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미술관 빅뱅시대]

1-12월에 개관 예정인 포항시립미술관 조감도
2-내년 10월 개관 예정인 대구시립미술관 조감도
지금 미술계의 관심은 '공공미술관'에 쏠려 있다.

우선 전국에 공립미술관이 건설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6월 문을 연 제주도립미술관과 12월 개관하는 포항시립미술관, 내년 10월 개관을 목표로 하고 있는 대구시립미술관을 포함해 5년 내 들어설 공립미술관만 해도 20여 곳이다. 예정대로라면 공공미술관의 춘추전국시대가 열리는 셈이다.

이는 우선 1999년 문화관광부가 발표한 '1도 1미술관 건립지원정책'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문화도시', '창조도시'의 기치를 내세워 문화예술을 새로운 지역 정체성과 성장의 동력으로 삼으려는 지자체들의 이해가 반영된 현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화예술 제도는, 표면적으로는 정치적 산물이라 해도 이를 둘러싼 시대사회적 패러다임과 역학관계를 맺게 마련이다. 공공미술이 화두로 떠오르고, 미술 시장이 위축된 상황은 공공미술관의 의의를 더욱 주목하게 한다. 미술계를 잠식했던 시장 논리에서 벗어나 미술의 미래·사회적 역할을 고민할 수 있는 물리적 계기로써 공공미술관을 '만들어 가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이유다.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을 두고 불거진 몇몇 갈등 상황들은 공공미술관의 방향성 논의가 필요한 이유를 새삼 일깨웠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서울관이 들어설 옛 기무사터에서 특정 언론사와 공동주최하는 아트페어를 열고, 법인화 계획을 비공개적으로 추진해 비판을 받았다. 공공미술관의 공공성은 공권력이 주도한다고 담보되는 것이 아니라 미술계, 시민과의 소통을 통해 생산되는 것임을 반증한 셈이다.

광주시립미술관이 작년 서울 인사동에 개관한 갤러리라이트(위), 대전시립미술관이 작년 개관한 대전창작센터
공공미술관의 양적 증가는 미술계와 시민에게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이를 제대로 누리려면 그만큼 골똘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자체의 건립 계획의 범위는 미술관 개관까지다. 그 '이후'에 대한 논의는 고스란히 숙제로 남아 있다.

공립미술관은 지역 미술계의 자존심?

지난 28일 울산시 울산문화예술회관에서는 '울산 예술발전 심포지엄'이 열렸다. '울산미술관 건립과 전시공간 확충을 위한 제언'을 하는 자리였다. 심포지엄을 열게 한 동력은 울산시 미술계의 위기의식이다. 울산예총 관계자는 "지방 큰 도시 중 미술관이 없는 곳은 울산뿐"이라고 지적했고 울산 미협 원로인 화가 이창락은 '한국 시·도립 미술관의 현황 및 울산시립미술관 건립에 대한 제언'이라는 발제를 준비하며 "왜 우리 울산만이 이렇게 뒤처지게 되었나 하는 자책감과 함께 실망감이 들었다"고 말했다.

공립미술관의 주요한 기능 중 하나는 지역의 문화예술을 지원하고 활성화하는 것이다. 전시 공간과 작가 간 네트워크의 장이 제공하고, 작품을 수집함으로써 지역 미술의 자생력을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지역의 척박한 창작 환경을 고려할 때, 공립미술관에 대한 지역 미술계의 기대는 일견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대구시립미술관 개관을 앞둔 대구경북지역 민미협 최수환 대표는 "별로 관심이 없다" "많은 작가들의 관심이 미술관에 내 작품이 들어갈지에만 쏠릴 텐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되물었다.

이는 행정적·정치적 논리를 앞세워 지어지는 공립미술관이 제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다. 여러 지역 공립미술관들이 지역 문화예술의 토양이기보다 문화정치의 전장이 되었다. 관장 임명을 둘러싸고 잡음이 끊이지 않는 것이 한 단면이다. 최근 임기가 만료한 전북도립미술관 최효준 전 관장에 대해서는 작년 전북 미술인 50명이 재임용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고, 제주도립미술관 김남근 초대 관장은 미술계 인사가 아닌 행정공무원 출신이라는 점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김종길 경기도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지자체들이 업적을 만들어내기 위해 하드웨어에는 예산을 투입하지만 운영 철학과 프로그램 같은 내용을 고민하는 데에는 소홀했다"고 지적했다. 미술관을 건립한 후에는 최소한의 인력과 예산만으로 "쥐어짜는" 식의 운영을 하는 사례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지역 문화예술의 자생력에 일조하기는커녕 미술관 자체의 자생력도 갖추지 못한 곳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최수환 대표의 말처럼 "공립미술관이 지어지는 이유는 지역 미술계의 필요에 의해서라기보다 우선 국가의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번듯한 수단이기 때문"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문화정치·행정에서 독립해 자구책 찾아야

