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책의 미래인가] 풍부한 콘텐츠 DB·독자 편리한 플랫폼 등 구축 위해 시간 필요

소니 리더 데일리 에디션
전자잉크(e-ink)를 채용한 전자책 전용 단말기가 국내에서도 속속 출시되고 서비스가 확대되면서 본격적인 전자책 시대가 개막되었다고 한다.

출판사들이 모여 디지털 콘텐츠 관리회사를 설립하는가 하면 인터넷서점 각사가 단독 혹은 연합 형태로 전자책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장기적으로 볼 때 전자책을 비롯한 디지털 방식의 출판이 점차 위력을 발휘할 것이기에 당연한 움직임이다. 기업들로서는 수익 다각화 차원에서도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고, 이미 교육 관련 분야에서는 디지털 콘텐츠 사업에서 상당한 실적이 나타나고 있다.

이에 따라 지난 10년간 주로 B2B(도서관 등 기관구매자 대상 판매)에 의해 독자가 컴퓨터로 전자책을 읽던 방식에서, 이제는 B2C(개인구매자 판매)에 의해 휴대용 전용 단말기로 독서하는 문화가 확산될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근래 발표된 자료나 뉴스를 보면 지나칠 정도로 전자책의 미래를 낙관하거나 부풀리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특정 기업들의 전략적인 전망치가 마치 현실화될 것처럼 포장된다.

애플의 칵테일 프로젝트
이를테면, 3년 뒤에 국내 전자책 시장의 규모가 2조 원대를 돌파할 것이라는 황당하기조차한 예측이 언론을 통해 유포되고 있다. 종이책 시장이 고사하고 그것을 대체하는 전자책 문화가 만들어지지 않는 한 수년 안에 그 정도의 새로운 출판시장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물론 삼성전자를 비롯한 대기업들과 주요 이동통신사, 인터넷서점, 포털 사이트 등이 합종연횡을 거듭하면서 독자적인 휴대용 전자책 단말기를 선보이거나 새로운 수익모델을 제시하는 등 종전과는 확실히 다른 산업 지형도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글로벌 대기업이나 주요 유통업체들이 참여한다고 해서 마치 시장이 이미 형성된 것처럼 예단하기는 어렵다.

여러 이유로 인해 전자책 문화가 만들어지기까지는 앞으로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전망이다. 전자책으로서 정합성이 높은 풍부하고 매력적인 콘텐츠 DB, 독자에게 편리한 플랫폼, 저렴하면서도 컬러 표현이 가능한 전자종이·전자잉크 단말기, 접근성 높은 콘텐츠 가격, 독자의 매체 선호도 변화, 우리 출판에서 비중이 높은 외국 번역서에 대한 전자책 판매권 확보 등 까다로운 조건들이 충분히 갖추어졌을 때 비로소 본격적인 '전자책 시장의 이륙'을 예상할 수 있을 터이다.

현재는 무엇보다 현재 독자들이 읽고 싶은 책을 맘껏 선택해 읽기에 충분한 콘텐츠 풀(pool)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 국내 최대 서점에서 판매중인 종이책이 50만 종 정도인데 비해 전자책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은 5만 종이 안 된다. 더구나 근년에 국내에서 발행되는 신간의 3분의 1 정도가 외국 번역서이지만, 이들 책을 전자책으로 서비스하기 위한 전송권을 해외 저작권자로부터 확보하기 어려워 원천적인 접근조차 어렵다.

30만 원이 넘는 휴대용 전자책 단말기 가격이나 종이책에 대한 독자들의 선호도 감소가 뚜렷하지 않은 것도 전자책의 급성장을 점치기 어렵게 한다. 능동적 집중력이나 가독성이 필요하지 않은 오디오(청각) 및 비디오(영상) 콘텐츠는 매체 변화가 신속하게 가능했던 반면, 종이책에서 전자책으로의 독서 수단 변화는 매우 이질적인 것이다. 오랜 기간 인간의 몸에 밴 독서문화의 습성이 그렇게 쉽게 바뀌기는 어렵다.

결국 현재의 상황을 보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채 '시대의 흐름'과 '아마존닷컴의 성공 사례'를 앞세운 기업 논리만이 앞서가는 형국인 듯하다. 시장 선점이 중요한 IT기업들의 전략과 수요자인 독자의 입장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밀레니엄 전환기를 맞아 디지털 담론이 무성했던 10년 전에도 지금 못지 않은 전자책 열풍이 있었지만 개인 수요자들의 요구를 거의 충족시키지 못한 채 걸음마 수준에 머물러 왔다. 구체적인 시장 형성의 조건들이 거의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미국 아마존닷컴의 '킨들' 단말기만 해도 전자책뿐만 아니라 다수의 유력 일간지와 잡지 등을 인쇄매체의 40퍼센트 안팎의 가격에 구독할 수 있다는 점이 수요자를 사로잡은 배경의 하나로 알려지고 있다. 순수한 전자책 콘텐츠만의 승부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에서 독특하게 발전한 '휴대전화 전자책' 역시 저렴한 정보통신료와 같은 인프라 측면 못지 않게 만화나 휴대폰 소설 장르의 오락 콘텐츠가 젊은층의 지지를 받았기에 가능했다.

100만 대가 팔렸다는 '킨들'이 최고의 비즈니스 모델로 가장 '성공'한 전자책 단말기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때의 '성공'은 매우 제한적인 의미로 사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 미국 인구 대비 보급률이 0.5%도 안 되는 비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자책 전용 단말기'는 디지털 환경에서 최적의 전자책 독서 매체임에 틀림없다. 만약 멀티미디어 복합 단말기에서만 전자책을 읽을 수 있다면, 분명 다른 영상·오락 콘텐츠에 밀려 새로운 독서매체 기능을 발휘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복합매체의 스크린 위에서 영상·오락 매체와 경쟁해야 하는 텍스트 중심의 출판 콘텐츠는 발전 전망이 매우 어두울 것이다.

디지털출판, 디지털독서의 화두가 현실의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런 가운데 디지털 기술의 발전이 활자문명의 위기를 촉진시킴으로써 머지않아 '구텐베르크의 은하계'가 끝날 것이라는 비관론이 있는가 하면, 정반대로 디지털 기술에 의해 책이 재발견되고 책의 가치가 다양한 형태로 극대화될 것이라는 낙관론도 있다.

굳이 분류하자면, 전자는 단선적 기술(매체)결정론이고 후자는 융합적 기술(매체)관계론이다. 중요한 것은 매체 형태의 변화가 아니라 콘텐츠 유통 방식의 변화라는 점이다. 콘텐츠 전달 방식이 어떠하든 여전히 언어·문자 기반의 소통을 근간으로 하는 책은 '무엇을'을 공통분모로 하되 '어떻게'(플랫폼)의 변화가 가속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프랭크 웹스터 교수가 <정보사회이론>에서 언급하듯이, 정보사회를 이전 시대와 단절된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의 사회인 것처럼 오인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종이책에서 전자책으로의 변화라는 외형적인 매체 변화에 주목하는 것 못지 않게 얼마나 풍부한 전문 콘텐츠가 생산-유통-소비되는지, 사회적인 독서환경 조성은 얼마나 되어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요청되는 시기인 듯하다. 종이책도 읽지 않는 사람들이 전자책을 읽을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