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을거리가 당신을 말한다] 극단의 먹을거리 신체의 양극화와 직결건강의 불평등으로 이어져

‘내가 먹는 것이 바로 나를 말해준다‘(I am what I eat)라는 말은 19세기의 철학자 포이에르바흐의 입에서 나와서 유명해졌지만 실은 히포크라테스 시대부터 알려진 말이다. 대개는 먹을거리의 물질적 측면만을 생각하겠지만, 실은 한 개인이나 사회의 정체성까지도 규정한다는 점에서 훨씬 더 포괄적인 개념이다.

쌀이 없는 한국 사회, 밀이 없는 서구 사회는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만큼 먹거리는 물질적 측면에 더하여 문화적이고 정신적인 측면에서 자연과 사회, 신체를 이어주는 신진대사의 핵심을 담당하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학계에서도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동안 한국사회의 주요 소비코드였던 ‘웰빙’은 이제 조금은 촌스럽고 이기적인 코드로 여겨지면서, 그보다는 지구환경을 고려하면서 라이프스타일의 근본적 변화를 강조하는 ‘로하스’라는 코드로 빠르게 대체되고 있다. 윤리적 소비가 강조되면서 공정무역 상품이 새로운 소비코드로 부상하고, 규준화된 패스트푸드 문화에 저항하는 슬로푸드 라이프스타일이 뜨고 있다.

# 먹을거리의 양극화, 신체 대물림

사람마다 취향도 제각각이고 소비 스타일도 제각각이지만,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만큼은 똑같다. 신체의 재생산이야말로 먹거리의 본원적인 기능이다. 산업혁명 이래로 급증한 도시의 노동 계급들을 먹여 살리는 데 신대륙에서 건너온 감자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감자’를 대신하는 것은 바로 값싼 미국산 밀가루로 만든 인스턴트 가공식품 ‘라면’이다.

돈과 시간의 여력이 없는 사람들이 가장 값싸고 쉽게 한 끼를 때울 수 있는 대용식이다. 최근 들어 천원짜리 김밥 또한 주역의 자리에 올라왔다. 그런데 환율상승으로 천오백원으로 오르면서 최근 노인과 결식아동들의 한 끼는 심하게 위협받고 있다고 한다.

천원으로 뱃속에 밥알을 넣을 수 있는 방법은 식당의 공기밥 아니면 김밥밖에 없는데, 반찬 없이 먹을 수 있는 밥은 ‘천원 김밥’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오늘날의 의식 있는 소비자들이 궁금해하는 먹거리의의 ‘출처’, 즉 김밥 재료가 어디서 왔고 어떤 쌀을 쓰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특히 몸뚱어리 하나로 험한 세상을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건강한 신체는 개인이 확장시킬 수 있는 유일한 자본이다. 건강하고 예쁠수록 연봉은 상승하고 이런 사회에서 신체자본을 극대화하기 위해 다이어트와 성형수술을 한다. 한 끼를 먹더라도 열량은 낮고 영양과 안전성은 높은 ‘웰빙 식품’을 찾는다. 신선한 유기농 채소와 과일, 안전성이 입증된 생수나 비타민워터, 갓 볶은 커피를 즐긴다.

게다가 윤리적 소비, 생산자와의 관계적 측면이 강조된 로하스 인증상품과 공정무역 상품을 기꺼이 소비하면서 건강과 미, 그리고 정신적 만족까지 채울 수 있게 되었다. 또 자녀에게도 이렇게 먹이고 ‘관리’해 주면서 건강하고 매끈한 ‘S라인’ 신체를 물려준다. 미국서도 요즘엔 유기농 정도로는 명함도 못 내밀고, 최소한 공정무역 커피숍은 가야 고상한 뉴요커 소리를 듣는다.

저소득층은 돈도, 요리할 시간도 부족한 탓에 고열량의 값싼 가공식품과 패스트푸드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다. 후식으로는 신선한 과일이 아니라 묶음들이로 파는 색소 가득한 고과당 음료수를 마신다. 부모의 이런 식사패턴은 자녀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고 건강 문제의 악순환이 지속된다. 이처럼 먹거리의 양극화는 신체의 양극화로 직결되고, 이는 곧 건강의 불평등으로 이어진다.

