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생각한다] '살림의 경제학' 저자 강수돌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교수일이 단순히 밥벌이 수단 아닌 자아실현과 삶의 질 높이는 과정돼야

“문제는 과연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더불어 건강하게 살 수 있을까, 이다.”

강수돌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교수에게 모든 연구의 출발점은 ‘일하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길에 관한 물음’ 이었다. 노사관계 연구에서 초점은 눈앞의 이해 조정을 넘어 삶의 질 개선에 맞춰져 있었다. 그가 최근 생태성을 접목한 새로운 사회경제 체제를 주창하는 것도 그 연장선이다.

현재의 자본주의 시스템, 경쟁과 이윤을 동력으로 하는 ‘돈벌이 경제 시스템’ 하에서는 일을 한다는 것이 환경은 물론, 인간관계와 자신의 내면을 ‘죽이며’ 단순한 노동력으로 동원되는 결과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올해 초 나온 <살림의 경제학>은 미국식 금융자본주의의 몰락과 중국산 멜라민식품 파동 등 돈벌이 경제 시스템의 파국에 부쳐 강수돌 교수가 내놓은 대안적 경제 시스템의 안내서다. 마하트마 간디의 자립·자치 경제인 ‘스와데시’, 이반 일리히의 ‘토착적 생계’, 김지하의 ‘살림의 미학’, 바바라 브란트의 ‘총체적 삶의 경제학’ 등을 밑거름 삼아 구상한 이 지속가능하고 자율적·호혜적인 시스템 속에서는 일도 “단순한 밥벌이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자아실현이자 삶의 의미를 드높이는 과정”이다.

조치원 신안1리 마을 이장이자 ‘사회공공연구소’ 소장으로 살림의 경제를 실천하고 알리는 데 힘쓰고 있는 강수돌 교수에게 한국사회에서 일과 삶에 대해 물었다.

한국사회에서 일반적인 일의 방식, 또 일에 대한 생각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한국사회 구성원들이 일과 맺는 관계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아무래도 ‘주객전도 현상’이겠죠. 우리 모두 행복하게 살기 위해 일을 해야 하는데, 오히려 일을 위해 모든 삶을 희생하고 있잖아요. 그러다 보니 인격체로서 삶의 주체가 되어야 할 사람이 노동력, 일개의 생산요소로서 대상화되어 버렸습니다.

진리탐구의 주체여야 할 대학생들이 스스로를 미래의 노동력으로 대상화하고 ‘스펙’ 쌓기에 바쁜 현상이 그것을 대변하죠. 1980년대나 지금이나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긴 노동시간, 높은 산업재해율 등은 한국사회 전체가 주객전도되었음을 일러줍니다. 이렇게 사람이 일과 건강한 관계를 맺지 못하면, 삶의 질이 엉망이 되고, 일의 능률도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경제 시스템에 대한 문제 의식이 그 심각성에 비해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크게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우선 역사적으로 한국사회는 일제 식민지 경험과 해방 이후 사회갈등, 한국전쟁 등의 폭력적 과정을 거치며 많은 집단적 상흔을 입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강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강자와의 동일시’가 나타났습니다.

“세계 최고”, “세계 제일” 같은 구호가 개인, 집단, 조직, 사회 전체의 의식을 압도하게 되었습니다. 경쟁력과 노동 효율을 높이기 위해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지금 자신이 달려가는 길을 들여다볼 시간도 없고, 감수성도 마비되었죠.

사회적으로는 가정과 학교, 직장, 언론 등 모든 삶의 영역에서 ‘경쟁의 내면화’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가 대를 이어 전승되고 있지요. 부모들은 자식의 성공과 출세를 위한 뒷바라지에 인생 전체를 ‘희생’하고 그 대신 자식들에게 성과 압박을 가하고 있습니다.

사회 구성원이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니 경쟁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삶이 힘들어질 수밖에 없지요. 마침내 사람들은 본연의 느낌, 생각, 행동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살아가기보다 내면을 억압한 채 겉으로만 화려한 성과를 내기 위해 쫓기듯 일하며 살고 있습니다. 살아 있되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점에서 ‘좀비’ 같다고 할까요. 삶과 사회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하기가 어려운 까닭입니다.

