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속으로 들어간 패션 잡지] 드라마·영화·리얼리티 프로 소재로 다양한 공존 방식 실험

1-영화 '액트리스'
2-W코리아와 김지운 감독이 공동제작한 '선물'
3-온 스타일 패션 에디터 리얼리티 프로그램
4-드라마 '스타일'

패션 잡지와 영상 매체는 공존의 다양한 방식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잡지는 화보 촬영 현장을 다큐멘터리 영화의 소재로 내어주기도 하고, 기자 선발 과정을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통해 생중계하기도 한다. 방송은 질세라 패션 잡지 사무실의 구석구석을 비춘다.

카메라는 스타와 명품 가방뿐 아니라 한쪽에 쭈그려 앉아 고가의 협찬품이 망가질까 조바심내는 에디터들의 모습까지 담는다. 패션 잡지와 그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각도의 카메라가 자신들을 비추기 시작하면서 굴절의 위기와 영역 확장의 가능성 앞에 섰다.

드라마 속 패션 잡지

방송 장르 중 가장 유행에 민감한 분야답게 패션 잡지라는 화두를 잡기 위한 드라마 제작사들의 경쟁은 치열했다. 현재 방영 중인 SBS 드라마 <스타일>이 촬영에 들어가기 훨씬 전부터 SBS와 KBS는 패션 잡지를 소재로 한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눈치 작전을 벌였다.

결과적으로 <스타일>과 비슷한 내용을 다룰 예정이던 KBS의 <매거진 알로>는 표절 시비로 제작을 잠정 보류한 상태다. 그러나 이런 치열한 경쟁이 무색하게도 현재 나온 결과물은 아쉬움 투성이다. 패션지를 배경으로 한 공중파 드라마로는 이제 1호가 출범한 셈이지만 과장과 왜곡의 함정을 피해가지 못했다는 평이다.

<스타일>의 배경은 국내의 한 패션 잡지. 주인공은 표독스러운 상사 밑에서 정식 에디터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를 벌이고 그 와중에 명품 가방과 명품 옷이 어지러운 향연을 벌이다가 마지막에는 청담동의 멋쟁이 남자들과 주인공이 엮인다는 스토리다. 문제는 통속성이 아니라 촌스럽다는 데 있다. 드라마가 6회까지 방영된 8월 중순 현재, 극중 상사인 김혜수가 자주 사용하는 ‘엣지 있게’라는 말이 유행하며 ‘엣지녀’가 신조어로 떠올랐다.

그러나 패션 잡지에서 엣지는 이미 한물간 단어다. ‘날 선’ 쯤으로 번역할 수 있는 엣지(edge) 외에도 한 때 힙(hip)한, 핫(hot)한 이라는 단어가 패션 잡지에 종종 쓰이면서 ‘여기가 미국이냐, 한국이냐’ 라는 논란이 잠시 있었고, 최근에는 여전히 그런 어휘들을 쓰긴 하지만 동시에 ‘명민한’처럼 흔하지 않으면서 의미가 명확한 우리말을 발굴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비단 용어뿐이 아니라 실제 패션 잡지 사무실에는 육감적인 차장도, 복부에 식스 팩을 새긴 남자 선배도, 울며불며 취재원의 팔에 매달려 섭외하는 경우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텐 아시아 강명석 기자는 “드라마 제작진이 패션 잡지 업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일반적인 트렌디 드라마와 다름 없이 전개되는 것 같다”고 말한다.

패션 잡지의 화려함은 드라마의 통속성을 살리기에 더 없이 좋은 소재다. 그러나 극적 전개와 과장이 드라마의 특권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직종에 대한 얄팍한 지식만으로는 병원에서 연애하고 법원에서 연애하던 사람들이 그대로 패션지로 장소만 옮기는 꼴을 피할 수 없다. 확실한 사전 조사는 예의이자 필수라는 사실은 지금 <스타일>이 던지는 메시지 중 가장 들을 만한 것이다.

리얼리티 속 패션 잡지

패션 잡지 W코리아는 영상과의 호환 가능성을 미리 파악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해 왔다. 지난 3월 김지운 감독과 26분 분량의 패션 무비 <선물>을 찍은 데 이어 최근에는 케이블 방송사 온 스타일과 손잡고 아예 에디터 공개 채용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에디터 지망생들을 뽑고 그들에게 과제를 부여해 최종 선발된 한 사람을 W코리아의 정식 에디터로 채용하게 된다. 지망생들이 주어진 과제를 수행하고 에디터로서의 역량을 시험받는 모든 과정은 리얼리티 프로그램 형식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완벽하게 공개된다. 촬영 기간 내내 W코리아 사무실에는 카메라가 상주하며 당연히 실제 에디터들의 일하는 모습도 브라운 관을 통해 여과 없이 비춰지게 된다.

“기존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긴장감을 주기 위해 경쟁에 다소 치중했다면 이번에는 유명 잡지의 정직원이라는 확실한 목표가 있는 만큼 실제 에디터로서의 직무 수행 능력을 평가하는 데 초점을 맞출 계획입니다.”

온 스타일 제작팀 이용렬 팀장의 말이다. 그야말로 ‘리얼’에 충실하겠다는 말이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과장의 위험을 안고 있는 드라마와 달리 패션지의 모습을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방식이다. 그러나 극적인 설정 하나 없이 일반인들의 경합만으로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 수 있을까?