이런 문제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인천시립일랑미술관 건립을 두고 벌어진 인천시와 문화예술인간 공방이다. 인천시는 지난 8월 화가이자 서울대 명예교수인 일랑 이종상의 작품을 기증받아 그의 호를 딴 시립미술관을 건립하는 내용의 MOU를 체결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충분한 논의와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 인천 지역의 문화예술계는 일랑 이종상이 인천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데다 시립미술관에서 '기념'해야 할 정도의 업적이 없다는 점, 또 기증의 대가로 작가 개인에게 주어지는 권한이 지역의 문화예술계에 미칠 영향이 너무 크다는 점 등을 들어 반대하고 나섰다.

인천시 측이 소통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자 지난 9월 초 15개 인천문화예술단체들이 연대했고 9월 말 건립 백지화를 요구하는 지역미술인 100인 선언을 했다. 반대 움직임이 거세지자 인천시는 지난달 12일 간담회를 열었지만 양측의 입장차를 확인하는 데 그쳤다.

'인천시립일랑미술관 건립을 반대하는 인천문화예술단체 연대'에 관계하고 있는 전 인천민예총 회장 이종구 중앙대 교수는 "100인 선언을 한 인사 중에는 일랑 이종상과 가까운 분도 많다. 그만큼 이번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지은 미술관이 지역 문화예술을 발굴 육성하는 본연의 임무를 다할 수 있겠나"라고 말했다.

인천에서처럼 직접적으로 갈등을 빚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공공미술관에 대한 지자체의 이해 부족은 전문인력과 예산 부족이라는 '보편적인' 문제점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는 두말할 필요 없이 미술관의 운영 내용을 부실화하는 근본 원인이다.

이런 문제점은 몇 년내 개관 예정인 신생 공립미술관들에서 더욱 심각하게 나타날 수 있다. 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지어지는 배경이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데다 '창조도시', '문화도시'를 향한 지자체들의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행정적 맥락 탓인 때문이다. 개관 후에는 자체적으로 예산을 확충해야 하는데, 그 규모와 방안에 대해 지역 내부적으로 충분히 검토한 경우는 드물다.

더구나 경제 침체로 기존 공립미술관에 대한 지자체의 예산이 대폭 삭감되는 추세다.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등 여러 국공립미술관에서는 법인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운영 철학과 그것을 뒷받침할 여건에 대한 고민 없이 일단 지어놓고 보는 미술관은 일회성 이벤트이자 지자체장의 치적 중 하나로 동원될 수밖에 없다.

김종길 학예연구사는 "요즘 분위기를 보면 앞으로 4~5년 내에 거의 모든 공공미술관이 민영화될 것 같다. 미술관들이 스스로 설립 취지를 확고히 하고 자생력을 기르지 않으면 안된다. 민간에서 자금을 조달하고, 공공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영리 사업을 하는 등의 다양한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지역과 세계 사이에서 길 찾기

정치적 맥락에서 태어날지언정 그 구태의연한 영향관계에서 독립해, 지역에서 본연의 공공성을 확보하는 자구책이 현재 공공미술관들에 요청되는 임무의 한 축이라면 또 다른 축은 '전지구화'라는 시대적 흐름과 관련된다.

미술평론가인 최병식 경희대 교수는 지난달 29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발표한 '한국의 미술관,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에서 "각 지역에 설립 중인 대다수 미술관들은 지역미술관으로서의 기능과 글로벌시대에 걸맞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갈등 상황을 겪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즉 지역미술관이라는 정체성에 초점을 맞출 경우 '글로벌'한 기준에 비추어볼 때 소장과 전시의 수준이 낮아질 수 있고, 그렇다고 높은 수준을 추구하면 지역 미술계와 충돌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딜레마는 공공미술관이 자구책을 마련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공공미술관으로서 존속하려면 지역의 지지가 필수적인 반면 수익을 내는 가장 가까운 방법인 미술관의 관광자원화에는 글로벌한 감각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언급되는 것은 주로 해외의 '성공' 사례다. 스페인의 쇠락한 공업도시였던 빌바오가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분관을 유치한 후 세계의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문화도시'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전설처럼 회자된다. "지역 경제에 미치는 효과가 확연해 지자체들이 좋아하는 사례"(양현미 상명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이자 "세계적 미술관 중 가장 친대중적이어서 홍보하기에 좋고"(홍경한 미술평론가) 국내 공공미술의 '의무'가 되다시피 한 도시재생의 의미까지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잘 지은 미술관 하나가 지역을 살린다?

