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을 이야기하다] 만화·연극·영화 등 오래된 성역에 대한 용감한 시도들 눈에 띄네

<만화 박정희>와 <만화 전두환>(아래)
#1 "오늘도 열심히 일하시느라 수고들 참 많으셨다, 그런 말씀 드리고 싶고요. 전 오늘 고추 땄습니다, 홍천에서. 군인들과 건빵도 먹었고. 어제는 남대문에서 왕만두와 구리 시장에서 오이를 먹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민 행보'담을 들려주는 이 라디오 프로그램은 <안녕하십니까, 대통령입니다>가 아니다. MBC <최양락의 재미있는 라디오>다. 이 프로그램의 한 꼭지로 성대모사를 통해 대통령을 풍자하는 '대통퀴즈'에 이 대통령이 김영삼,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함께 '출연'하게 된 것.

#2. "왜 이렇게 늦었는가?"
"49재를 마치고 오느라고요."
"자네는 성당 다니지 않았나. 그런데 장례식은 왜 불교식으로 치르나. 짬뽕인가?"
"비빔밥이면 어떻습니까. 삶과 죽음이 다 자연의 한 조각인데요."

대화를 나누는 이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짐작할 수 있듯, 사후세계에서다. 지난 17일 서울 서대문아트홀에서 막을 올린 연극 <박통 노통>이 두 사자(死者)의 만남을 주선했다.

문화의 영역에서 '대통령'은 오랫동안 성역이었다. 군사독재정권 하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 현대사에 대한 정리와 평가 작업이 여전히 진행 중인 근래까지도. 박정희 전 대통령의 피살 사건을 다룬 영화 <그때 그사람들>은 2005년 개봉 당시 상영금지 가처분 소송에 휘말렸고 이승만 전 대통령의 유족이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 드라마 <서울 1945>의 제작진이 법정 공방 끝에 무죄 판결을 받은 것이 겨우 2년 전이다.

연극 <박통 노통>, 영화 <굿모닝 프레지던트>, 성대모사를 통해 전현직 대통령들을 풍자하는 '대통 퀴즈'가 방송되는 MBC 라디오 프로그램 <최양락의 재미있는 라디오>(왼쪽부터)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었던 남자가 희생자들의 유족과 함께 이 모든 비극의 책임자를 암살하려 한다는 내용의 만화 <26년>을 원작으로 한 영화 <29년>은 제작 전부터 '전두환을 사랑하는 모임'의 강한 반발에 맞닥뜨렸다. 논란에 휩싸였던 이 영화는 현재 제작이 중단된 상태다.

그런데 최근 대통령을 언급하는 용감한 시도들이 눈에 띈다. <만화 박정희>, <만화 전두환>에 이어 <만화 김대중>이 출간되었고, 매일 저녁 라디오에서는 전현직 대통령의 목소리가 퀴즈를 풀고 있다. 무대는 돌아간 전직 대통령들 간 만남을 상상하고 로또 당첨, 첫사랑, 결혼 생활 등 우리와 똑같은 문제로 고민하는 대통령들이 등장하는 영화 <굿모닝 프레지던트>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이 대통령들은 어쩌다 문화판을 기웃거리게 되었을까.

한국 현대사 정리 작업의 실마리로서의 대통령: <만화 박정희>, <만화 전두환>, <만화 김대중>

시사만화가 백무현 화백이 2005년 <만화 박정희>를 쓴 배경에는 역사에 대한 위기감이 있었다. 노무현 정부의 지지율이 떨어지고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근혜가 부상하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가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던 것. '박정희 기념관' 건립도 추진되는 중이었다. "역사를 바로잡는 작업은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출발해야 했다. 일종의 아이콘이 아닌가."

<만화 박정희>는 박정희 대통령의 성장 환경과 인간적 면모, 공적 행적과 스캔들을 꼼꼼하게 정리함으로써 그 역사적 공과를 이해하려는 작업이었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는 사실은 출간 당시 위기감이 공공연했음을 입증한다. 백 화백의 2007년작 <만화 전두환> 역시 전두환 전 대통령과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재평가 논의가 활발한 시기에 출간되었다. 일해공원이 도마에 올랐고 영화 <화려한 휴가>, 만화 <26년> 등이 인기를 끌었던 때였다.

