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폭력을 성찰하다] 영화·문학·미술 등 기록으로 감성으로 상징으로 재조명

조두순 사건으로 한국사회가 들끓고 있다. 처참한 사건의 전말 자체가 충격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피해 어린이가 "범인을 처벌하고 싶은 마음을 표현했다"며 그린 그림 한 장이다. 그림 한 장은 때로 어떤 '팩트(fact)'서술보다 우월하게 사실을 극적으로 나타내고 마음을 움직인다.

우리가 폭력을 다룬 예술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는 이유다. 성폭력을 예로 들어보자. 언론의 렌즈를 따라 함께 흥분하고 가해자에 더한 형벌을 내린다. 법과 제도를 개선한다. 과연 성폭력은 사라질까. 대중은 뜨겁게 끓어올랐다 금세 식는다.

예술은 주류 담론 시장에서 지속가능하지 않은 폭력에 대한 사회적 성찰을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좋은 장이다. 무엇보다 정치, 사회, 경제부문에서 해결할 수 없는 사회적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소프트 파워'가 있다.

이들은 막연히 '폭력은 나쁘다'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공권력에 의한 폭력의 문제, 사회적 약자가 저항 수단으로 사용하는 폭력의 정당성, 개인의 폭력에 드러난 계급갈등과 불평등 문제까지 제기한다. 드러난 폭력을 단죄하는 것은 사회부문이지만 근본적 성찰을 하는 공간은 문화다.

최근 인터넷에는 뱀이 토끼를 잡아먹는 동영상이 올라오기도 했다. 여중생 폭행 동영상도 검색순위 상위에 있었다. 오늘도 끊이지 않고 등장하는 폭력적 내용의 UCC를 법과 제도, 이성만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구조적 억압과 광기에 대한 막연한 공포, 그로 인해 나타나는 폭력에 대한 철학적 성찰까지도 문화라는 장은 소화할 수 있다. 이를 진흥하는 게 곧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길일 수 있다. 문화의 성찰은 사회의 성숙에도 기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폭력에 관한 예술이 역설적으로 폭력을 성찰하느냐, 상업적으로 이용할 뿐인가라는 논란도 끊이지 않는다. 아무리 순수예술이라도 상업성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문화예술은 지금 약자의 유일한 무기라는 '기억', 공포를 뛰어넘는 인문학적 '감성', 상징으로 저항의 폭력을 '재조명'하는 방법으로 폭력을 성찰하고 있다.

기록으로 '기억'하는 영화, 폭력의 상업적 이용도

영화는 '기억'의 수단으로 폭력 사건을 약자의 시선에서 재생한다. 시간이 지난 뒤 폭력을 재생함으로써 이를 기록하고 기억하게 하는 것이다.

지난달 개봉한 <이태원 살인사건>은 서울 이태원동 버거 킹에서 1997년 실제 벌어진 미 군무원 자녀 아더 패터슨(당시 20)과 재미교포 에드워드 K. 리가 연루된 살인사건을 재생한 것이다. 영화 <추격자>(2008)는 유영철 사건을 각색해 성폭력 문제의 기록과 기억을 시도했다. <그놈 목소리>(2007) 역시 범인을 잡지 못한 1991년 유영호 어린이 유괴살해사건을 재생했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잠깐 이슈가 됐다 잊혀지는 충격적 폭력을 재생해 사회적 경감심을 일으키게 한다. 뿐만 아니다. <상계동 올림픽>이나 <송환> 같은 다큐멘터리 영화는 사회적 약자•정치적 타자에 대한 공권력의 폭력을 그대로 기록함으로써 문제제기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의 오락적 성격은 폭력을 상업적으로 이용할 뿐이라는 지적도 높다. 영화 <1번가의 기적>(2007)이나 <홀리데이>(2005)도 폭력을 다뤘지만 시간성을 거의 배제하는 방식으로 폭력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에서 멀어지게 한다.

문제는 이들 영화가 개별적 폭력 서사에 집중하지만 폭력을 낳은 사회구조에 대한 성찰과 언급은 뉘앙스 정도만 남기고 떠난다는 것이다. 이는 할리우드 영화의 문법을 따라갈수록 더 심화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2007)는 자본주의의 제3세계에 대한 폭력과 수탈 문제가 근저에 있지만 시간과 공간을 거리감 있게 처리했다. 이는 영화의 서사가 동화적으로 받아들여지도록 유도한다. 영화에 낭자하는 선혈은 폭력에 대한 성찰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영화의 상업적 성공을 위한 것이라 비판 받는다. 공진성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교수에 따르면 이는 텍스트만 놔둔 채 맥락은 빠뜨리는 수법이다.

강유정 영화평론가는 "영화가 갖고 있는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인 재생을 통한 기억과 기록은 잠깐 이슈가 됐다가 잊혀지는 폭력문제에 대한 각성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면서도 "선정성은 영화의 어쩔 수 없는 속성의 하나이기 때문에 폭력자체를 보여주는 데 집중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가장 먼저 아파하고 가장 늦게까지 아파하는' 문학

'살갗이 얇아 가장 먼저 아파하고 가장 늦게까지 아파한다'는 문학은 사실주의 시대의 즉시적 반응보다 한 차원 높은 은유와 에둘러 말하기의 방법으로 폭력을 서사하는 단계에 와있다.

