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팝아트인가]

1-김동유, 'Audrey Hepburn VS Gregory Peck' 227×181cm_2009. 2-이동재, 'icon' acrylic, resin object, on, canvas, 100cm×100cm_2009. 3-위영일, '짬뽕맨 에로22', 163×92cm_acrylic colors, silk screen on panel_2009. 4-유영운, '미디어의 눈', 잡지, 전단지, 텍스트, 인쇄물, 스티로폼_176×80×87cm_2009
눈부신 대리석, 아니 빛나는 코팅 종이가 탑처럼 쌓여 그리스 신전으로 세워졌다. 그곳을 차지한 이는 제우스와 헤라가 아니다. 3등신의 통통한 몸매를 '과시'하는 마릴린 먼로, 김정일, 미니마우스, 박정희, 그리고 엘비스 프레슬리다. 그들의 발치엔 온몸에 가시가 돋은 복어 인간이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치켜든 채 신전을 향해 환호하고 있다.

그 뒤로 원더우먼, 스파이더맨, 헐크 등 서구의 캐릭터들이 익숙하면서도 낯선 모습으로 변형되어 있다. 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날 선 시선. 기형적으로 층층이 자리 잡은 열두 개의 눈동자를 쉴새 없이 굴리는 사나이. 앞의 작품이 '현대의 신화'와 복어로 상징된 '욕망'이었다면, 다수의 눈을 가진 남자는 '미디어의 눈'이란 제목을 가졌다.

이들의 몸을 둘러싼 종잇조각의 정체가 매스미디어로 대변되는 '잡지'조각인 것을 알게 되면 작가의 의도는 보다 명확해진다. 유영운 작가는 현대사회에서 매스미디어를 통해 신화적으로 '만들어진', 그리고 그것을 닮고자 비대하게 팽창된 대중의 욕망을 작품으로 담아내고자 했을 것이다. 대중소비사회가 잉태한 예술인 팝 아트에 대한 비판, 어쩌면 그것은 곧 자아비판일지도 모른다.

한국 팝 아티스트의 작업 방식은 의외로 다양하다. 독자적인 캐릭터를 개발한 작가군, 대중적 이미지를 번안하는 작가군, 고전 팝 아트라 불리는 민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작가군, 자본주의 팽창으로 드러나는 폐해를 비판하는 작가군 등 내용이나 형식적인 면에서 '팝 코드'를 독자적인 방식으로 차용하고 있다.

스타와 명화,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는 익숙한 방법

1-김영민, '슈퍼볼', 캔버스에 아크릴_210×175cm_2005. 2-이화백, '행복한 콧물 2', 77cm-77cm, oil on canvas, 2008. 3-윤종석, '동상이몽' 259×194 acrylic on canvas 2009. 4-홍지윤, '가시나무' A Thorn bush 210×150cm 수묵채색, 장지 acrylic & ink on rice paper 2009
체 게바라, 앤디 워홀, 마릴린 먼로, 코카콜라, 루이비통 등 대중 스타나 브랜드를 패러디하거나 변용해 나름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소재로 삼는 작가들은 앤디 워홀 이후에도 여전히 많다. 이제 이러한 변용은 앤디 워홀의 방식을 쫓는다기보다 자신의 작업을 대중에 알리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 되었다. 국내 화단에서 주목할 만한 많은 팝 아티스트들이 대체로 이 부류에 속한다.

한 캔버스에서 두 명의 초상을 각기 크고 작게 조합해내는 김동유 작가는 원전의 팝 아트를 인용하면서도 독창적인 해석을 해낸다. 배우 클라크 게이블의 작은 초상은 거대한 그레이스 켈리로 완성되는 식이다.

작은 초상과 큰 초상 사이에는 어떤 연결고리가 생기기도 하는데, 체 게바라의 초상은 수천 개의 피델 카스트로의 초상으로 만들어지고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얼굴로 구성되는 식이다. 한 그림에 존재하는 두 개의 시점, 독특하고 흥미로운 작업으로 보여진다.