세 번째 '대통령 시리즈'처럼 보이는 <만화 김대중>은 역사를 정리한다는 뜻에서 전작들의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방점이 조금 다르다. 정치적 의미로 '대통령'에 접근했던 전작들에 비해 '인간 김대중'에 대한 이해의 폭이 더 넓어진 것. 백 화백 스스로 "대통령이라기보다 사상가, 한국 역사에 드문 행동하는 사상가로서 정리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특정 이슈에 의해 기획된 것도 아니었고,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한 직후 출간된 것도 우연이다. <만화 박정희>와 <만화 전두환>이 각각 2권으로 출간되어 메시지를 집약한 데 비해 <만화 김대중>은 총 5권으로 구성되어 '김대중'이라는 한 '시대'를 서술한다. 여기엔 김 전 대통령의 고향인 하의도의 수난과 저항의 역사, 연애사를 포함해 그가 사랑하고 배신당한 인간 관계까지 포함되어 있다.

백 화백이 '인간 김대중'에 호기심을 느낀 단초는 '선생님'과 '빨갱이'라는 양극단의 평가였다. 이런 정치적 평가로 김 전 대통령과, 그가 '주연'을 맡았던 한국의 현대사를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백 화백은 "김대중의 정치적 노선에 대한 지지 여부를 떠나 그가 꽃과 동물을 굉장히 좋아한다는 사실에 큰 흥미를 느꼈"고 그런 따뜻한 성정이 결국 "생산적 복지 개념, 인권위, 여성부 등의 제도"를 구상하고, 정적인 전두환 전 대통령을 용서함으로써 "정치 보복극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보여준 것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빨갱이'라는 딱지가 붙은 것은 정적들의 "공포"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김대중이 집권하면 정통성 없는 군부정권으로서 자신들이 저지른 죄악으로 교수대에 끌려갈 것이라는 조바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런 시선으로 개인사와 사회사를 겹쳐 놓음으로써 <만화 김대중>은 역사 정리 작업이란 단순히 정치적 공방의 연대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특정한 시공간에서 특정한 명칭으로 불리고, 특정한 행적을 남긴 정황과 까닭을 설명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대통령'은 개인이자 제도, 권력이자 한 시대의 상징으로써 이 작업의 실마리가 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대표자 혹은 실존적 존재로서의 대통령: 연극 <박통 노통>

냉전의 상징적 최전선인 한국에서 대통령은 분열과 갈등의 구실이자 무기였던 이데올로기들의 대표자이기도 하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저승에서 만난다는 설정의 연극 <박통 노통>에서 두 전 대통령이 벌이는 설전은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대립 구도의 축소판이다.

그들은 평가가 엇갈리는 역사적 사실들을 파편적으로, 번갈아 말한다. 노 전 대통령이 "10월 유신"이라 말하면 박 전 대통령은 "새마을 운동"이라 말하고, "김종필"이라는 말은 "김대중"이라 받는 식이다. 노 전 대통령이 "광주를 사랑한다"고 말하면 박 전 대통령은 "경기도 광주에 소머리국밥집이 있다"며 딴청을 피우고, 박 전 대통령이 "조·중·동아일보 있어요"라고 외치면 노 전 대통령은 "북한과 남한은 한겨레"라고 선언한다. 순서는 지키되 따로 독백하는 셈이다.

두 가지 의도다. 공정함을 지키려는 것과, 소통 의지 없이 각자의 주장만 내세우는 이데올로기적 대립 현상 자체를 풍자하려는 것. 이런 '부조리'는 두 전 대통령이 시소를 타는 장면에서 극대화된다. 그들은 번갈아 오르내리며 각각 개 짖는 소리와 고양이 우는 소리를 낸다.

그러다 한 순간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명제에 둘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데, 이것이 화해의 시작이다. "일하는 사람의 술"인 막걸리를 주고받으며 박 전 대통령과 노 전 대통령은 인간적인 회한을 털어 놓는다. 고향을 그리워하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에 젖는다. 서로 애창곡을 바꿔 부른다. 박 전 대통령이 '아침이슬'을, 노 전 대통령이 '황성 옛 터'를 부르더니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를 합창한다.

