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덤, 그 확장과 진화] 높아진 연령층과 적극적 참여로 팬덤의 다양한 변주 가속화

모 은행에서 근무하는 40대 초반의 남성 김 모 과장은 피겨 스케이터 김연아의 팬클럽에서 여가시간의 적잖은 부분을 할애한다. 하루 동안의 김연아에 대한 기사를 스크랩하거나, 회원들과의 피겨 스케이팅 지식 공유, 팬들이 직접 그린 팬 아트 감상, 그리고 그녀가 트위터에 올린 소식을 확인해보곤 한다.

김 과장은 그 시간이 아깝다거나, 자신의 나이가 부끄럽다고 느껴본 적은 한번도 없다. 자신 외에도 팬클럽에는 의사, 디자이너, 작가 등 각 분야 종사자들이 나이를 불문하고 열성적으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김연아의 일상이나 대회, 아이스 쇼 등에서 직접 응원하는 것에서 나아가 피겨 스케이팅 전반에 대한 전문 지식을 토대로 김연아 선수 경기를 분석하거나 활동전반에 대한 의견을 개진한다. 대부분의 피겨 스케이팅 관련 기사들이 팬클럽에서 나온 분석을 토대로 작성되고 있다고 김 과장은 말했다. 피겨 스케이팅 기사를 잘 알지 못하고 쓰다가는 그들의 날카로운 지적을 모면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십 수 년간 청소년 문화로 평가절하되었던 한국의 팬덤은 또 하나의 전문가 집단이 되어가고 있다. 며칠 전 서울에서 열린 ‘삼성 애니콜 하우젠 아이스 올스타쇼 2009’에 앞서 김연아와 레벨이 맞지 않는 출연진에 대해 팬들이 주최측에 항의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팬덤의 적극적인 표현은 과거의 팬덤과 가장 달라진 점이다. 이는 이 시대의 팬들이 민주화 시대에 성장한 세대라는 점과 더불어 팬덤의 연령층이 높아진 데서 비롯되었다는 분석이다.

아이돌을 통해 젊음을 충전한다

‘오빠부대’로 시작됐던 가요계의 팬덤은 ‘누나부대’에 이어 ‘삼촌부대’까지 양산했다. 과거 SES, 핑클 등이 여드름 난 10대 청소년들만의 ‘여신’이었다면,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로 다시 시작된 걸그룹의 열풍 속엔 ‘삼촌부대’가 당당히 자리하고 있다.

가요계에 들어온 30-40대 남성들은 그들의 자녀들과 팬클럽 활동을 하면서 무조건적인 스타에 대한 동경에서 벗어나 때때로 이유 있는 비판과 조언을 더한다. 빅뱅이나 동방신기에 열광하는 ‘누나 혹은 아줌마 부대’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세대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 시대의 중요한 가치 중 하나인 ‘젊음’으로 이 현상을 설명한다. 부모 세대와 젊은 세대가 공감하는 선의 가치는 젊음인 것이다. 동안은 이제 미녀를 바라보는 하나의 기준으로 추가됐다. 특히, 남성들의 경우 자기 또래의 여성들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풋풋한 젊음을 소녀시대와 같은 걸그룹을 통해서 충족시키고자 하고, 이는 여성들 역시 마찬가지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젊음에의 염원이 젊은 아이돌에 대한 팬덤이다.

IT기기는 정체성의 표현

아이폰의 국내 출시가 기정사실화되면서 아이폰의 출시 일자에 대한 궁금증이 하루가 멀다 하고 네이버 지식인에 올라오고 있다. 공개된 소프트웨어가 많고 무선공유기를 사용하면 무료로 인터넷을 즐길 수 있는 wifi의 장점을 들면서 아이폰을 애타게 기다리는 이들.