즉시적인 반응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중작가인 공지영은 청각장애아를 상대로 한 성폭력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 <도가니>를 지난 6월 펴냈다. 김지하 시인은 지난 4월 발표한 <촛불, 횃불, 숯불>에서 촛불정국에서 보인 국민의 응집력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저항 폭력의 부당성을 비판하기도 했다. 전문작가는 아니지만 조혜원 씨를 비롯한 15명의 활동가는 용산 참사를 기록한 르포문학 <여기 사람이 있다>를 지난 3월 펴냈다.

이는 과거의 방식인 게 사실이다. 군부독재 시절의 사실주의 문학은 공권력에 의한 폭력을 직설적으로 재현하고 기록했다. 소설 <태백산맥>,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은유의 차원에서 언어 자체와 징후적인 내용으로 폭력을 다룬 문학이 좀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추세다. 김형중 문학평론가에 의하면 폭력을 표현하기 위해 '폭력'이라고 쓰는 방식이 아니라 언어의 질감을 통해 표현하는 식이다. 이영광 시인은 '유령3'라는 시에서 용산 참사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고도 시적 언어로 공권력 폭력에 대한 비판을 은유했다.

소설에서는 폭력 사회의 광기와 이에 대한 공포, 무력감이 드러난다.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2008)는 조선인으로서 경계인의 삶을 살았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은유적으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우리사회의 폭력을 비판한다.

작가의 무의식에 드러나는 폭력은 국가의 폭력을 뛰어넘어 우리사회 전체의 원한이나 대중의 폭력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한 사회구조상의 억압과 불만의 징후가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편혜영의 소설 <아오이 가든>(2005)에서는 동물과 사람이 시체로 돌변해 자기가 죽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돌아다니는 사회를 그린다.

함돈균 문학평론가는 "과거의 리얼리티 문학은 정치적 폭력 등을 직접적인 재현방식으로 다뤘지만 지금은 작가의 무의식에 잠재된 폭력을 에둘러 표현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며 "억압과 불만에 의한 폭력의 기운이 한국의 대중사회에 넘쳐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신형철 문학평론가도 "문학은 사람들이 잘 인지하지 못하는 일상적이고 미세한 폭력에 의미를 부여해서 우리가 잘 모르는 폭력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며 "역사적 폭력이 시간이 지난 뒤에 법적으로 해결됐다 하더라도 개인의 내면에 남기는 상처는 오래간다는 면에서 문학이 뭔가 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고 말했다.

상징으로 폭력 '재조명'하는 미술

미술에서는 연이은 공권력에 의한 폭력을 비판하는 참여예술이 나타나고 있다. 또 사회적 약자의 저항 폭력을 정당화해 폭력사용의 정당화 메커니즘에 있어 새로운 논박을 시도하고 있다.

용산 참사 현장인 남일당에서는"여기 사람이 있다"고 외치는 철거민의 모습을 그린 이윤엽의 판화작품을 비롯해 전미영, 전진경 등의 대형 걸개그림 등을 전시한 <끝나지 않은 미술제>가 열리고 있다. 이들의 작품은 용산참사 희생자의 얼굴을 그린 것이거나 용산 철거 마을 풍경 등을 그린 것, 이명박 정권을 비판하는 그림, 철거 현장사진 등이다.

서울 종로구 견지동 space*space에서는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의 '망루전'이 계속되고 있다. 이 전시에는 용산참사 당시 남일당의 모습 등을 구조화한 미술작품, 노동운동의 상징인 '골리앗(크레인)' 투쟁을 그린 미술품, 촛불시위 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

이들은 공권력에 의한 폭력을 비판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저항 폭력의 정당성을 주장해 폭력에 관한 철학적 논쟁을, 예술을 도구로 촉발하고 있다. 폭력의 정당화에 대한 철학적 논의에서 주류 담론 시장에서 배제된 사회적 약자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폭력의 선동이라는 비판과 예술의 저차원성 논란을 빚고 있기도 하다. 현대미술은 폭력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단계에서 상징화를 방법으로 수용자의 체험을 유도하는 단계에 와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직접적으로 내지르기보다는 수용자가 스스로 성찰하도록 유도한다.

영국 현대미술가 데미안 허스트는 소를 도살한 뒤 잘라 포름알데히드에 담그는 시각적 방법으로 폭력을 표현했다. 강수미 미술평론가에 따르면 이는 선정적 반응만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동물에게 가하는 물리적인 폭력, 죽음의 문제 등을 떠올리게 하는 상징화다. 아픈 곳이 아프다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보다 예술적 표현의 차원이 높다고 볼 수 있다.

심상용 동덕여대 예대 교수는 "예술에는 원래 상처를 쏟아내는 하수구 같은 역할이 있기 때문에 그런(사실주의) 미술도 필요하다"면서도 "미술이 좀 더 고도의 의미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직설적인 표현들을 조절해야 선정성만을 추구하는 외설과 구분되는 경계 짓기가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청환기자 ch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