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정치] 젊은 문인들의 정치적 감각을 형식적 전위, 실험 통해 작품화하려는 노력

왼쪽부터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 소설가 정이현, 소설가 편혜영
'폭력의 성찰'(계간 <문학동네> 2009 여름호)

'다시, 미학과 정치를 사유하다'(계간 <문학과 사회>2009 가을호)

'우리 시대 문학, 담론이 묻는 것'(계간 <창작과 비평> 2009 겨울호)

이상은 올 한 해 주요 문예지의 특집 제목이다. 이들 기획에 눈길이 가는 이유는 사회적 거리를 두며 '문학의 순수성'을 말해온 문예지들도 일제히 '문학과 정치'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지난 해 후반기부터 기고 형식으로 '문학과 정치' 이슈를 담은 <창작과 비평>의 경우 애초부터 문학과 인문·사회과학을 두루 다루는 계간지였지만, 올해부터는 순수 문예지들도 '문학과 정치'에 관한 굵직한 기획 특집을 본격적으로 선보였다.

<문학과 사회>는 봄호에 자크 랑시에르 특별 인터뷰를 실었으며 <문학동네>는 문학과 정치에 관한 좌담을 봄호에 실었다. <세계의 문학>은 시의 정치성에 관한 기획평론을 여름호에 발표했다. 거대 담론이 사라진 2000년대에 문학계는 왜 정치에 주목하고 있을까?

80년대 vs. 2000년대

흔히 '문학과 정치'를 논하면 80년대 민중문학을 떠올리는 독자들이 많다. 문학은 역사와 사회에 대해 말한다는 '참여문학의 시대'와 비교해 2000년대 '문학과 정치'의 상관관계는 어떻게 변했을까? 왜 지금 문학과 정치 담론이 새롭게 등장하는 걸까?

함돈균 문학평론가는 문학과 정치 담론이 새롭게 등장한 배경에 대해 "정치 인식의 확장 때문"이라고 말한다. 2000년대 문학작품에서 나타나는 '정치성'은 정치에 관한 사유의 폭이 확대된 작품들이고, 이에 따라 비평의 관점도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문학 작품들이 드러낸 정치성이 계급 갈등 등 사회 구조에 대한 탐색에 그쳤다면, 2000년대 문학작품에서는 빈곤의 문제, 억압의 문제 등 보이는 형태의 정치성을 넘어 인간 내부에 대한 탐구 역시 정치의 일부분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작가들의 정치·경제적 사유 역시 생산과 노동의 문제, 계급문제에 대한 천착에서 벗어나 점차 소비를 화두로 삼기 시작했다.

이는 흡사 90년대 거대 담론이 사라지면서 '개인'이 출현하고, 페미니즘 등 새로운 형태의 정치 담론이 출현한 것과 비슷한 과정으로 보인다. 과거 세대에게는 전혀 정치적이지 않은 이슈들이 새로운 세대에게는 가장 핫(hot) 한 정치적 아젠다로 자리 잡는 것이다.

2000년대 문인들의 '정치적 감수성'은 새로운 형태의 문학작품으로 탄생하고 있다. 정이현 등 자본주의 소비코드를 드러내는 소설부터 편혜영의 '불편한 묘사', 황병승 시인의 '자궁을 가진 남자'까지 이들이 정치적으로 겨냥하는 대상과 형식은 이전 세대와 비교해 훨씬 더 다양해졌다. (본지 기사 '2000년대 문학의 정치 감수성은?' 참조)

한편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최근의 '문학과 정치' 담론이 촉발된 배경에 대해 "젊은 작가들은 민주화 이후 세대이고, 지난 해 촛불 집회 등 새로운 형식으로 정치를 경험하게 됐다. 이 경험을 80년대와 다른 방식으로 '문학적으로 더 세련되면서 정치적일 수는 없을까'란 고민에서 촉발된 측면이 크다"고 말했다. 2000년대 이후 달라진 문학계 변화와 작년 촛불 시위 이후 문인들의 정치적 행동이 맞물리면서 생긴 담론이라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형식에서는 어떤 변화가 있을까? 사실 2000년대 '문학과 정치' 담론은 주제보다 형식에 방점이 찍혀있고, 이 점이 과거의 '문학과 정치' 담론과 차이를 보인다.