삶에서 일의 의미와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까요.

‘자아실현’과 ‘사회공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내면에 개성과 잠재력, 끼를 지니고 있죠. 이것을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자유롭게 밖으로 드러내고 키워내는 것이 올바른 교육이고 배움입니다. 그래야 자아실현을 할 수 있고, 참된 행복도 맛볼 수 있죠. 나아가 자신의 능력을 사회공헌에 발휘할 때 자아실현은 더욱 완전해집니다.

사람들은 사실, 신고전파 경제학이 가정하듯 이기적이거나 계산적으로만 행동하지는 않습니다. 한편으로는 옳고 선하고 의미 있는 가치에 헌신하며 살기도 하죠. 이런 모습을 인도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티아 센 교수는 ‘사회적 커미트먼트(social commitment)’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어떤 기준으로 어떤 일들을 선택해야 할까요.

우선 ‘과연 내가 가장 신바람나게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부단히 던지고 내면에서 솔직하게 느껴지는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른바 ‘필(feel)’이 꽂히는 것이 중요하죠. 여기서 우리는 함정에 잘 빠집니다. 분명 내면의 ‘필’이 호소하고 있는데도 “아니야, 그렇게 가면 돈벌이가 안 돼, 먹고 살기 힘들어” 혹은 “남들 눈에 좀 창피할 것 같아, 폼이 안 나” 같은 식으로 억압합니다.

가족, 친구 등 주변의 지지와 격려도 중요한 역할을 하겠죠. 이렇게 자아실현을 위한 길을 선택한 후 그 길이 자신에게, 동시에 사회에 좋은 결과를 내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다시 고민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유기농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일, 숨 쉬는 집을 짓거나 천연염색으로 생활한복을 만드는 일, 감동적인 동화책이나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일, 생협을 조직하는 일, 참된 배움을 시도하는 대안교육 운동을 하는 일, 마을공동체 만들기 등이 제가 지향하는 살림의 경제 시스템에서 자아실현과 사회공헌을 동시에 이루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살림의 경제학>에서 일중독과 소비중독이 무한한 ‘돈벌이 시스템’을 지탱하는 두 가지 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병리현상을 치유하기 위해서 사회 분위기가 어떻게 바뀌어 나가야 할까요.

우선 우리가 그런 병리현상에 빠져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지금 사회 분위기는 일중독이나 소비중독을 큰 문제로 보고 있지 않아요. 심신이 병들어 가는데도 “우리는 아프지 않다”고 항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의사 입장에서 보면 가장 치료하기 곤란한 환자인 셈이지요.

2007년에 <일중독 벗어나기>라는 책을 냈는데 안타깝게도, 사회적을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일중독을 문제 삼는 것을 불편하게 느끼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대부분 “일자리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다. 일중독자가 되더라도 일을 실컷 해봤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생각하니까요.

이것을 바꾼 후에는 이런 병리현상의 원인, 또는 뿌리가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독서와 토론이 필요하죠.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길을 찾으려면 사회적 차원에 주목해야 합니다. 일중독은 근본적으로, 조건 없는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해 공허해진 내면을 다른 것으로 채우려는 시도 때문에 생긴 질병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릴 때 어른들로부터 조건 없이 듬뿍 사랑을 받아야 하는데, 늘 부모님의 기대를 충족시켜 효도하기 위해 공부에 몰두하며 자랐기 때문이죠.

소비중독은 일중독에 빠진 사람이 그 공허한 내면을 또 다른 것으로 해결하기 위해 시도하는 선택이고요. 이렇게 원인을 파악하면, 이제 새로운 선택을 해야죠. 예를 들면, 일과 새로운 관계 맺기, 삶과 일의 균형 찾기,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우선순위로 정하고 적절한 수준에서 조절하기, 검소하게 살기 등이 선택지가 될 수 있겠죠.

좀 더 느긋하게, 좀 더 간소하게 살되 좀 더 깊이 느끼고, 온몸을 살아가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