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팝아트인가] 소비사회의 상품과 기호의 유희

이지현,Times Square_Acrylic and Enamel on Panel, Laminated Digital Print, Photo Collage(위), 김준, bird land-armani
공간은 단순히 우리가 살아가는 물리적 배경만은 아니다. 공간에는 인간을 길들여서 그에 맞는 인간형을 만들어내는 힘이 있다. 그러니까 자신의 내면세계는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한 공간에 따라 구성된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소비문화가 작동하는 도시가 키워낸 인물들이다. 동시대 젊은 작가들의 작업 역시 그러한 소비문화와 욕망을 스스럼없이 드러낸다.

80년대 후반 이후 한국 미술계에는 자본주의의 물질적 풍요를 은총으로 받은, 이른바 신세대가 등장한다. 90년대를 거치면서 현재 젊은 작가들은 도시적 일상과 풍요로운 소비문화를 직접적으로 반영하면서 이를 재현하는 작업들을 선보인다. 그들은 소비사회의 상품과 기호들을 가지고 유희한다.

왜 동시대 작가들은 소비사회를 주목하는가? 허망한 욕심에 휘둘려 진정한 자아에서 떨어져 나와 있는 우리의 소외된 주체를 되찾기 위해서일 것이다. 동시에 지금 자신의 삶을 규정하고 있는 실체를 깨닫기 위해서일 것이다.

사물, 상품이 가장 중요하게 되었다는 것, 그것이 바로 현대 소비사회의 특징이다. 그리고 현대미술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미 20세기 초 뒤샹의 작업은 이제 미술이 사물에 기생해나가는 일이 되었음을 증거한다.

윤정미, 핑크프로젝트_채연이와 채연이의 핑크색 물건들
전통적인 예술에서 사물은 상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와 예술에서의 사물은 더 이상 인간의 심리적, 정신적 가치를 대변하지 않고 그 자체로 자율적인 요소가 되었다. 아예 워홀은 자신의 작업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팝 아트란 사물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쏟아져 나오는 상품을 욕망하는 일이다. 욕망은 단순히 부족함을 충족하는 욕구와 달리 단순한 충족을 미루고 여전히 충족을 지향하는, 욕구가 기묘하게 뒤틀려서 발생하는, 욕구에 기생해서 작동하는 메타적 욕구다.

소비자의 소비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일은 산업자본의 입장에서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사활이 걸린 문제다. 새로운 상품을 효과적으로 홍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치가 아케이드, 백화점, 잡지. 신문. 인터넷과 대중매체 그리고 영화와 같은 대중예술이다.

대중매체의 유혹에 쉽게 넘어간 소비자들은 기호가치가 옮아간 새로운 상품을 계속해서 사들인다. 그것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시각경험이다. 자신을 타인과 구별해줄 수 있다고 믿는 상품들을 구매하지 못할 때 우리는 우울증을 겪는다. 돈이 없으면 우울하고 돈이 있으면 명랑해진다는 것이야말로 산업자본이 우리의 욕망을 길들이는 데 성공했다는 분명한 징표다.

이렇듯 소비사회는 필요 이상으로 상품을 구매하도록 하는 일종의 '환각의 체계'이다. 노동자가 자신이 만든 물건을 자신의 임금 가치보다 훨씬 더 비싸게 소비한다는 사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가 멈추지 않고 작동하는 핵심비밀일 것이다.

오늘날은 어느 특정의 물건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어떤 것을 욕망한다.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사물을 대신하거나 재현하는 그 무엇이 바로 기호다. 예를 들어 우리는 옷/사물이라는 실제의 물건이 아니라 가상의 혹은 허구의 이미지를 욕망한다.

소비 역시 하나하나의 기호들(소비들)을 배열하고 통합하여 하나의 커다란 의미를 만들어내는 의사소통의 수단이며 교환의 구조이다. 개인의 소비행위는 그 사회의 코드화된 교환의 체계 안에 들어간다. 소비는 타인과 구별되고 싶은 욕구의 표출이다.