이에 대해 함돈균 평론가는 "종래 리얼리즘 문학이 '문학도 할 수 있는 것'을 작품으로 드러낸 경우라면, 이제는 '문학만이 할 수 있는 것'을 표현한 작품이 나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복잡다단한 현대 사회는 선명한 악이 없음에도 그다지 나아지지 않는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어떤 폭력의 근원이 한두 개가 아니고 불분명할 때 작가의 의식을 통해 문학적으로 승화된, 때문에 얼핏 정치적으로 읽히지 않는 작품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고도의 상징과 비유를 통해 정치적 효과를 드러내는 작품들이 쏟아지고 있고, 때로 작가조차 작품이 정치성을 이야기 하는지 모르지만 발표 시기와 해설에 의해 정치적 효과를 드러낼 때도 있다. 때문에 문학 작품이 작가의 손을 떠나 비평가의 사후 해설적 효과를 통해 '정치적 의미'를 부여받는 경우도 등장하고 있다.

젊은 작가들의 감각적인 소설, '소통 불가'라는 젊은 시인들의 난해한 언어 실험 등 새로운 형태의 문학 작품들이 '문학과 정치'란 담론과 함께 맞물려 회자되는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랑시에르의 유령이 배회한다

최근 '문학과 정치' 담론에서 내용보다 형식에 방점이 찍힌 배경을 더 살펴보자.

현재 국내 문학계에서 논의되는 '문학과 정치' 담론의 중심에는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가 있다. 1940년 알제리에서 태어난 그는 1960년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폴 리쾨르의 지도를 받았으며 1964 알튀세르가 주관한 '<자본>을 읽자'세미나에 참여하며 그에게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68혁명 후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비판하며 스승과 결별했고 정신분석학이 학계를 휩쓸던 1970년대 줄곧 19세기 유토피아 사회주의를 꿈꾸던 노동자들의 문서 더미 속에서 보냈다.

이런 그가 국내 문학계에 영향을 준 것은 <감성의 분할>,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등 최근 그의 서적이 번역되어 쏟아지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랑시에르는 인간의 감성(말할 수 있는 것, 볼 수 있는 것,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어떻게 선험적으로 나뉘며 프롤레타리아는 어떻게 그 선험적 형식의 '나눔 체계'를 재편성했는가에 주목한다. 문학은 그 '나눔 체계'를 대표하는 언어의 위계질서를 보여주는 수단이다.

그는 '문학의 정치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문학이 세계에 참여(앙가지망,engagement)한다는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문학이 사물들에 다시 이름을 붙이고, 단어들과 사물들 사이의 틈을 만들고, 단어들과 정체성 사이의 틈을 만듦으로써 결국 탈정체화, 즉 주체화의 형태, 해방 가능성, 어떤 조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 내는 데 개입한다는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입니다." (계간 <문학과 사회> 봄호, 자크 랑시에르 인터뷰)

문학의 정치성은 통상적 의미의 '정치행위'의 일종으로 문학 작품을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담론 체계에 대한 인간 감성의 재조정 작업'이라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2000년대 문인들이 추구하는 '문학의 정치성'은 촛불시위 내용을 줄거리로 문학작품을 쓰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들이 논하는 '문학의 정치성'은 촛불시위와 용산참사·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등으로 촉발된 6.9작가선언과 같은 문인들의 정치 행위가 어떻게 문인 개개인의 감성을 바꾸고, 나아가 이들이 써내는 개별 문학작품에서 어떤 미학적 형식으로 승화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인 것이다.

