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미술관 빅뱅시대] 한국 공공미술관 둘러싼 4가지 이슈 통해 가능성과 청사진 진단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지금 한국 공공미술관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의는 현안인 동시에, 근본적이고도 미래적인 성찰을 필요로 한다. 한국사회는 어떤 공공미술관을 필요로 하고, 만들어낼 수 있을까. 가장 중요한 네 가지 이슈를 통해 그 가능성을 짚어본다.

이슈 1.
구겐하임 미술관 꿈과 현실

"은 개관 이후 2003년까지 6년 동안 빌바오시에 약 1조 5천억 원에 이르는 경제효과를 유발한 것으로 나타났다. 빌바오 구겐하임의 사례는 박물관과 같은 문화시설이나 오페라 하우스 등과 같은 예술적 활동 등은 그 지역으로 관광객을 유치하여 기타 서비스업 등에서 고용 창출을 발생시킨다는 사실을 여실히 입증해 주었다."

지난 5월 선임된 송번수 대전시립미술관 관장이 10월 24일 대전일보에 기고한 '문화마케팅 성공사례 '구겐하임 미술관''의 일부다. 이 글은 이 지역 경제에 미친 효과를 '객관적' 수치로 입증한 후 내년 하반기 대전시립미술관의 리노베이션 계획을 밝히는 것으로 맺는다. 결국 "미술관의 전시환경 개선이 도시 이미지를 쇄신하며 대전시를 문화특구로 조성하는 데 주도적"으로 기여할 것이라는 논리다.

의 드라마틱한 사연은 이처럼 지역 공공미술관이 포부를 밝히는 데 단골 소재로 동원된다. 그 포부가 다 이루어지면, 한 미술관 관장이 꼬집듯 "구겐하임의 프랜차이즈화"가 전국적으로 일어나는 셈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들어설 옛 기무사터에는 현재 <신호탄>전이 열리고 있다. 임재범 기자(왼쪽 사진), 오른쪽은 법인화가 추진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전문지 <공간>의 박성태 편집장은 이런 현상에서 "미술관을 지역 '브랜드'를 만드는 도구로 활용하고 싶어하는 지자체의 의도"를 읽는다. "하지만 브랜드를 만든다고 저절로 문화가 활성화되는 것은 아니다. 미술관이 지역과 실질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한 논의는 없고 보여주기 위한 '문화적 과잉'만 있다."

문제는 이 '벤치마킹할 마케팅 사례'로만 접근된다는 것이다. 박지택 광주시립미술관 관장은 "이익 극대화와 경영 효율을 추구하는 구겐하임식 경영방식만 이야기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한국 미술관이 그렇게 세계적으로 기쁨 주고 사랑 받을 수 있다면 나쁠 것 없다. 그러나 내실을 다지는 방법이 아니라 알리는 방법만이 고민되는 것은 주객전도다.

양현미 상명대 교수는 "구겐하임 미술관의 저력은 결국 콘텐츠"라고 지적했다. 세계적인 전시 내용과 아방가르드한 건축으로 관광객을 끌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은 미술관 건물에서조차 실험을 못 하잖나. 이렇게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목표만 저 멀리 두면 겉핥기식 모방을 할 수밖에 없다."

마케팅도 재료가 있어야 한단 뜻이다.

이슈 2.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어떻게 될까

정부가 옛 기무사터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으로 조성하기로 결정한 것은 올해 국내 미술계 최대 이슈 중 하나다. 한국 현대사의 굴곡 속에 은폐되었던 공간을 사회에 개방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다. 지금 <신호탄> 전이 열리고 있는 이곳은 12월 초 전시가 끝나는 대로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간다.

