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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란 무엇이고 왜 해야 할까?





이 시점에서 일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제안은 배부른 소리처럼 비칠지 모른다. 금융위기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았다. 비정규직법은 되레 대량 해고의 빌미가 되었고, 청년 실업률은 9%를 향하고 있다. 일자리가 필요로 하는 ‘인적 자본’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지혜이고, 일할 기회가 있다는 데 절로 감사하게 되는 시절이다.

일을 하는 이유는 당연히도, 밥을 벌기 위해서다. 집을 마련하고 가족을 꾸리기 위해서다. 노후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주춤했던 아파트값은 언제 그랬냐는듯 도로 오른다. 교육 현실은 바뀔 기미가 없다. 믿을 것은 “인생을 지키는 약속”이라는 보험뿐이다. 불안한 마음에 불안한 일자리에 매달린다. OECD 국가 중 가장 긴 노동시간에 굴복해 제대로 된 식사도 팽개치고, 투자 가치가 높다는 지역을 전전하고, 가족과 어울릴 여유도 없이 정작 목표했던 삶은 ‘미래’에 유예한 채로.

이쯤 되면 좀 궁금해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일이 도대체 무엇일까? 어떻게, 왜 일을 해야 하는 것일까? 일을 빼면 나의 삶은 무엇일까?

철학자 알베르 카뮈는 말했다.

“일 없는 삶은 쉽게 부패하지만, 영혼 없는 일은 삶을 압살시키고 만다.”

‘삶의 경영’에 관심을 갖고 <살림의 경제학>을 추구하는 강수돌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는 <자본을 넘어, 노동을 넘어>에서 말한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말은 맞다. 그러나 문제는 더 구체적으로, 우리가 하는 일이 무슨 일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이 참된 살림살이의 길, 즉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은 물론이요, 우리의 소질과 능력을 계발하게 도와주며, 다른 사람과 협동하고 사회 전반적인 필요나 삶의 질 증진에 기여하는 일인지, 한없는 돈벌이의 길, 즉 삶의 토대인 자연을 훼손하고 공동체를 해체하며 사람의 본성이나 영혼까지 파괴하는 일인지가 문제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구분해야 하지 않으면 별로 길지 않은 인생, 헛살기 쉽다.”

그러니까 일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것은 곧,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는 뜻이다. 일에 대한 몇 가지 의문들을 역사적, 철학적, 사회문화적 논의 속에서 해결함으로써 실마리를 풀어 보자.

첫째, 일은 선일까? 차라리 전투를 해라!

철학자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노동 대신 전투”를 하라고 권했다. 여기에서의 전투는 물론 은유다. 자신의 인간다움과 창조성을 끊임없이 명랑하게 일깨우는 치열한 상태를 니체는 노동하는 습관, 즉 “권태”와 대비해 전투라 불렀다. 이는 노동의 가치를 투여한 시간과 열정을 기준으로 가늠하는 근대사회의 평가 방식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노동을 하고 안 하고의 여부, 어떻게 노동할 것인가 또한 노동자의 임의대로 되는 게 아닌”(<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상황에서는 더더군다나.

니체 생각에 일을 할 때 사람들에게 종종 자유에 대한 욕구, 심지어 게으름에 대한 욕구까지 생긴다는 사실은 노동이 삶을 ‘생산’하는 활동이 아님을 증명한다. 기실 노동에 대한 찬미는 근대 이후 사회의 특유한 현상이다. 고대와 중세에 노동은 노예의 역할로, 사회적으로 경멸당했다. 근대 노동자가 고대 노예와 다른 점은 다만 노동에 가치를 부여하는 “환각”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인들보다 두 개념을 더 가지고 있는데, 이 개념들은 말하자면 완전히 노예적으로 행동하면서도 ‘노예’라는 낱말을 두려워하고 피하는 우리 세계에 대한 위로의 수단이다. 그 두 개념이란 바로 ‘인간의 존엄’과 ‘노동의 존엄’이다.”(<그리스 국가>)

철학자 고병권은 여기에 한국사회에서는 왜 노동에 의해 “망가진” 모습은 이야기되지 않느냐는 질문을 덧붙인다. “<개미와 베짱이> 우화는 다양하게 변주되어 우리 곁에 있다. <성공시대> 류의 TV 프로그램들이 그런 예일 것이다.(중략) 하지만 TV에 출연하지 않는 개미들은 불행히도 우화 속 주인공과는 많이 다르다.

여름철에 너무 많이 일한 개미는 겨우내 디스크에 걸려 누워 있고 보험 혜택도 못 받아 병원비 걱정으로 날을 샌다. 일부 개미들은 경기 침체로 직장에서 쫓겨나고, 남은 개미들은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린다. 열심히 일만 하느라 예술적 감성도 기를 틈이 없어, 좋은 그림을 봐도 그것이 왜 좋은지 알지 못하고, 훌륭한 음악을 들어도 그것이 왜 훌륭한지 알지 못한다.”(<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둘째, 일은 언제부터 삶의 의미가 되었나

서구에서 일의 개념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 시대였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부각되었다. 인간은 음악과 미술 등 온갖 아름다운 문화를 만들어냈고,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고, ‘창조로서의 일’이라는 개념이 생겼다. 최초의 르네상스인으로 분류되는 15세기 철학자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는 “활동이 시간을 채운다”는 이유로 일을 독려했다.