현대인은 소비인간(homo consomatus)이다. 현대는 실제 물건의 소비가 아니라 상징과 기호를 소비한다. 그 상징과 기호를 열심히 그려내고 있는 것이 동시대 미술의 한 초상이다. 그리고 그것을 팝이라고 부른다. 분명한 것은 최근 한국 현대미술의 지형이 극사실주의와 팝 아트의 변종들로 채워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로지 이 두 가지 경향만이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단 시장에서 수요가 있으니까 그럴 것이고 당연히 화랑이 그런 작품만을 요구하니까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작가들 자신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자신이 욕망하는 사물, 상품기호들을 그린다는 것이다. 이 소비사회의 핵심적인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얘기다.

동시에 그것은 사물의 표면을 열심히 따라가보는 단순한 그리기다. 미술에 대해 머리 아프게 고민하거나 애쓰지 않고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알리바이를 다소 편하게 제공해주는 것이 지금의 그리기다. 그것은 지루하게 사물을 따라 그리면서 권태로운 시간을 때우는 일이다. 감각적인 사물과 기호들을 가지고 유희하는 일이고 그것들과 한 몸으로 접속되는 일이다. 매우 자폐적인 그리기, 삶의 회로인 셈이다.

생각해 보면 이미 지나간 이 팝 아트의 형식들이 전면적으로 부상하고 있음은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현대미술의 속성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이질적이다. 고도의 소비사회와 대중문화의 번성, 영상이미지의 번창 속에서 파생된 대중들의 미적 감수성과 맞물린 부분도 있을 것이고 보수적 미술시장의 유혹과 관련 있을 것이다.

동시대 젊은 이들, 작가들은 귀엽고 예쁘고 감각적인 것들을 전적으로 갈망한다. 미술을 통해 행복해지고 싶어한다. 이제 미술은 그들의 욕망을 보상하는 선에서만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키치적이고 팬시한 감성, 장식적이고 달콤하며 관능적인 미감이 물씬거리는 이 통속적인 미적 감수성의 근원이 새삼 팝이었음을 깨닫는다.

이른바 미술과 대중문화의 접점에서 시대적 아이콘을 작품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작업, 그러니까 가볍고 피상적인, 달콤하고 우호적인 미적 감수성과 함께, 인스턴트문화, 일회용 문화에 대한 선호가 적극 반영된 미술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를 새로운 팝이라고 부를지, 혹은 자생적인 팝 아트의 등장이라 할지 망설여진다.

혹자는 이를 후기 팝 혹은 네오팝, 코리안 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근자에 그런 흐름을 반영하는 전시가 유독 줄을 이었다. 디자인, 만화, 패션 등의 대중문화에 익숙한 세대들이 대중 문화적 도상과 잔상을 어떻게 흡수하여 자기화된 아이콘으로 형성해냈는지 보여주고 있는 사례들이다.

알다시피 1960년대 중엽 워홀은 대중매체적인 시각문화의 기술을 미술에 적극 접목했다. 기존 미술의 폐쇄된 서술방식을 일상생활의 흐름으로 바꾸어 놓았고 사물과 지각의 세계를 구성하는 원리가 다름아닌 시뮬라크르에 있음을 최초로 지각한 이다.

그러나 오늘날 워홀의 진정한 정신이 단지 감각적인 표피이미지로 차용되고 지나간 팝에 기생하고 패러디해서 연장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자본주의사회와 미술이 더 이상 새로움을 추구하지 못하고 그저 '동일자의 무한증식'상태에 빠져들었음을 간파하고 유일물을 생산하는 장인적 생산의 영역으로 남은 미술과 예술가라는 주체의 자리, 그 아우라를 기꺼이 지워버린 존재가 바로 워홀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과 함께 팝의 정신과 포스트모던의 담론 역시 증발되었다.

그런데 새삼 다시 팝이 논의되고 부활한다. 디지털 기술과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가상의 이미지가 활개 치는 시대에 대중과 미디어와 결합되어 있는 그 이미지들의 삶도 결국 팝이라고 부를 수 있기에 그럴까? 그러나 나로서는 시장논리와 출구 없는 미술계가 새삼 팝에 기생하며 감각적 이미지를 소모하는 형국이 오늘의 미술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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