미술관을 조성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향후 운영의 방향성을 논하는 것이다. 하지만 걸림돌들이 있다. 올봄 이곳에서 어떤 공론화 과정도 거치지 않은 채 한 언론사와 공동으로 아트페어 형식의 행사 <아시아프>를 열어 비판을 받은 문화관광부의 '일방통행'식 일처리 방식과 기무사 건물들을 리모델링할 것인지 아예 허물고 미술관을 신축할 것인지, 또 국군서울지구병원을 이전할 수 있는지 등의 쟁점이 해결되지 않은 상황은 활발한 논의를 어렵게 하고 있다.

하지만 우선 과천에 위치한 국립현대미술관의 제약을 넘으면서 그와 "차별화된 기획 운영"(박지택 광주시립미술관 관장)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구체적으로는 "미술사에 초점을 맞춘 과천 국립현대미술관과 다르게 현대적이고 국제적인 미술의 '현장'을 보여주는 현재진행형의 전시공간"(김홍희 경기도미술관 관장)으로서의 기대가 컸다.

리모델링할 것인가, 신축할 것인가의 문제는 이 장소의 역사적 기억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김종길 경기도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역사를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 최대한 기존 건물의 공간성을 살려 리모델링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어둡고 눅눅한 지하 공간에 들어가면 저절로 60~70년대 시구(詩句)가 떠오른다. 아직도 구석마다 핏자국, 아우성이 달라붙어 있는 것 같고. 이런 비극을 기억하는 의미로 굿 같은 전시들을 열면 어떨까." 추후에는 그런 전시 성격 자체가 '브랜드'가 될 수도 있다는 논리다.

한편 박성태 <공간> 편집장은 이 공간이 "숨어 있는 곳이 너무 많고 동선 짜기가 어려워 다양한 성격의 전시를 하기는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이곳을 독립된 전시장으로서만 접근하기보다, 지역에 잠재한 문화적 가능성을 포괄하는 구심점으로 고안하자고 제안했다.

근처의 정독도서관과 북촌 일대, 미국 대사관저 등의 문화적 지점들과의 연계 속에서 사람들이 모여들 수 있는 곳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서울관은 도시 재생의 한 계기로서도 기능할 수 있다.

이슈 3.
국공립미술관 법인화 가능한가

문화관광부의 국립현대미술관 법인화 추진은 두 가지 면에서 비판받고 있다. 우선 공청회 등의 공적 논의 없이 '밀실'에서 추진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정작 법인화 자체가 타당한지를 따지기 위한 근거가 부족한 상황이다. 미술계에는 "이렇게 꼭꼭 감추다가 어느 날 이행한다고 공표할 것 같다"(홍경한 미술평론가)는 불안감이 감돌고 있다. 무엇보다 배순훈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스스로가 경영인 출신이기 때문이다.

미술계가 우려하는 점은 근본적으로는 "법인화가 초래할 상업화의 부작용"이지만 그보다 실질적으로는 국립현대미술관의 법인화가 큰 그림 없이 추진되는 상황이다. 정준모 미술평론가는 지난 9월 시사저널에 기고한 글에서 "법인화가 최선이라면 법인화 이후의 그림을 명확하고 분명하게 보여주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양현미 상명대 교수도 "법인화는 인력과 재정, 운영 면에서 경영의 측면을 강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하려면 미술관이 자체적으로 마케팅과 경영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상황이 그런가? 중장기적 발전 계획의 일환으로 제기된다면 법인화는 충분히 논의할 수 있는 주제다. 하지만 지금은 전제조건도 갖추어져 있지 않고 판단 근거도 부족하다"고 말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이외에도 서울시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등 공립미술관에서도 법인화 이야기가 나오는 중이다. 하지만 정작 마케팅 등 자율적 경영에 필요한 전문인력을 갖춘 미술관은 없다. 또 서구의 법인화된 공공미술관들이 기업이나 지역 사회의 기부 문화에 상당히 기대고 있는 것과 달리, 한국사회에는 기부 문화가 활성화되어 있지 않다는 문제점도 있다.