국내외의 상황은 공공미술관에 미술의 역사를 보존·연구하는 역할을 넘어 지역 문화를 발생시키고 '세계적' 수준으로 고양시키는 역할까지 기대하고 있다. 많은 미술관이 이에 부응해 교육 프로그램을 확충하고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하거나 대외 협력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등 정체성 확장을 모색하고 있다.

잘 지은 미술관 하나가 여러 마리 토끼를 잡는 덫이 된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번듯한 건물만으로는 그런 역할을 할 수 없다. 인력과 예산, 장기적인 운영 계획이 갖춰져야 하고, 정제된 방향성과 제련된 철학이 이를 뒷받침해야 한다. 그러나 당장 전국에서 문을 열 공공미술관 숫자에 비해, 그 속을 채울 논의는 부족해 보인다.

한국의 구겐하임 미술관을 만들겠다는 의욕적인 구호만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의 사례를 국내에 적용하는 것이 가능한지, 바람직한지에 대한 고민조차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 미술관 관장은 "빌바오는 구겐하임 미술관을 필사적으로 유치하고 육성해야만 할 만큼 척박한 환경이었지만 한국의 모든 지역이 그렇지는 않다"고 꼬집었다. 지역의 미술사와 문화적 맥락을 어떻게 살려나갈 것인가, 라는 질문이 먼저라는 뜻이다. 현란한 정치적 수사로 짜인 '의무'들에 가려진 공공미술관의 정체성을 찾아야할 때다.

한국 공공미술관, 어디까지 왔나

최근 몇몇 미술관들은 고질적인 문제점을 극복하고 시대적 요청에 발맞추기 위한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그 첫 걸음은 지역 작가 위주가 아닌 지역 이슈가 중심에 있는 기획을 함으로써 '지역성'의 개념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광주시립미술관이 5.18민주화운동을 적극적으로 성찰하고, 부산시립미술관이 부산이라는 도시 자체를 재조명한 작품들을 모아 전시한 것이 그 예다.

이는 지역의 미술협회전을 함으로써 지역 미술관으로서의 체면치레를 했던 예전과 다른 양상이다. 김종길 학예연구사는 2007년 경기도미술관에서 예정되어 있었던 <경기미술인 100인전>을 <경기, 1번 국도>라는 제목으로 공간성을 부각한 전시로 바꾼 효과를 이렇게 설명했다.

"작가를 전면에 내세우면 미술계가 분열할 수밖에 없다. 공립미술관 전시에 이름을 올리는 것 자체가 하나의 문화 권력이기 때문이다. 작가 선정 기준을 두고도 논란이 많다. 그리고 작가를 중심에 두면 전시가 박물화될 우려가 많다. 하지만 지역적 이슈를 내세우면 전시 내용이 좀 더 역동적으로 꾸려진다. 그러면서도 지역 작가를 자연스럽게 '끌어 올리는' 효과가 있다.

경기도가 휴전선이 지나가는 분단의 상징적 공간임에 주목한 <경기, 1번 국도>에는 독일, 팔레스타인 등 분단을 경험한 지역 출신 작가들도 참여해 신선한 시각을 불어넣은 동시에 70%는 지역 작가로 채워졌다."

작가들의 창작 활동을 전방위적으로 지원하는 움직임도 눈에 띈다.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미술관이 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은 각각 창동스튜디오와 난지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다. 경기도미술관은 지난 달 29일 안산시 선감도에 경기창작센터를 개관했다.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물론 교육 프로그램, 작품창고와 예술공방 등을 갖췄다.

한편 광주시립미술관은 지역 작가들의 전국, 나아가 해외 진출을 돕는다. 작년 서울 인사동에 광주 작가들이 대관할 수 있는 분관 '갤러리라이트'를 열었고, 다음 달 초에는 중국 베이징에 창작센터를 개관한다. 창작센터는 최근 중국 현대미술의 중심지인 따산쯔 환티에 창작예술지구에 위치한다. 곧 미국 뉴욕에도 창작센터를 건립할 예정이다.

공공미술관의 오지랖은 대안적 예술에까지 미쳤는데, 대전시립미술관이 작년 개관한 대전창작센터가 그 예다. 작년 대전시내 근대건축물인 옛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을 리모델링한 대전창작센터는 도심재생을 이끌었다. 근처 빈 건물에 예술가들이 작업실을 꾸리면서 일대가 일종의 창작지구로 변모한 것. 이곳은 다른 지역의 대안공간들과의 네트워킹도 모색하고 있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