이후 이런 생각들이 보편화된 데에는 시대적 요청이 있었다. <일의 발견>의 조안 B. 시울라는 16세기에서 18세기 유럽에서 노동자의 자살을 금지하는 법이 확산되었음을 언급하며 이것이 “당시 사회가 더 많은 노동자를 필요로 했고 그만큼 노동자 가치가 증가한 반면 노동자들의 절망 역시 더 커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무시무시한 지표”라고 지적했다.

이 와중에 일이 숭고하다는 생각을 떠받든 것은 종교였다. 칼뱅과 루터로 대표되는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는 휴식과 쾌락을 혐오하고 금욕을 강조했다. 열심히 일하는 것이 곧 선이라는 이 종교적 믿음은 ‘소명’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조안 B. 시울라는 로빈슨 크루소에게서 근대적 경제인의 원형을 발견한다. 이 이야기에서 무인도에 간 크루소는 자신이 날마다 한 일들을 기록한다. 옷과 탁자와 냄비를 만들어 생활의 안락을 도모하는 동시에, 무엇인가를 만들 수 있다는 데 대해 자부심과 기쁨을 느낀다. 그의 일은 “삶의 수단을 공급하는 동시에 삶의 의미를 제공해주는 약속”으로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를 구체화한 것이다.

셋째, 한국사회 특유의 ‘공격적’ 일중독의 기원

독일 ‘사회경제행위 연구소’ 소장이자 한국 경제와 노동 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는 홀거 하이데 교수는 노동 시간이나 강도로 보았을 때 한국사회의 노동관은 “공격적”이라고 표현한다. <자본을 넘어, 노동을 넘어>에서 그는 “산업화가 서구로부터 ‘이륙’한 ‘외적 폭력’이 집단적 상흔이 된 것”이 원인이라고 분석한다.

폭력의 피해자가 가해자의 압도적인 힘에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나려 하는 경향이 있고, 저항이 어려운 거대한 폭력이 체계적으로 반복될 경우 피해자의 내적 마비 상태가 행위 패턴으로 고착된다는 심리학 연구 결과를 사회에 적용한 것이다.

“그런 상흔의 경험이 대중적 영향을 갖는 사건에 기인하면서도 익명의 권력에 의한 것으로 느껴질 때, 그것은 종종 체제와의 동일시나 그 체제의 패러다임과 동일시하는 결과로 나타난다.(중략) 한국사회의 집단적 상흔이 그 사회 전체를 자본주의 시스템과 동일시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이런 사회의 기저에 깔린 깊은 두려움은 조한혜정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의 말처럼 “마침내 각성을 불가능하게 만들 정도로 앞만 보고 달리게 하는 세속적 망상”의 원동력이며, 나아가 “거의 무한한 헌신 상태로 일하며 즉 세계 최고가 되려는 사회적 과정의 일부로 역할하려 하는 공격성”으로 이어진다. 하이데 교수는 이 공격성이 “노동 중독”이라는 사회적 병리 현상의 일부라고 진단한다.

넷째, 성공에 대한 강박은 자유의지일까

한편에서 한국사회 특유의 일에 대한 생각을 재생산하는 것은 넘치는 성공신화와 자기계발서들이다.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부르짖는 이 환상적인 이야기들은 노동의 유연화를 필요로 하는 신자유주의 체제로의 전환과 맞물려 일에 대한 강박을 노동자에 내면화하는 데 일조한다.

개개인이 ‘자유 의지’로 공격적인 노동관을 수행하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서동진의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박사학위 논문인 <자기계발의 의지,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 담론을 통해본 한국 자본주의 전환과 주체형성>은 일에 대한 이 일률적인 생각이 위로부터 퍼뜨려지는 과정을 꼼꼼하게 설명해낸다.

전상진 서강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이 “사회현상으로서의 자기계발”이 일상 속에서 어떻게 소비되고 실천되는지에 주목한다. 작년 학술계간지 <문화와 사회> 가을/겨울호에 실린 논문 <자기계발의 사회학: 대체 우리는 자기계발 이외에 어떤 대안을 권유할 수 있는가?>에서 그는 ‘프랭클린 플래너 유저들의 모임’ 회원들을 인터뷰한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이들의 행위의 의미가 반드시 자기계발의 결과인 ‘성공’에 부합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몇몇 인터뷰이들은 오히려 “운동을 하며 몸을 관리하고 책을 읽으면서 머리에 지식을 넣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며 즐거운 대화를 하는” 자기계발의 소소한 단계 자체에 매료된 것처럼 보인다. 성공의 매뉴얼 속에서 오히려 자유 의지에 눈 뜨는 아이러니, 혹은 ‘삼천포’인 셈이다.