“패션 잡지는 스타, 그리고 럭셔리 브랜드와 뗄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직업이 주는 화려함 자체가 흥미 요소가 되는 거죠. 여기에 더해서 결코 화려하지만은 않은 에디터들의 실생활이 또 하나의 볼거리가 될 예정입니다.”

온 스타일 제작진은 신진 디자이너를 발굴하는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를 통해 ‘일반인 리얼리티’의 가능성을 시험한 바 있다. 감정 표현에 미숙한 한국인들의 캐릭터를 최대한 끌어내 상황을 역동적으로 끌어가는 것에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고 자부한다. 이 노하우는 패션지 정직원이라는 ‘대형 떡밥’을 통해 빛을 발할 예정이다.

“패션지와 방송 간 협업의 형태는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성공하기만 한다면 저희로서는 아주 훌륭한 채용 통로를 얻는 셈이죠. 대기업의 형식적인 인재 채용 말고 정말 열정이 있는 사람을 뽑을 수 있는 기회가 될 테니까요.” W코리아 이혜주 편집장의 말이다.

8월20일까지 지원자를 모집하며 10월부터 방송될 예정이다. 에디터로 최종 선발된 이는 10월29일 W코리아의 유방암 기부 행사에서 발표된다.

영화 속 패션 잡지

이재용 감독의 영화 <액트리스>는 여배우들의 이야기다. 다큐멘터리, 정확히는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윤여정, 이미숙, 고현정, 최지우, 김민희, 김옥빈 등 6명의 여배우가 실명으로 출연한다. 영화 속에서도 여전히 대한민국의 여배우인 이들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잡지사의 화보 촬영을 위해 한 자리에 모이게 되고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픽션 아닌 픽션으로 화면 위를 흐른다. 여기에 패션 잡지 보그가 함께 했다.

한국의 내로라하는 여배우가 둘도 셋도 아닌 여섯 명이 모여 앉아 서로의 고충을 털어 놓는다는 이 유례 없는 설정은, 영상미에 목을 매는 이재용이라는 감독과 보그의 하이브리드를 통해 현실화되었다. 영화 촬영은 실제 보그의 화보 촬영 현장에서 이루어졌다.

평소 보그의 손발 역할을 하던 A급 스타일리스트와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 영화에 자동으로 출연하게 된 것은 물론이고 영화에 쓰인 의상에도 보그의 손길이 미쳤다.

“영화 촬영이 이루어진 6월에는 추동 시즌 의상을 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요. 하지만 영화는 겨울에 나오는데 여름옷을 입을 수는 없으니 패션 하우스들에게 특별히 부탁을 했죠. 영화에 나오는 의상들은 모두 버버리, 프라다 등의 본사에서 비행기로 공수되어온 것들이에요. 오랜 세월 동안 탄탄히 구축된 보그의 인프라가 빛을 발한 셈이죠.”

보그 패션 디렉터 이지아 차장의 말이다. 여기에 이재용 감독이 여배우들과 맺어온 친분까지 더해지자 까다롭기 짝이 없는 여배우 단체 캐스팅이라는 산도 훌쩍 넘을 수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영화에는 실제 보그 에디터 2명이 출연한다.

이들은 각자 캐릭터를 부여받아 복잡한 화보 촬영 현장 속에서 성마르게 다그치거나 예의를 갖추며 상황을 이끄는 역할을 수행한다. 물론 실명 출연이다.

영화는 여배우들의 애환에 조명을 비추되 그 배경으로 어지러울 정도로 아름답고 복잡한 패션 잡지를 택했다. 영화계의 패셔니스타라고 불리는 감독다운 선택이다. 보그 역시 수많은 매체 중 영화를 택했다.

“보그가 카메라를 통해 비춰진다면 그 장르는 영화, 그것도 패션을 잘 아는 감독의 영화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패션지와 영상 매체가 윈윈하는 시대이긴 하지만 무분별한 노출은 오히려 권위를 떨어뜨릴 수 있으니까요. 두 미디어가 서로를 비추는 과정에서 자칫 잘못하면 희화화하거나 무시하게 될 수도 있어요. 패션지는 영화계를 존중하고 영화계는 패션지를 추켜세우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협업을 결심한 거에요.”

보그 김지수 부장의 말이다. 영화는 12월 개봉 예정이다.

취재 중 말말말


■ 제가 패션 잡지에서 일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마주친 기자들 중에서 김혜수 같은 기자는 한 명도 못 본 것 같아요. - 온스타일 성병수 프로듀서

■ 패션지 기자가 방송에 노출되면서 유명해지는 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다만 뭔가 있어 보이기 위해서 평소에 잘 쓰지도 않는 용어나 제스처를 남발하는 건 허세로밖에 안 보여요. - 텐 아시아 강명석 기자

■ 그건 시청자가 판단할 몫이죠. 최선을 다하는 집요한 모습이 얄미워 보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도 패션지 에디터에 대한 환상을 굳이 깰 생각은 없어요. - 온스타일 이용렬 팀장. (촬영 중 에디터가 짜증내다가 안티라도 생기면 어쩌죠? 라는 질문에)

■ 패션 잡지에 판타지를 가지고 있다고들 하는데 여기는 정말 흥미로운 세계가 맞아요. 다른 문화를 재빨리 흡수하고 재해석하죠. <프리즌 브레이크>가 유행하면 우리는 그 달에 모델과 감옥이라는 주제의 화보를 내버리니까요. - 보그 김지수 부장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