아이폰이 미국에서 처음 출시되던 날, 이를 구입하기 위해 장사진을 이루었던 풍경은 곧 한국에서도 재현될 듯하다. 아이폰과 아이팟, 그리고 닌텐도까지 이들 디지털 기기는 이제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동시에 그들에 향한 사용자들의 충성도는 스타들을 향한 사랑 못지 않다. 단지 사용자에 머물지 않고 제품을 직접 홍보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동종 제품을 사용하면서 느끼는 동질감에서 비롯된 하나의 팬의식은 팬덤문화를 형성한다. 다양한 선택지가 주어진 사회에서 살아가는 소비자는 특정한 물건을 구입함으로써 정체성이 구분지어지게 마련이다. 아이폰이나 아이팟, 그리고 닌텐도는 첨단 제품이자, 이들 기기의 사용자는 곧 가장 세련되고 진보적인 집단이라는 동의어가 설정되기에 많은 젊은이들이 이 집단에 소속되기를 원한다.

“이 시대 젊은이들은 주거 생활이 불분명하고 불안정하지만 첨단제품으로 대체 가능한 사회가 되었다. 따라서 더 집착하고 열광하게 되는 것이다. 가령, 한달 100만원 수입자가 50-60만원에 달하는 아이팟을 사용하는 것을 기성세대는 이해할 수 없지만 젊은이들은 이를 정체성 유지를 위해서 기꺼이 지불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권경우 대중문화 평론가(문화연대 문화사회연구소 강사)는 설명했다.

1-김연아 팬카페 '멍연아'
2-클리앙의 노무현 추모 광고
3-닌텐도 DS 광고
4-'2NE1'

정치현상에서의 달라진 팬덤

지난 5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기 위해 네티즌들의 십시일반으로 성금을 모은 일이 있었다. 노사모가 아닌 일반인들이 직접 나서서 성금을 모아 낸 신문광고는 인상적이었다. IT 커뮤니티인 ‘클리앙’, 영화 마니아 커뮤니티인 ‘듀나의 영화낙서판’, 사진동호회 ‘SLR클럽’ 등 취미활동을 위해 모인 인터넷 커뮤니티는 회원들이 모은 돈으로 경향, 한겨레 등의 신문에 추모 광고를 냈다. 몇 천 만원 단위의 금액이었지만 네티즌들은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움직였다.

이전에 있었던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에 모인 성금보다 규모는 월등히 컸지만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착한 시민’의 심리가 작동한 결과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특정 현상과 기간에 발현된 것이었다. 이는 정치나 사회적인 면에서의 달라진 팬덤문화를 반영한다. 최근 ‘허경영 현상’도 기존과는 다른 형태라고 대중문화 평론가 권경우 씨는 설명했다.

“허경영이란 인물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사람도 있지만 많은 이들이 그의 허황되고 재미있는 공약에 흥미를 느끼고 있다. 현 대통령과의 비교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데, 이명박 대통령의 허황된 공약과 거짓말이 그를 통해서 더욱 희화화되고 상징적으로 투사되는 면이 있다. 허경영의 행보는 곧 현실 정치인에 대한 희화화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가 개그맨이 아닌 정치인이기에 가볍게 넘길 수만은 없으며 단지 웃어 넘기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정치까지도 바라보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권경우 씨는 덧붙였다.

반면 김창남 성공회대 신방과 교수는 지금의 ‘허경영 현상’이 팬덤현상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라면서 “정치인의 외피를 두른 코미디언이라고 본다. 세상에 대한 대중들의 냉소가 표출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견을 말하기도 했다.

욕망의 시대, 팬덤 변주의 가속화

최근에 두드러진 성장을 하고 있는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 (SNS) 트위터나 NHN에서 시작한 미투데이는 팬덤을 활용한 마케팅으로 회원수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려가고 있다. 트위터는 의도치 않게 김연아와 김제동의 등장으로 수십 만 명의 회원을 증가시켰고 네이버의 회사인 NHN은 최근 인기 가도에 있는 걸그룹 2NE1과 빅뱅의 G드래곤을 앞세워 미투데이를 홍보했다. 그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다.

그러나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가 기존의 목적을 잃고 팬덤의 무대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김창남 교수는 “기획사 횡포나 자본주의 시장논리에 의해서 대중문화에서 팬덤이 하나의 항체 역할을 한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팬덤의 특징은 그것을 통해서 내가 좋아하는 팬들을 구별짓기 위한 방식이다. 그러나 그것이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행태를 낳는 경우 비합리적인 에너지로 갈 수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 소비가 선이 되는 시대이자 욕망의 표출이 자유로운 시대는 팬덤의 변화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