이는 단순한 사회 현상으로 넘기기엔 훨씬 더 물질적이고도 육체적인 현상이라, 평생 개인을 압박하는 동시에 자녀세대의 대물림 가능성도 높다는 데 문제가 있다. 총열량이 부족한 과거에는 뚱뚱한 몸이 부의 상징이었다.

옛날 같으면 칭송받을 몸들이 왜 이리 천대를 받는 걸까? 이는 단순히 미의 기준이 바뀐 탓이 아니라 신체는 늘 당대의 계급적 현상을 반영해 왔기 때문이다. 현대의 신체의 계급적 현상은 ‘비만’과 ‘S라인’의 양극단 현상이고, 그 핵심은 ‘먹을거리’에 있다.

페르난도 보테로 '소풍'

# 강요된 선택, 먹을거리의 신자유주의화

한동안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되었던 쇠고기 광우병 문제. 여기엔 복잡한 정치경제적인 문제들이 얽혀있지만 정부의 주장은 소비자 선택의 확대에 맞춰져 있다. 대통령의 발언대로 사먹을 사람은 사먹고 싫은 사람은 말면 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선택지는 넓으면 넓을수록 소비자 주권은 더욱 신장된다.

비싸지만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유기축산) 한우를 선택하는 소비자의 권리만이 아니라 싼 값으로 더 자주 사 먹길 원하는 소비자를 위해 값싼 미국산 쇠고기도 진열해 놓아야만 소비자들의 선택권이 넓어지고 권리가 보장된다는 것이다. 다만 처음부터 안전하고 신선한 유기축산 한우를 선택할 돈이 없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그런데 값싼 선택에는 제도적으로 보장되지 않는 ‘리스크’가 따른다. 광우병 우려도 그렇지만 각종 식품첨가물과 화학처리를 한 가공식품, 값싼 수입식품의 식품 위해성이라는 ‘리스크’는 먹거리를 선별할 여력이 없는 사회적 약자들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스크 관리의 주체인 국가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개인의 선택과 책임으로 돌릴 태세다. 이것이 바로 먹거리 정책의 신자유주의화 경향이다. 한편으로는 ‘로하스 인증’, '유기농 인증‘, ’공정무역 인증‘ 등으로 가격 프리미엄이 붙은 차별화된 새로운 시장이 만들어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식품규제의 완화와 개방화를 통해 기업의 영업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광우병 위험이 가득한 쇠고기와 유전자조작식품(GMO)으로 낙인 찍힌 콩이 들어있는 두부, 각종 가공식품과 정크푸드가 건강에 위험성이 크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사먹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야말로 요즘 떠오르는 사상가 조르조 아감벤이 역설한 ‘호모 사케르(벌거벗은 생명)’의 21세기판이 아닐 수 없다(물론 최하류층은 식량위기의 시대에 그런 것조차도 못 먹고 굶어죽어가는 전세계 10억명의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다).

# 시장이 아닌 연대를

이런 흐름 속에서 소비자의 현명한 선택이란 애초부터 자신의 경제적 처지에 걸맞은 선택만이 남았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시장이 제공하는 대로 먹던 관행과 시스템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먹을거리를 성찰하며 유기농과 공정무역, 슬로푸드를 지향하는 소비자들의 추세는 분명 의미가 크다.

다만 이를 자본의 새로운 이윤추구를 위한 시장의 확대에 수동적으로 맡길 것이 아니라, 조금 덜 먹고 덜 쓰더라도 자연환경과 사회적 약자에게 덧씌워지는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보겠다는 공간을 뛰어넘는 적극적인 ‘연대적 소비의 네트워크’는 큰 의미가 있다.

가령 생협운동은 여전히 중산층들의 유기농 소비처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시장 속에서 국내 및 제3세계 생산자뿐만 아니라 도시 저소득층과의 연대적 관계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대형마트의 유기농과 생협의 유기농은 가격결정방식이나 농민과의 관계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차이가 크다. 궁극적으로는 시장의 변화를 통해 국가의 농업과 먹을거리 정책의 변화를 이끌어내어야만 먹을거리 불평등의 리스크를 줄여나갈 수 있을 것이다.

서구에서 저소득층의 영양불균등 해소를 위해 지역의 신선한 과일과 채소 공급을 장려하는 로컬푸드 정책이 좋은 사례이다.



정은정 대구여성환경연대 정책위원(농업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