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한국사회에 어퍼컷을 날리다] 정치사회, 미디어 환경 변화, 현실적 만화 = 재미없는 만화 공식 깨뜨려

(맨 왼쪽) 위안부 문제를 다룬 정경아의 '위안부 리포트'
(가운데) 한국전쟁 당시 양민 학살을 다룬 박건웅의 '노근리 이야기'
(오른쪽) 광주 5.18을 다룬 강풀의 '26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리얼리즘 만화는 대중적 상업만화와 상대적인 위치에 있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쉽게 말해 리얼리즘 만화는 잘 안 팔렸다.

만화는 황당무계하고 판타스틱한 허구의 세계로 독자를 인도함으로써 찰나적이면서도 강렬한 유희와 오락을 제공해야 한다, 라는 뿌리 깊은 고정관념이 ‘현실적인 만화는 재미없는 만화’라는 인식으로 귀결됐기 때문이다. 작가들에게 있어서 현실의 삶과 인간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는 독자와 시장이 만든 ‘만화다움’의 기준을 무시하는 일종의 일탈이었고, 생계와 작가적 자존심을 건 모험이었다.

그런데 2000년대에 들어서 놀라운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눈에 잘 띄지는 않았지만 조금씩 현실세계의 어두운 일면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정면으로 다룬 작품들이 선을 뵈더니, 2009년 6월에 발표된 최규석의 <100℃>가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100℃>뿐만이 아니다. 2000년대 하반기에는 상당한 수준의 작품성을 구현한 리얼리즘 만화의 출판이 전례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바야흐로 지금 이 시기는 리얼리즘 만화 장르가 역사상 처음 맞이하는 전성기라 해도 좋을 것이다.

무엇이 이러한 새로운 현상을 가능케 했을까? 궁극적인 답을 구하자면 이렇다. 즉 ‘현실적인 만화는 재미없는 만화’라는 공식이 깨졌다. 철옹성 같던 ‘만화다움’의 기준에 균열이 생겼다. 그 이유를 우리는 크게 두 가지 환경적 요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째는 우리나라의 정치사회적 조건 하에서 진행된 만화계 안팎으로부터의 인식적 환경의 변화다. 둘째는 만화를 둘러싼 미디어 환경의 변화다.

먼저 만화를 둘러싼 의식적 환경의 변화가 끼친 영향을 살펴보자. 특히 최근에 발표된 리얼리즘 만화의 상당수가 우리 현대사의 어두운 부분에 천착한 역량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만화로 보는 ....’ 식으로 앞머리가 붙는 역사 학습 만화가 아니다. 만화가 근본적으로 하나의 수준 높은 역사의 기록일 수 있다는 인식이 새로이 자리 잡은 것이다. <노근리 이야기>나 <위안부 리포트>, <100℃>, <26년>등과 같은 작품은 우리 시대가 반드시 기록(그리고 기억)하고 넘어가야 할 역사적 사실을 거침없이 담아내고 있다.

이는 내부적으로는 첫째, 만화가의 인식과 역량이 그만큼 성장했음을 시사한다. 여전히 주류 상업만화를 절대적으로 선호하는 빡빡한 시장구조 속에서 작가로서의 주관을 관철한다는 것은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둘째, 출판계에 이들의 작가정신을 높이 사고 지원해 주고자 하는 인식이 싹텄기 때문이다.

가령 작가주의 만화잡지를 표방하는 <새만화책>의 창간과 성공은 우리 만화사의 획기적인 사건이라 할 만하다. 또한 만화 양서 출판을 전문으로 하는 출판사 ‘길찾기’의 출현, 그리고 기존 출판사의 참여(예를 들어, ‘창비’) 또한 반가워해야 할 경향이다.

지금 리얼리즘 만화들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다름 아닌 격동의 현대사를 거쳐 온 우리시대의 자화상에 다름 아니다. 누가 뭐래도 87년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가 겪어온 정치적 여정은 무섭도록 역동적인 것이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서는 일제에 의한 국권 수탈, 인류 최대의 비극적 내전으로 불리는 분단전쟁 등, 우리의 근현대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뼛속까지 역사의 산증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가혹한 현실이었다.

그러나 만화가 역사 속에서 그저 작고 힘없었던 이름 없는 사람들의 기록이 될 수 있다는 자각은 오랜 세월이 흘러, 어느 정도 시민의식이 단련되고 문화적인 성장을 이룬 후에 찾아왔다. 민주주의 시스템을 만들고 지키고자 하는 시민사회의 열망이 만화를 보다 자유로운 표현의 영역으로 진입시켰다. 만화는 이제 단순한 소일거리이자 찰나적인 유희가 아니라 유력한 소통의 ’통로‘가 되어가고 있다.

만화에 대한 문화적인 편견이 완화된 것 또한 중요하다. 만화뿐만이 아니라 대중문화 전반에 대해 점차적이기는 하지만, 이것과 저것에 차등을 두고 구별짓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을 인정하고 취향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리얼리즘 만화의 성장은 만화가 문학 등의 타 예술장르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는 것, 즉 대중문화질서의 재편을 의미한다.

두 번째로, 미디어 환경의 변화는 리얼리즘 만화의 성장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단연, 인터넷의 발달과 블로그 등을 통한 1인 미디어 시대의 도래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에게 있어서 새로운 창작환경이 주어졌다는 점은 비단 리얼리즘 만화에만 국한된 조건이 아니므로 논외로 하겠다.

중요한 것은, 개인적이고 주관적 경험의 스토리텔링이 그 소통 가능성과 범위를 거의 무한대로 확장했다는 것이다. 가령 우리는 블로그에 개인적인 경험과 주관적인 감상에서 비롯한 글이나 이미지를 포스팅 함으로써, 지극히 소소한 일상다반사나 개인사적 아픔과 같은 사연, 나아가서 세상을 보는 시각과 사상을 나누며 동시대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뿌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우리는 타인의 이야기를 같은 시대와 세대를 살아가는 독자의 입장에서 분석하고, 거기에 공감하거나 반대하는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미디어를 읽고 쓰며 미디어에 대한 지식과 교양을 갖추고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능력)를 발휘하게 된다. 최근에 발표된 리얼리즘 만화 중 적지 않은 수가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을 극사실주의적으로 묘사하며 사회적인 메시지를 구현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미디어 환경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리얼리즘 만화는 이제 막 우리사회에서 소통 매체로서 유효성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앞으로 리얼리즘 만화의 생명, 그리고 지속가능성은 그들이 만들고자 하는 ‘동시대적 공감대’의 폭과 깊이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이기진 만화 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