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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하루키를 외치게 만들까

사진을 찍고 나면, 내 몸은 항상 함께 찍은 누군가에게로 기울어져 있다. 고개가, 어깨가, 몸이 한 뼘쯤은, 내 곁에 선 그 사람에게로 한껏, 바투 다가간 채인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이 버릇을 알고 나서는 그러지 않으려고 내심 애를 쓰기도 한다.

남몰래 짧은 호흡도 해가면서, 목을 빳빳이 세워, 기울어지면 안 돼, 어깨를 바로 하고 정면을 바라보는 거야, 그래 그렇지, 셔터가 눌리고 나면 괜찮아질 테니 조금만 참자, 하나 둘 셋― 하지만 찍고 나서 사진을 들여다보면 나는 꼭, 십오 도 혹은 삼십 도쯤, 기울어져 있다.

그 모양새가 우스워 나는 때로, 누가 나를 잡아당기는 것인지에 관해 곰곰 생각한다. 나를 이끄는, 보이지 않는 당신은 누굴까. 혹 나와 나 아닌 존재의 간극에, 눈으론 보이지 않는 자성(磁性)이 있어 자꾸만 까무룩 내가 빨려드는 것은 아닐까.

그도 아니라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숨을 멈추는 우리의 찰나가 경이로워 어느 틈에 나 자신, 조그만 손 한바닥의 크기쯤은 지워졌다 되돌아오는 건 아닐는지. 그러나 내가 기울어졌다고 믿은 시간은 비단 플래시가 터지는 순간뿐이었던 걸까. 나는 매 분 매 초 기울어진 채이며 또한 기울어지고 있는 중은 아닐까.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름 역시 내게는 그러하다. 기울어지지 않으려고 전심을 다해 노력하면서도 결국은 기울어지고야 마는 것. 그래서 끝내, 마음이 불편해진 채로 멀찍이 치워버리지만 도저히 고쳐지지 않는 기울어짐과 같은, 그 무엇.

감히 솔직해지자면 그렇다. 나는 많은 이들이 열광하는 ‘하루키적’이라는 것에 늘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이다. 무엇이 이토록 ‘하루키, 하루키’를 외치게 만드는 것일까. 하루키를 읽으면서도 늘 하루키가 궁금한 것이 나의 하루키 읽기이다. “글쎄. 나는 하루키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라고 말하면 친구들은 눈을 댕그랗게 뜬 채 망망히 나를 바라본다.

그들에게 나는 어서 빨리 개종해야 하는 신도처럼 취급된다. “희한하군. 어떻게 하루키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지?”라며 머리를 긁적이며 소주잔을 채워주는 선배들도 종종 있다. 그럴 때면 가끔씩 나는 조심스레 묻는다. 진실로, 궁금한 까닭이다.

“모든 사람이 다 하루키를 좋아할 거라고 믿는 근거는 어디에 있죠?”

그러나 곧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대답이 날아드는데, 대략 “상실의 시대를 살며, 하루키를 부정할 수는 없지”와 같은 이야기들이다.

쉼표와 마침표 사이에서 말 줄여지듯 그때마다 나는 조금 상심한다. 문학이 언제는, 상실 아니었던 적이 있는지 따져 묻고 싶다. 이상도, 박태원도, 김남천도, 손창섭도, 오상원도, 이범선도, 전상국도, 윤후명도, 강석경도, 오정희도, 김승옥도, 윤대녕도, 최인호도, 김소진도, 결국 우리가 이미 말해왔고, 말하려 하는 것 또한 이야기의 얼개가 다를지언정 기실 심연을 들여다보면 모두가 그것 아니었는지 말이다.





그러니 나는 때때로, 상실을 소리 내어 말함으로써 그것이 ‘시대’의 코드로 포장되고, 90년대를 넘어 오늘날의 문학을 포섭하는 기민한 유행의 선두에 위치해 있는 사실을 목도할 때마다 조금은 힘겹다.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의 책 한 권을 소비함으로써 사람들이 느끼는 만족감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나는 도무지 의문인 것이다.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지만 과거에 그랬고 현재에 그러하듯 이 시대, 상실은 곳곳에 있다. 더 잃을 것이 없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그것은 오고, 더 좌절할 틈이 없다고 여기는 때에도 그것은 가지 않는다. 그것은 백신이 생성될 수 없는 바이러스와 같이 일상을 침투해, 언제까지고 머무른다. 그리고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상실이라는 단어는, 경계에도 아랑곳없이 인간의 촉수를 건드리는 공통된 생의 감각 같은 것이므로 우리는 그것의 보편성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상실은 이상을 꿈꾸는 모든 이들의 등을 매만지는 위무의 단어로 기능하며, 궁극엔 더 이상 단어가 아닌 것으로 변모한다. 모반을 꾀하듯 그러나 매우 분명한 모습으로 상실은 화살처럼 단어 그 너머를 향해 날아간다. 종내 상실은 언어 아닌 것이 되며 고로 상실은 언어로서 체화될 그 무엇의 여지도, 더는 남기지 않는다. 상실은, 그러니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나 역시 오늘도 끊임없이 하루키를 읽는다. 그것만은 틀림없는 현실이다. 여전히 좀처럼 그와의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책장을 넘긴다. 하루키를 이해하기 위해 하루키를 읽는 것이 아니라 하루키를 부정하기 위해 하루키를 읽는 것만 같은 기분에 이따금 머쓱해지기도 하지만 그럴 때면 놀이하듯 손가락을 까딱이기 바쁘다.

무라카미 하루키, 와이키키, 시베리안 허스키, 도스토예프스키, 니진스키…… 등을 중얼거리며 나는 하루키의 이름이 본명일까 의심하고, 그의 아내를 상상하고, 그가 즐겨 만드는 스파게티와 좋아하는 음악, 가령 굴렌 굴드와 같은 것들을 떠올리고, 그가 매일같이 달린다는 10킬로미터쯤의 새벽길을 멋대로 그려본다.

“미도리, 네가 너무 좋아”라고 웅얼거리며 나는 ‘상실의 시대’의 어떤 설렘 같은 감정들을 뒤적여도 보고, “타르푸 ․ 쿠 ․ 샤우스 ․ 타르푸 ․ 쿠 ․ 샤우스”하고 움직이는 시계 소리와 같이 ‘TV 피플’을 부유하는 어떤 ‘공룡적인’ 기시감들을 잡아보려 허공에 손을 내밀어보기도 한다. 상실을 구매하고, 소비하고, 배설하는 그 일련의 행위에 조금은 자주, 서글픔 따위를 느끼기도 하며 나 또한 어제도 오늘도 하루키를 읽는 것이다.

아마 내일도 나는 하루키를 읽을 것이다. 그리고 십오도 혹은 삼십도 쯤 마음이 기울어지기도 할 것이다. 상실의 소화를 권하는 사회야말로 상실에 중독된 이들이 뱉어내는 치명적인 독(毒)과 같은 것은 아닐까, 꽤 오랜 시간 옹잘거리기도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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