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속 패션계 인사들] 전문적 지식·호감주는 외모·끼있는 패션인 인기… 수요 급증
|
<방망이 깎는 노인>을 기억하는가? 사춘기 청소년들에게 장인 정신이라는 네 글자를 새겼던, 서비스 정신도, 좋은 목을 확보하는 노력도 없이 오직 잘 깎은 방망이 하나로 승부하던 그 노인. 그가 만약 ‘생활의 달인’ 카메라 앞에 섰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덧붙여 말로만 듣던 방망이 노인이 의외로 꽃중년에 달변가임이 밝혀진다면? 전국에서 방망이를 사려는 아줌마들로 북새통을 이룰지, 성우의 경망스러운 말투 때문에 장인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며 소송이 붙을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방망이 업계의 마케팅 전략에 변화가 생길 거라는 사실.
재미있는 또는 재미있어야 하는
<대중문화 이유 있는 편들기>의 저자 김연수 교수에 따르면 최근 대중문화 코드의 키워드는 축제다. 하버드 대학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과목으로 ‘행복학’이 떠오른 것처럼 분야를 막론하고 즐거움을 원하는 시대다. <박중훈 쇼>는 망하고 <무릎팍 도사>는 오래 간다. 누가 출연하든 무슨 얘기를 주고 받든 일단 재미 있고 봐야 한다. 패션도 예외는 아니다.
패션이 문화의 중심부로 진입하면서 패션계 인사들의 TV 출연이 점점 더 잦아지고 있다. <무한도전>을 이끄는 김태호 PD는 개인적으로 패션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패션을 주제로 한 에피소드가 유독 많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출연진을 동대문에 풀어 놓고 10만원으로 스타일링을 하게 한 뒤 점수를 매기기도 하고 디자이너 이상봉 쇼에 모델로 세우기도 했으며(덕분에 시청률 30%에 육박하는 프로그램에 처음으로 서울 컬렉션이 노출됐다) 최근에는 케이블 방송의 디자이너 발굴 프로그램을 패러디한 <프로젝트 런어웨이>에서 멤버들에게 직접 옷을 만들게 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어김 없이 패션계 인사들이 카메라 앞에 섰다. 이상봉 디자이너는 패션쇼 무대 뒤에서 출연진과 함께 가발을 쓰며 웃었고, 남성 패션지 아레나 옴므 플러스의 박만현 기자는 멤버들의 패션 감각과 함께 친절하게 유재석의 다리 털 모양까지
지적해 주었다
케이블 TV의 패션 관련 프로그램을 들여다 보면 거의 패션업계 종사자들의 반상회 수준이다. 시즌 1의 성공으로 현재 시즌 2 제작에 들어간 온스타일의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에는 홍익대 패션디자인과 간호섭 교수가 디자이너들의 멘토 역할를 맡았고 심사위원에는 앤디앤뎁의 김석원 디자이너와 패션지 엘르의 신유진 편집장 등이 출연했다.
엠넷미디어의 <트렌드 리포트 필>에는 하상백 디자이너가 리포터와 혼동될 정도로 활달한 입담을 보여줬고, 에스콰이어 지의 심정희 기자를 비롯해 수많은 스타일리스트들이 패널로 출연했다. 소위 패션 채널로 분류되지 않는 XTM에서도 최근 <남자의 스타일, 옴므>라는 프로그램을 기획하며 국내 최고의 스타일리스트 정윤기를 사회자로 내세웠다.
당신은 연예인입니까?
패션 전문가들의 방송 출연은 프로그램의 완성도를 높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들은 제작진이 자료 수집에 투자해야 하는 시간과 노력을 대폭 줄여준다. 스타일리스트가 출연할 경우 비교적 쉽게 연예인들의 정보를 들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출연하는 쪽에서도 카메라 앞에 나서는 일이 좋으면 좋았지 나쁠 건 없다는 입장이다.
전문가의 권위가 떨어질까 봐 출연을 고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문제는 역시 ‘재미있는가’다. 현재 방송에 출연 중인 패션 관계자들은 전부는 아니지만 업계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오른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온스타일 프로그램 제작을 총괄하는 이용렬 팀장의 말대로 “외모나 말솜씨도 중요하지만 전문성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권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정보의 질에 크게 차이가 없을 때 ‘재미 있는가, 없는가’라는 문제는 상대적으로 더 크게 다가온다. 아무리 유익한 패션 지식이라 해도 재미가 없으면 전달 과정에서 막힌다. 우물거리는 말투보다는 이왕이면 밝은 표정과 경쾌한 목소리가 좋고 여기에 재치와 논리가 있으면 더욱 귀에 쏙쏙 들어와 박힌다. 얼굴까지 잘 생기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즐거움을 야기하는 요소는 단순히 유머만이 아닌 것이다.
혹자는 이상봉 디자이너의 무한도전 출연을 두고 “아주 유효한 전략”이라고 평했다. 전문가로서의 카리스마는 지키면서 그 자신이 재미있는 캐릭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프로 개그맨들의 도움을 받아 대중에게 재미있고 친근한 이미지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방송가 PD들이 섭외 1순위로 생각하는 패션 전문가의 조건은 기본적으로 호감을 주는 외모를 가지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 섰을 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쉬운 말로 풀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다. 다혈질, 애교 등 자신만의 캐릭터가 확고하면 더 빨리 주목을 받는다.
업계 최고의 위치를 인정받고 있지만 정작 카메라에 제대로 눈을 맞추지 못해 진땀을 빼는 스타일리스트와 미간에 깊게 새겨진 주름과 현학적인 용어로 분위기를 무겁게 만드는 기자는 안타까운 경우다. 이들은 방송이 본업이 아닌지라 잠깐 스쳐가는 입장이라고 해도 시청자들의 평가를 피해갈 수는 없다. 시청자 평은 게시판에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걸출한 끼와 지식을 겸비한 한 사람에 의해 시청률이 춤을 추기도 한다.
문화 소비의 주역은 10대에서 20대로 넘어갔고 패션은 가장 잘 팔리는 화두가 되었다. 대중과 패션과의 거리를 좁혀줄 패션 전문가들에 대한 수요도 더불어 급증하고 있다. 엠넷 미디어의 이선영 PD는 앞으로 양방 간에 더욱 긴밀한 관계가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한다.
“이전과는 인식이 많이 달라져서 방송 출연을 꺼리는 사람들은 별로 없어요. 오히려 대부분 적극적이죠. 그러나 방송이 원하는 모든 조건을 갖춘 전문가는 흔치 않기 때문에 앞으로는 겹치기 출연이 늘어날 겁니다. 공중파에서 실력 있는 MC가 모든 오락 프로그램을 휩쓸듯이 재미와 전문성을 갖춘 소수의 사람들이 여기저기 얼굴을 비추게 될 거에요.”
연예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자의로 카메라 앞에 선 이상 이들도 대중의 판단의 대상이 된다. TV 속 깊은 인상을 남긴 패션계 인사들은 누가 있을까? |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