된 상태다. 오는 10월 국내에서 먼저 개봉한 후, 11월에는 프랑스에서 개봉한다. 해외 합작영화의 한 모델로서의 의의도 찾을 수 있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