법인인 경기도미술관은 내년 예산이 대폭 삭감되어 자구책을 모색하고 있다. 지난 3일에는 비영리 문화기구 컨설팅 전문가인 앤 헤스켈을 초청, '미국 미술관의 마케팅 전략 및 펀드레이징 기법'에 대한 워크숍을 열기도 했다. 앤 헤스켈은 "'미술관의 친구들'같은 컨셉트로 기부와 자문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서포터 그룹을 만드는 것을 고려할 만하다"고 충고했다.

김종길 학예연구사는 "정부가 국공립미술관을 법인화할 때는 자생력을 기를 수 있는 충분한 기금을 마련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슈 4.
누구를 위한 공공성인가

이 모든 논의의 중심에는 당연히 '공공성'이 있어야 한다. 지금 한국 공공미술관이 지향해야 할 공공성은 무엇일까.

소장과 조사연구 업무를 통해 지역의 미술사를 체계화하는 것은 공공미술관의 당연한 의무다. 최근의, 매우 민주적인 의미에서의 '공공성'은 관객에 대한 '서비스'까지 포함한다. 박지택 광주시립미술관 관장은 "엘리트주의적 권위주의적 전시를 지양하고 시민들과 유대를 강화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이 공공성이라고 대답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민은 곧 납세자이고 따라서 행정적 '고객'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고객 중심'이라는 기치가 공공성을 담보하는 것일까?

미술계간지 <컨템포러리 아트>는 지난 9월 발간한 창간준비호의 특집으로 '미술관, 누구를 위한 공공성인가'라는 주제를 다루었다. 여기에 실린 박소현 한양대학교 비교역사문화연구소 HK교수의 글 ''공공성' 대논쟁, 아직 끝나지 않은'은 일본의 사례를 들어 '공공성'이'문화행정'의 힘에 의해 어떻게 굴절되어 왔는지를 밝힌다.

1970년대 고도경제성장을 겪은 일본에서는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미술관 건설 붐이 일었다. 지자체들이 앞다투어 행정적 기념비로 세운 것이다. 하지만 운영에 대한 계획 없이 만들어진 미술관들은 곧 부실화 논란에 휩싸였고 거품경제가 끝난 후에는 줄지어 폐관된다.

'작은 정부'를 표방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정부는 국공립미술관들을 법인화했고, 시장 논리 속에서 미술관의 공공성은 납세자이기도 한 관객에 대한 서비스 질을 높이는 것으로 자리 잡았다. 미술관의 수준 자체가 "평균적이고 안전한" 미적 취향에 맞춰졌기 때문에 공공미술관이 해온 학술적 연구나 실험적 예술 지원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이 글의 요지다.

"하지만 공공미술관의 목적은 당대의 이벤트를 위한 것이 아니다." 김종길 학예연구사는 고객을 위한 서비스라는 공공성에는 '역사성'이 빠져 있다고 비판했다. "공공미술관은 현재보다는 미래, 이후 세대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런 철학이 없으면 역사적 관점으로 작품을 수집하거나 전시를 만들어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더구나 국내 공공미술관은 역할을 확장하기에는 기본적인 아카이브 기능도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양현미 교수는 "한국미술사의 어떤 부분을 보려면 어떤 미술관을 가면 된다, 정도의 매뉴얼도 만들지 못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홍경한 미술평론가 역시 "국공립미술관은 전통적인 책임의식에서 벗어나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강선학 미술평론가는 <컨템포러리 아트>에 실린 글 '시장폭력에 대항하는 대안으로서 공공미술관'에서 "미술의 사회적 기능은 개인과 사회에 대한 성찰적 기능"이라고 단언한다. '성찰'의 핵심적 전제 조건은 '거리 조절'이다. 권력과 구조적 영향에 휩쓸리지 않은 상태여야만 큰 그림을 그릴 수 있고, 그 속에서의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

공공미술관의 미술은 성찰을 가능하게 해야 하고, 자본주의 사회를 성찰하려면 모든 것을 시장 논리로 환산하는 가치관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야 한다. '관객'과 '고객'이 동일시될 때 공공미술관의 '냉정'이 확보될 수 있을까.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