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문화에 눈을 떠라] 경영인에게 문화예술적 안목은 지속 가능한 기업의 필수 경쟁력

칼리 피오리나(사진제공 : 해냄출판사)(왼쪽부터), 디즈니 회장 마이클 아이스너, 벤저민 그레이엄(사진제공 : 굿모닝북스), 앙드레 코스톨라니
지난 18일 이명박 대통령의 라디오연설의 주제는 '문화'였다. 이날 이 대통령은 과거 서울시장 재직 시절, 세계적 기업의 CEO들이 한국의 경제보다 문화 환경을 먼저 질문했노라고 말했다.

"서울시장 시절 세계적인 기업의 CEO들을 만나 투자유치를 할 때도 마찬가지 경험을 가졌습니다. '세율이 얼마냐, 우리 기업이 가면 어떤 경제적 혜택을 줄 것이냐' 이런 경제적 질문을 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서울에 오페라 하우스는 있느냐?' '우리 직원들이 주말에는 여가를 어떻게 보낼 수 있느냐?' '가까운 곳에 점심 먹고 산책할 곳이 있느냐?' '때론 주말에 도심에서 자전거를 탈 수는 있느냐' 하는 질문을 더 먼저 했습니다. 투자조건이 아무리 우수해도 그곳에서 일할 직원들이나 가족들이 원하지 않는다면 투자하기 어렵기 때문이었습니다." (26차 라디오 국정 연설 중에서)

문화는 이제 부와 여유의 상징이 아니라 시대의 화두가 됐다. 경영이 소비자의 요구(needs)를 충족시키며 이윤을 창출하는 분야란 것을 감안한다면, 경영인이 문화에 눈을 뜨는 것은 이제 '시대적 사명'이 됐다.

국내외 경영인의 안목, 무엇이 다를까

지난 달 14일, 재벌닷컴의 조사에 따르면 국내 10대 그룹 계열사 사장급 이상 CEO(총수 가족 제외)의 27.8%가 대학에서 경영을 전공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학과 출신이 11.9%, 전기-전자공학과 출신이 7.6%, 법학과 출신이 5.5%로 그 뒤를 이었다. 말하자면 국내 경영인들의 과반수가 '경영'과 '경제'를 전공하고 '경영일선'에 뛰어드는 셈이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위), 유니레버 본사
이공계 출신 기업인의 비율이 지난해보다 0.7%포인트 높아져 경영인의 전공이 다양화되고 있다는 분석도 뒤따른다. 그러나 미술, 음악 같은 예술의 경우 이 설문 조항에 아예 빠져 있을 정도로 국내 문화예술 전공 기업인의 수는 미미한 수준이다.

외국의 경우는 어떨까?

이 점에서 몇 해 전 미국 일간지 유에스에이투데이의 조사 결과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해준다. 미국 1000대 기업 경영인의 대학 학부시절 전공을 조사한 결과, '경영학'을 전공한 CEO는 전체의 3분의 1이 되지 않았고, 인문과 문화 전공자가 상당했다.

휴렛패커드의 전 CEO 칼리 피오리나(Carly Fiorina)는 알려져 있다시피 스탠포드대학에서 중세역사와 철학을 전공했다. 그녀의 이력은 그녀가 휴렛패커드 CEO로 부임해 퇴임할 때까지 회자되었는데, 그녀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중세에서 르네상스 시대로 넘어가는 이행 과정에 대한 호기심이 디지털시대 도래를 이해하는 데 딱 들어맞았다"고 말한 바 있다. 한 세기 동안 인간들이 지속적으로 일궈낸 성과를 고찰해보면, 향후 기업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예측하는 안목이 생기고, 이 안목이 경영 일선의 전략적 판단으로 이어졌다는 얘기다.

월트디즈니사의 마이클 아이스너(Michael Eisner) 회장은 대학에서 문학과 연극을 복수 전공했다. 경영학·경제학 관련 강좌는 한 번도 수강한 적이 없다. 그는 "어떤 비즈니스든 인간관계가 관건인데, 문학이 놀라울 정도로 도움이 된다. 사람 사는 방식을 이해하는 데 문학처럼 예리한 직관을 갖게 해주는 것이 없다"고 말한다. 전문가들은 디즈니사가 제작한 최우수 영화 중 한 편인 '죽은 시인의 사회'는 이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그는 세 아들에게 모두 인문학을 전공하도록 권유했다.

미국 최대 광섬유 제조업체인 코닝의 전 CEO, 존 루스(John Loose)는 동아시아 역사와 문화를 전공했다. 그는 "한국, 일본, 인도, 중국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지 못했다면 CEO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동아시아에 대한 지식이 나에겐 무엇보다 값진 자산이 됐다"고 강조한다. 동아시아에 대한 문화적 지식은 그를 탁월한 경영자로 만든 셈이다.

경제전문지 <월스트리트>가 워런 버핏, 피터 린치, 조지 소로스와 함께 '시대를 초월한 가장 위대한 투자자'로 꼽은 벤저민 그레이엄(Benjamin Graham)은 '가치투자'의 선구자다. PER(주가수익비율) 등 여러 투자지표를 개념화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그는 컬럼비아대학에서 인문학을 전공했고, 한때 극작가로 활동한 적도 있다. 1편의 단막극과 3편의 장막극을 썼는데, 그 중 한 편은 연극으로 만들어져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유럽증권계의 거목, 앙드레 코스툴라니(Andre Kostolany)는 대학 시절 철학과 예술(미술)사를 전공했는데, 꿈이 피아니스트였을 만큼 음악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기도 했다. 13권의 책을 펴낸 그는 수필에 가까운 유려한 칼럼 덕분에 '박학다식한 저술가이자 유쾌한 만담가'로 불리기도 한다.