다섯째, 일이 인간을 소외시킨다는 오래된 명제는 현재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일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래도 사람이 “물질만 생각하는 동물이 아니라 의미에 초점을 맞추는 동물”이지 않느냐는 작가 알랭 드 보통의 조심스러운 전제에 동의한다면, 그리고 대부분이 기계화된 일의 관습에 바치는 자신의 영혼을 정당화하는 데 모호하게나마 자신의 직업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과 세상에 기여하는 ‘역할’을 구실로 삼음을 인정한다면, 이 질문은 사회적으로 고민해보는 것이 타당하다.

우리가 무인도의 로빈슨 크루소가 아닌 이상 언제나 혼자만의 삶에 편의를 도모하는 방편으로서만 일을 생각하지는 않는다. 혹은 일의 과정 자체만을 탐닉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종교인이나 의사처럼 비교적 그 ‘역할’이 분명해 보이는 일들이 있지만, 고도로 산업화된 사회에서는 영향관계가 복합적이거나 추상적인 직업들이 더 많고 그 파장을 개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경우가 더 많다. 하다못해 식품업체에서 일하는 누군가도 언젠가 자신이 만든 식품에서 발암물질이 검출되었다는 사실에 맞닥뜨릴 수 있다. 혹은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쏟아 부어야 하는 기력과 열정에 비해 이 일의 효과가 하찮게 느껴질 수도 있다.

알랭 드 보통은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묻는다. “비스킷 제조업자는 자신의 일이 인류에게 의미 있는 기여를 한다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제품을 시장에 내놓는 경박한 방식을 보면 그 주장은 빛이 약간 바랜다. 한 직원이 ‘핌블스’라고 부르는 만화 캐릭터들이 인쇄된 공짜 스티커 증정 행사를 골자로 한 슈퍼마켓 프로모션을 고안하는 데 3개월을 보냈다는 소식에 대한 합리적 반응은 슬픔뿐이다. 어른들이 왜 그렇게 치사하게 자신의 책임을 방기할까? 두건이 달린 검은 망토 차림의 죽음이 어깨에 낫을 둘러메고 지평선에 나타나기 전에 한번 이루어보고 싶은 더 큰 야망은 없을까?”

‘규모’는 종종 일의 사회적 의미를 가늠하는 능력이나 감각을 퇴화시킨다. 사람들은 분명히 누군가의 노동으로 생산된 물건과 환경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미처 그 관계를 실감하지 못한다. 이는 “자신이 먹는 음식이나 소유하고 있는 한정된 수의 물건 하나하나의 정확한 역사와 유래, 나아가서 그 생산에 관여한 사람이나 연장까지 알았을” 시절과는 다른 것으로 “이런 소외 과정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경이, 감사, 죄책감을 경험할 수많은 기회를 박탈당한다.”

혹은 자신의 일에 대한 책임감, 윤리의식을 박탈당하기도 한다. 종교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집단이 클수록 전체 인간집단에서 스스로를 이기적으로 표현하며, 공동의 지성과 목적에 도달하기는 어려워지고, 불가피하게 순간적인 충동 및 직접적이고 무반성적인 목적들과 연계를 맺게 된다”고 했다.

‘세계화’는 이런 현상을 극단화했다. 세계로 수출된 중국산 멜라민 식품이 상징적 예가 아닐까. 이 거대한 문명 속에서 우리는 아는 사람을 위해 의자를 만드는 즐거움이나 어떤 땅에서 나와 누구의 손을 거쳤는지 짐작할 수 있는 빵을 먹는 안정감 같은 소박함은 잃은 지 오래다.

여섯째, 우리 삶이 고단한 것은 일시적인 경제 위기 탓일까

자본주의의 역사는 풍요로운 문명을 건설했지만, 한편에서는 모든 삶의 가치가 자본화되는 부작용을 낳은 것이 사실이다. 일에 부여되었던 다양한 가치와 의미는 경제적 효용에 상당히 잠식되었다.

강수돌 교수는 오늘날 “자본주의가 우리 삶을 규정하고 있다”면서 지금의 고단함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사실 사람들은 경제가 좋으면 좋은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힘겨운 삶을 산다. 그러다가 경제가 ”위기“로 접어들면 해고나 실직을 경험하면서 절망에 빠진다. 이런 점들을 그저 당연시하거나 무시할 것이 아니라 제대로 짚어 봐야 한다. 그래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이런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예컨대, 도대체 우리는 우리 자신과 더불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세상 일이, 그리고 우리 삶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자본을 넘어, 노동을 넘어>)

일자리가 사라지는 징후, 체제가 변화한다는 예언들은 기존의 일에 대한 불안과 집착을 부풀린다. 생존의 절박함 앞에 일에 대한 일상적인 성찰은 어려워진다.

그러나 개개인이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는 사이 사회는 “갈수록 모든 삶의 활동들을 노동으로 변환시키는 경향”이 있다. 강수돌 교수는 “자본이 우리 삶 전체-비단 생물학적 의미뿐만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정신적 과정으로서의 삶 모두-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먹고 산다’.”고 말한다.

일에 대한 생각이 결국 삶의 방식에 대한 것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더더욱 지금은 일에 대한 상식을 본격적으로, 주체적으로 의심해야 할 때다. 경제 위기로 기존 자본주의의 한계가 드러난 바람에 새로운 삶의 방식이 요청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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