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의 화려한 복귀] 예뻐지고 맛있어져 젊은 층, 여성 고객 사로잡아

막걸리를 마시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우리 것을 사랑하는 불타는 애국심? 이튿날 찾아올 두통에 대한 각오? 노땅 취향이라는 비웃음을 무시할 수 있는 굳은 심지? 막걸리를 마시는 데 이런 것들은 필요 없어졌다. 이제는 그냥 맛있어서 막걸리를 마신다.

한국의 트렌드 발신지 강남에서 가장 예민한 촉수를 지닌 사람 중 한 명인 황의건 오피스 h 이사의 말에 따르면 최근 막걸리의 유행은 모든 조건이 우연히도 맞아 떨어진 결과다.

"처음엔 쌀 소비 촉진을 위해 정부에서 바람을 잡은 측면이 확실히 있었어요. 하지만 바람을 잡는다고 해서 전부 유행이 되는 건 아니죠. 6도 이상으로 제한되던 막걸리 도수가 3도 이상으로 완화되고 저급한 막걸리가 나올 수밖에 없던 환경들이 바뀌면서 정말 막걸리가 좋아서 마시는 사람들이 늘었어요."

굳이 원인을 찾는 것이 의미 없을 수도 있다. 부동산이 아파트와 주택, 빌라에 골고루 햇살을 비추듯이 주류 역시 돌아가면서 조명을 받게 마련. 한때 백세주가 잘 나가던 시절에 이어 와인 열풍이 불었고 그 복잡한 이름들 때문인지 잠시 시들해진 틈을 타 복분자와 사케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막걸리 차례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막걸리는 와인이나 사케처럼 어딘가에서 뚝 떨어진 술이 아닌 5천 년을 우리 민족과 함께 해 온 술이라는 것이다.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막걸리가 한국 주류 시장의 80%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처음 막걸리를 접한 사람이라도 몸 속 어딘가에 숨어 있는 막걸리 DNA가 혀보다 더 빠르게 반응할 수도 있다. 국순당연구소 신우창 박사의 말처럼 막걸리는 "지속 가능한 트렌드"의 가능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1-압구정동 무이무이의 막걸리 2-짚동가리쌩주의 칵테일 막걸리와 로하스 깐풍기 3-생과일즙을 넣은 칵테일 막걸리
막걸리가 한국을 지배했을 때

70년대 막걸리 생산량은 170만 킬로리터였다. 지금은 20만 킬로리터가 채 안 된다. 약 30년 동안 10%로 줄어든 이유는 꼭 앞서 말한 유행의 순환 주기 때문만은 아니다. 막걸리는 우리네 역사와 함께 해 온 전통주로서 외래주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명맥을 잇는 것이 마땅할진대 그 맥이 끊어진 이유는 시장의 논리 때문이다.

한마디로 맛이 없어 외면 받은 것이다. 비싼 쌀 대신 밀로 빚은 밀 막걸리나 충분히 발효를 거치지 않고 첨가물로 급하게 맛을 낸 싸구려 합성 막걸리는 한동안 사람들의 머리를 아프게 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 쌀은 남아 돌아 정부가 소비를 부추겨야 할 지경이고, 취하기 위해 퍼마시는 것보다 건강을 생각해 적당히 즐기는 술 문화가 득세할 조짐이다. 막걸리의 화려한 복귀를 위한 판은 마련됐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면 품질 개선은 기본이고 좀더 세련된 변신이 필요하다.

"막걸리가 막걸리 같지가 않아요. 특유의 텁텁한 맛도 없고 굉장히 가볍고. 막걸리는 원래 걸쭉하고 여운이 긴 술인데 이건 마치 햇포도로 빚은 보졸레 누보처럼 살짝만 익은 산뜻한 맛이 나요."