앞서 소개한 CEO들은 해박하고 깊이 있는 문화예술 경험을 발판 삼아 전략적 판단력을 넓힌 인물들이다. 다양한 문화예술 경험은 경영자로서의 안목을 키운다. 문화, 예술을 전공하지 않은 CEO라도, 문화 예술에 조예가 깊은 CEO들이 많은 이유다. 실제로 외국의 경영대학들은 경영 실용서가 아닌, 소설을 읽으라고 권할 정도다.

문화는 기업을 어떻게 바꾸는가

이쯤에서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던진다. '도대체 경영과 문화가 무슨 상관인가?'라고. 경영인의 문화예술 감각은 기업의 전략보다, '네트워크'를 만드는 윤활유로 활용되는 게 아니냐고.

결론부터 말하면 21세기 경영환경에서 문화예술은 기업의 대표적인 조직관리, 마케팅 전략이 됐고, 경영인의 문화예술 안목은 '지속가능한' 기업 경쟁력이 됐다는 것이다.

CEO의 문화 안목이 경영일선에서 '윤활유' 정도로 그친다면, 고흐의 그림 한 점으로 1조 원 이상의 홍보효과를 누린 솜포재팬의 사례는 어떻게 설명할까?

올해 초 일본 내 업계 5위인 니폰코아보험을 합병한 일본 보험회사 솜포재팬은 예술을 통한 사회공헌과 마케팅을 동시에 실천한 사례다. 솜포재팬 건물의 42층에는 미술관이 있고, 그 한쪽 벽면에 고흐의 '해바라기'가 걸려있다. 회사는 이 그림을 사내 미술관에 상설 전시해 회사 건물을 방문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세계 최고의 명화인 '해바라기'를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이 그림은 고흐의 다섯 해바라기 작품 중 가장 강렬한 작품으로 지난 1987년 솜포재팬이 크리스티 경매에서 53억 엔에 사들인 것이다. 업계 후발주자이던 솜포는 해바라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화제성과 품격 있는 이미지로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는 솜포재팬이 일본 제 2의 보험회사로 도약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그림은 고흐 등 근대 화가들의 작품가격 상승으로 미술품 투자 이익을 가져다 주었을 뿐 아니라, 해바라기의 명성으로 국내외 에서 1조5000억 원의 광고 효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일본 내 미술 관련 메세나 사업을 총괄하는 오바 도모유키 팀장은 국내 한 인터뷰에서 "광고 회사가 추정하기로 해바라기는 외국에 500억엔 정도 광고효과를, 국내에는 1000억엔 이상 광고 효과를 갖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유니레버 본사가 2000년부터 2007년까지 진행한 카탈리스트 프로그램(Catalyst Program)은 기업ㆍ예술간 파트너십 프로그램으로, 예술을 활용한 기업문화 혁신의 대표적 성공사례다. 이 프로그램 역시 유니레버의 부회장 제임스 힐(James Hill, 영국 유니레버 CEO)의 예술친화적 성향으로 시작됐다는 후문이다.

연간 1600명의 유니레버 본사 직원의 창의성 개발 프로그램에는 연극배우, 화가, 극작가 등이 교사로 나선다. 영국 유니레버 본사 회장이 거주하던 곳을 개조해 만든 크리에이티브 공간은 헨리8세의 궁전과 킹스톤 지역의 넓은 경관이 내려다 보이는 곳이다. '커뮤니케이션 능력 개발', '비주얼 능력 개발' 등 다섯 가지 분야로 나뉜 이 프로그램은 연극배우, 극작가, 화가, 시인 등을 강사로 초청해 운영한다.

'서식 쓰는 법' 등 글쓰기 워크숍을 운영할 때는 영국 시인과 작가를 초청해 직원들의 글쓰기를 다듬어 준다. '커뮤니케이션' 강연에서는 극작가가 직원들에게 롤 플레이를 맡겨 이들의 대화 수준을 체크한다. 디자인과 컬러 감각을 키워주기 위해서는 화가를 초청하고, 직원들의 발표력을 향상시키는 데는 배우를 강사로 초청한다.

전문 음향사가 직원들의 대화과정을 녹음한 후 3주 동안 아트 갤러리에 전시하여 직원들이 듣고 피드백 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12주 트레이닝 종료 후 직원 개인이 개발한 업무 능력을 정리하는데, 카탈리스트 프로그램은 예술을 활용해 작업환경 변화, 창의성 증진, 동기 부여, 기업문화 혁신 효과를 창출한 것으로 나타났다. 외부 컨설팅 회사를 통해 참가 직원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 일에 대한 동기 부여가 향상됐고, 일에 대한 사기도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카탈리스트 프로그램은 경영자원으로서의 예술 활용 사례 중 가장 성공적인 케이스로 평가된다. 한국메세나협의회 관계자는 "예술가들에 대한 단순한 보상 차원을 넘어 기업과의 협동, 협력 개념을 공유함으로써 예술가의 파트너십 마인드 향상에 기여했고, 프로그램 성과가 경영자원이 되어 향후 브랜드활동의 창의성 노력에 연계됐다"고 설명했다.

앞의 기업은 모두 문화예술이 기업의 이윤창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례들이다.

자, 이제 다시 궁금증이 생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는 문화 예술에 안목 높은 CEO가 있는가? 문화 예술적으로 경영하는 기업이 있는가? 물론 있다. 이번 특집에서는 국내의 문화예술 CEO와 이들의 문화예술 안목을 소개하고 또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경영에 예술적 안목을 접목시켰는지 인터뷰했다. 그리고 문화예술 교육기관과 관련도서를 정리했다.

마지막으로 문화예술을 경영과 마케팅 전략에 접목시키는 메세나 활동의 국내 사례를 60페이지 특집으로 소개한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