현재 랑시에르의 텍스트를 중심으로 '문학과 정치' 담론이 형성되는 배경에 대해 김형중 문학평론가는 "예술이 미적 자율성을 유지하면서도 정치적일 수 있겠는가라는 영원 회귀하는 질문에 해답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일 것"(계간 <문학과 사회> 가을호 기고 '문학과 정치 2009')이라고 설명한다.

시인 진은영은 올해 <창작과 비평> 봄호에 기고한 '감각적인 것의 분배'에서 "사회참여와 참여시 사이에서의 분열, 이것은 창작과정에서 늘 나를 괴롭히던 문제"라며 랑시에르를 소개하는데, 이후 랑시에르는 줄곧 '문학과 정치' 담론의 중심에 서게 된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성은 기존의 지배적 담론체계에서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옹호하거나 공격하는 '정치 행위'가 아니라, 그 지배적 담론체계를 파열시켜 새로운 종류의 감성적 분배를 가져올 삶의 형식을 만들어 내는 데 있다.(…)우리에게 필요한 미학적 실험은 예술과 정치라는 서로 이종적인 것들을 결합하는 다양한 방식에 대한 상상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랑시에르의 견해는 예술가를 자유롭게 하는 동시에 새로운 구속을 부과하는 듯하다.' ( <창작과 비평> '감각적인 것의 분배' 78~80 페이지)

문학 지상주의자들의 알리바이인가?

한편 이런 담론에 대해 '텍스트주의'로 환원된 문학형식 실험을 타당화시키는 '알리바이'로 작용할 뿐이라는 지적도 있다. 백낙청 문학평론가는 <창작과 비평> 겨울호 특집 '현대시와 근대성, 그리고 대중의 삶'을 통해 "치안(제도권 정치를 포함한 정치 행위)에 대한 고민이 결여된 '정치'에의 관심이란 무관심과 무책임에 대한 일종의 알리바이로 기능할 우려가 없지 않다"고 지적한다. 이에 대한 젊은 문인들의 생각은 어떨까?

김경주 시인은 "과거 문학이 직접적으로 정치를 말했다면, 지금 문학은 정치의 미시적인 징후를 드러내고 있고, 잊혀진 것을 회유를 하고 미학적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리얼리즘이 아니라, 리얼리티를 지향한다. 사회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모두 보여주는 것이 리얼리티다"라고 대답했다.

함돈균 평론가는 "양가성이 있다고 본다"고 전제한 뒤 "그러나 문학은 근원적으로 말을 바꾸는 행위다. (문학의) 자유는 근원적 차원에서 세계를 확장시키는 일이고, 예술이 형식을 바꾸는 과정이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성-감성을 바꾸는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신형철 평론가는 "젊은 문인들이 최근 문학과 정치라는 주제로 고민하는 것은 문인의 자의식보다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의식이 앞서 있는 활동이고, 이후에 문학적인 자의식이 따라온 거라고 본다. 이런 자의식이 문학으로 세련되게 전의시킬 수 없을까, 고민의 과정이 있다. (각종 문예지 특집으로 마련되면서) '문학과 정치'란 이슈가 과장되게 포장되고 랑시에르 등이 거명되고 있지만, 이는 문학이 정치와 결합되면서 다치지 않기를 원하기 때문"라고 말했다.

정리하자면, 2000년대 한국문학계가 주목하는 '문학과 정치'에 관한 일련의 논의들은 새롭게 출현한 젊은 문인들의 '정치적 감각'을 '형식적 전위, 실험'과 결부시켜 어떻게 '미학적 작품으로 완성'할 수 있는가에 관한 고민인 셈이다. 그리고 이 논의는 앞서 설명된 바와 같이 문학적·미학적 전위가 곧 정치적 전위가 될 수 있다는 의견, 문인들의 사회적 활동과 창작 행위를 일치시켜야 진정성을 갖는다는 의견, 문학과 정치를 매개물 없이 연결시키는 것은 위험하다는 의견 등 다양한 형태로 파편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 담론의 촉발이 어떤 문학적 갱신을 이룰지, 흥미롭게 지켜보자.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