압구정동의 퓨전포차 무이무이에서 파는 막걸리를 마셔본 이의 소감이다. 요즘의 막걸리 마시는 풍경에서 빠질 수 없는 단어들은 저도수, 가벼움, 예쁜 병과 잔, 그리고 대화다. 무이무이는 지난 해 12월 문을 열면서부터 막걸리를 메뉴에 넣었는데 지금은 소주와 맥주를 제치고 전체 주류 판매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

주문을 하면 주둥이가 미끈하게 빠진 유리병에 뽀얗게 거품이 몽글몽글 올라온 막걸리가 나온다. 따라 나오는 초록빛 유리 사발도 맞춤 제작된 것으로 여기에 막걸리를 따라 마신다. 여든이 넘은 주류 장인 두 사람이 100% 전통 방식으로 빚어 공급한다는 이곳 막걸리의 알코올 도수는 6도. 병당 만원으로 소주와 가격대는 비슷하면서 도수는 낮은 셈이다. 압구정과 청담동을 본거지로 하는 이들은 이곳에 들러 삼겹살 스테이크 샐러드에 막걸리를 곁들인다.

시각적 효과로 변신을 꾀하기도 한다. 홍대 짚동가리쌩주에서는 칵테일 막걸리를 판다. 청포도 막걸리, 딸기 막걸리, 복분자 막걸리 등 생과일즙을 섞어 만든 막걸리들은 그 과일의 색처럼 붉고 노랗고 푸르다. 알코올 도수는 3도로, 마셔보면 음료수인지 술인지 헷갈릴 정도로 가볍지만 우습게 여기고 들이키다 보면 어느새 취기가 오른다.

"칵테일 막걸리 고객의 대부분이 여자예요. 여자 손님들은 술 자체를 즐긴다기보다 만나고 이야기하기 위한 매개로 이용하는데 그러려면 도수가 낮아야 하고 이왕 마실 거 색이 예쁘면 더 좋죠. 과일즙이 들어가 달콤새콤한 맛이 더해진 것도 젊은 사람들 취향에 잘 맞고요."

이런 식의 변화는 어떻게 보면 음주문화의 발전이지만 한편으로 옛날로의 회귀이기도 하다. 우리는 종종 외국인들로부터 "발렌타인 17년산을 이런 식으로 급하게 마시는 사람들은 처음 봤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화끈한(?) 술 문화를 자랑한다. 그러나 취하기 위해 마시고 나중엔 술이 사람을 마시는 식의 문화는 70~80년대 가난한 시절의 흔적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방향주(芳香酒)이자 반주로 술을 마셨던 조상들이 있다.

한국전통주연구소장 박록담 선생은 <전통주>라는 그의 저서에서 "우리 술의 특징은 향이 깊고 순한 듯하면서도 은근하게 올라오는 취기로 인해 술을 마시는 흥취가 있으며, 숙취가 없이 빨리 깨고 뒤끝이 깨끗하다는 데 있다"고 말했다. 우리도 술의 맛과 향을 즐길 줄 알던 민족이되 힘든 시절 잠시 샛길로 빠진 것뿐이다.

막걸리는 원래 천천히 즐기던 술

와인이 톱 투 다운(top to down) 형식으로 대중에게 퍼졌다면 막걸리는 반대로 다운 투 톱(down to top)의 과정을 거치고 있다.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문화의 특성상 막걸리에 강남, 여자, 젊음이라는 키워드가 따라 붙은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곧 필연적으로 고급화 현상이 일어나면서 불만을 제기하는 이들이 생기겠지만 이는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까다로운 트렌드 세터들에 의해 예뻐지고 맛있어진 막걸리는 한국을 넘어서 세계인을 만족시킬 문화상품으로 거듭날 기반을 다지는 중이기 때문이다.

다만 와인처럼 원료와 공급지, 특징을 한번에 알 수 있는 라벨에 대한 규정이 없는 것과 유통 방식에 대한 문제는 아직 걸림돌로 남아 있다. 막걸리의 유통 기한은 10일로 표기돼 있지만 제대로 된 맛을 즐길 수 있는 기간은 실제로 2~3일에 불과하다.

살균 막걸리가 시판되고 있지만 막걸리의 참 맛이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때문에 올해 국순당이 선보인 생막걸리는 세계화라는 긴 여정의 중요한 한 발이다. 독자 개발한 기술로 생막걸리의 유통기한을 30일에서 최대 90일까지 늘려 놓은 것. 스스로 '3세대 막걸리'라고 부르는 이것으로 인해 막걸리는 동네 양조장을 벗어나 해외 나들이까지 가능해졌다.