나상만 연출가는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한 지난 5월 이 연극을 구상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피살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의 대비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사회는 다시 분열되려 하고 있었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재연되려는 참이었다. 나상만 연출가는 두 전 대통령의 만남을 통해 용서와 화합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 그것이 문화예술의 사회적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두 전 대통령의 개인적 비극을 민족의 비극, 시대의 비극, 인간 보편의 비극으로 해석함으로써 인간이 무엇이고 평화롭고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자 했다.

극의 막바지에 박정희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은 각각 줄리어스 시저, 햄릿의 대사를 읊는다. 인간의 허망한 야욕과 실존적 고뇌가 교차하는 장면이다. 권력 구조의 꼭대기에 올랐지만 그 대가로 인간다움의 어떤 부분을 포기했고 몸소 인생의 허무를 보여준 한국 '대통령'들이 문화예술의 고전적인 모티프가 된 순간이기도 하다.

땅으로 내려온 대통령들: 영화 <굿모닝 프레지던트>, 라디오 프로그램 '대통 퀴즈'

아예 땅 위로 내려온 대통령들도 있다. 다음 달 개봉하는 영화 <굿모닝 프레지던트>에 등장하는 대통령들의 고민은 아주 '평범한' 것들이다. 로또 1등에 당첨되었지만 "당첨되면 모두 기부"하기로 한 국민과의 약속 때문에 당첨금을 찾으러 가지 못하고 끙끙 앓는 대통령, 한국 역사상 최연소로 청와대에 입성할 만큼 카리스마를 타고 났지만 첫사랑 앞에서는 소심해지는 대통령, 청와대에 적응하지 못한 남편이 갖가지 문제를 일으켜 이혼할 위기에 처한 여성 대통령이 나온다.

시나리오와 연출을 맡은 장진 감독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그 생활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 사람이 대통령"이라는 점에 착안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 한국사회에서 유난히 특별한 '대통령'의 권위에서 자유로운 이 코미디 영화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사실은 흥미롭다.

이제 대통령도 사랑 받기 위해 국민의 눈높이에서 노력해야 하는 시대임을 반영하는 것일까. 지난 16일 저녁 MBC 라디오 프로그램 <최양락의 재미있는 라디오>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국민들이 즐겁기만 하다면 우리는 이 세상 최고 바보가 되어도 좋다"는 폭탄 발언을 했다.

하지만 '우리'의 합의를 거치지 않은 이 독단적인 발언은 곧장 반발을 불러 왔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본인은 그거 싫다"는 의지를 표명했고 이명박 대통령은 "전 이쯤에서 빠지면 어떨까"하는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이런 의사 표현과는 달리 대통령들은 출연 시간 내내 국민의 기대에 부응했다. "프로야구에서 크게 한 방 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김 전 대통령은 "구라", 노 전 대통령은 "사기! 본인은 많이 쳐봤어", 이 대통령은 "대박"이라 답하며 개성을 뽐냈다. 물론 이들의 목소리는 DJ 최양락과 배칠수의 합작품이다.

힘을 보탠 이들은 또 있다. 청취자들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로 장수 코너였던 '3김 퀴즈'가 폐지되자 "후속편을 만들어달라"는 열화와 같은 요청으로 '대통 퀴즈'를 만들어 낸 것. 이 프로그램의 주승규 PD는 인기 비결에 대해 "한국 국민들의 정치적 관심이 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대통 퀴즈'는 특히 40~50대 남성들에게 사랑 받고 있다.

지금 한국의 문화는 대통령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역사와 인간을 보고 있다. '대통령'이라는 '구조적 개인'에 접근하는 스펙트럼이 그만큼 넓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국민'의 인식 속에서 한국 대통령의 '제왕적' 권위가 사라지고 있다는 점에서 탈정치적 현상이기도 하고, 이 바탕에는 오히려 "한국 국민들이 정치에 거는 큰 기대"(주승규 PD)가 있다는 점에서는 정치적 현상이기도 하다.

어느 쪽이든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이끌고 헤쳐 나온 대통령들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캐릭터임에 틀림없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