화이트 와인 잔에 담긴 사케가 스시와 함께 뉴욕인들을 사로 잡은 것처럼 막걸리 역시 바깥으로 나가는 한식에게 훌륭한 동반자가 되어 줄 수 있지 않을까.

톡 쏘는 막걸리 이야기

손가락으로 휘휘?

사발에 손가락을 넣어 휘휘 저은 후 쪽 빨아 먹는 버릇은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동작이지만 사실 싸구려 술이 판치던 시기의 단면이다. 첨가물이 잔뜩 들어간 막걸리는 따라 놓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닥에 침전물이 가라앉기 때문에 휘휘 젓지 않으면 먹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막걸리로 다이어트 한다?

막걸리 다이어트가 이슈가 되고 있기는 하지만 막상 술을 마신 후 느껴지는 포만감 때문에 과연 효과가 있을까 의심스럽다. 그러나 막걸리 안에 들어 있는 고형분(쌀)에서 칼로리로 전환될 만한 전분은 이미 알코올로 모두 바뀐 상태. 나머지는 비소화성 식이섬유로 시판되는 섬유 음료보다 1000배 정도 많은 섬유질을 함유하고 있다. 대장 활성화에 좋은 것은 당연한 일.

집에서 만든 술은 불법?

현행 주류 관련 법에 따르면 개인이 술을 만들어 파는 것은 불법이다. 위생관리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는 이가 만든 술은 독성 곰팡이가 들어갈 수도 있기 때문. 얼마 전 이 규제가 풀렸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그것은 틀린 얘기다. 다만 개인이 만들어서 내다 팔지 않고 혼자 마시는 것은 허용된다. 이전에는 이것조차 불법이었다.

막걸리 마니아 4인이 말하는 막걸리를 즐기는 나만의 방법

시장이 반찬이라고, 막걸리도 일단 몸이 준비가 돼야 한다. 적당한 운동으로 갈증이 유발된 상태가 막걸리를 최고로 맛있게 마실 수 있는 때다. 막걸리의 생명은 청량감으로 괜히 농부들이 새참으로 막걸리를 마셨던 게 아니다. 맥주와 비슷하지만 맥주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등산이나 간단한 조깅 후 목이 마르다 싶을 때 시원한 막걸리를 꿀꺽꿀꺽 들이켜 보라. - 국순당 연구소 신우창 박사

막걸리는 발효주라 와인처럼 테이스팅 노트를 쓸 수 있을 만큼 수천 가지 맛과 향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찬바람이 불어 좀 걸쭉하게 마시는 게 좋은데 한창 더울 때는 마트에서 질 좋은 막걸리를 사다가 집에서 시원하게 마셨다. 얼음을 잘게 부숴서 화이트 와인 잔에 넣고 막걸리를 쪼르륵 따른다. 그러면 막걸리가 얼음을 통과하면서 마시기에 딱 알맞은 온도가 된다. 칵테일로 마시고 싶으면 진저 에일을 섞기도 하고 허브 잎을 넣어도 잘 어울린다. - 황의건 오피스 h 대표이사

'막소사'라는 것을 들어봤나? 요즘 젊은 친구들이 막걸리를 마시는 방법인데 막걸리에 소주와 사이다를 섞는 일종의 폭탄주다. 술이 센 사람들은 막걸리를 밋밋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렇게 조합하면 도수가 10도 정도로 올라가면서 막걸리 고유의 풍미에 달고 시원한 맛은 배가된다. 그 청량감을 제대로 즐기려면 국물이 있는 안주보다는 파전이나 두부 김치와 함께 먹는 것을 추천한다. - 리치푸드 조상철 팀장

발효가 잘 된 막걸리는 마치 샴페인처럼 계속해서 기포가 올라오는 게 보인다. 막걸리를 따라 놓은 후 가만히 두면 바닥에 서서히 침전물이 가라 앉는데 10~20분 안에 침전물이 생긴다면 그건 좋은 막걸리가 아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막걸리는 혼합음료이기 때문에 오래 두면 가라 앉게 마련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윗부분 4분의 1 정도에 아주 맑은 층이 형성되는데 나는 이걸 엑기스라고 부른다. 깨끗하고 알싸한 맛이 일품으로 그 아래 층을 전부 포기할 수 있을 정도다. - 무이무이 김종필 매니저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