이동재 작가 역시 체 게바라나 브루스 리, 제임스 딘, 박지성 등 유명인을 주로 다룬다. 그런데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하는 것은 붓과 유화 물감이 아니라 쌀, 팥, 알약, 유리알 혹은 별 모양의 스티커 같은 것이다. 바로 그 오브제의 특이성이 이동재 작가의 아이덴티티를 드러낸다.

회화, 조각, 설치를 넘나드는 위영일 작가는 베트맨이나 슈퍼맨, 혹은 이들 만화영화의 영웅 캐릭터의 이종교배를 시도한 '짬뽕맨'시리즈를 작업해오고 있다. 이들을 통해 사회적 우상은 희화화된다. 그의 작품세계를 주목하는 윤진섭 미술평론가는 '상상력이 풍부한 작가'로 그를 평하고 있었다.

국내에서 한바탕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을 4가지 색의 '행복한 콧물'로 번안한 이화백 작가는 미국 팝 아트의 대표작 중 하나를 비틀며 원전 팝을 향해 조소를 날리기도 한다.

민화를 재해석하거나 혹은 자본주의를 비판하거나

축구선수 박지성의 유니폼을 불가사리 모양으로 접은 것을 캔버스에 그려내는 윤종석 작가. 코카콜라와 펩시 로고가 새겨진 후드 티를 총처럼 접어 어딘가에 겨냥하는 이미지는 자본주의 시대의 팽배한 욕망과 폐해를 재치 있게 꼬집는다.

현대엔 민화를 재해석하는 방식도 팝 코드로 통하는 것일까? 전통 산수와 민화의 현대화를 위해 적잖은 한국화가들이 팝 아트를 시도하고 있다. 팝 적인 소재로 작업을 하는 작가 중에 이 범주에 속하는 작가들이 수적으로는 가장 많다. 이름이 비슷한 두 화가, 홍지윤과 홍지연 작가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팝 코드를 민화 안으로 끌어들였다.

홍지윤 작가는 자신이 그린 꽃 이미지에 한국 대중가요 가사를 적어 시서화의 현대적 확장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민화를 이 시대로 가져온 홍지연 작가에 대해 고충환 미술평론가는 "현란한 색채, 꼬리에 꼬리를 물며 계속해서 변형되는 형태들을 볼 때 내용적인 면에서의 팝이라기보다 형식적인 면에서 팝 아트라고 볼 수 있다. 어떤 관계간의 소통이 아닌 자신의 판타지를 일구어낼 줄 아는 다재다능한 작가" 라고 평했다.

그런가 하면 얼굴이 하트모양인 '하트맨' 연작으로 알려진 강영민 작가는 독자적인 캐릭터로 팝 아트적 성격을 강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앤디 워홀의 팝 아트 규칙에서 벗어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일상에서 보여지는 모든 것이 팝 아트의 소재가 되는 것에 대한 반동으로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들추어 캐릭터로 완성해냈다. 하지만 지극히 개별적인 사랑의 감정과 아픔은 오히려 현대인의 상처와 갈등이란 보편성으로 치환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삶 자체가 팝아트였던 20세기 예술의 아이콘

'앤디 워홀의 위대한 세계' 전

공장처럼 작품을 찍어내던 팩토리, 거대 수입을 보장한다는 이유로 즐겨 했던 유명인사의 초상화 작업, 실험영화 감독, 케이블 TV진행자에 이르기까지, 늘 이슈를 몰고 다니던 그의 삶은 그 자체가 팝 아트였다. 팝 아트의 무너지지 않는 아성, 앤디 워홀(1928∼1987).

최근 10여 년간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전시회가 열린 작가이자 옥션에서 최고가를 경신하며 여전히 상업적으로도 건재함을 드러내는 20세기 예술의 아이콘이기도 하다. 몇 달 전 <앤디 워홀 일기>가 책으로 출판되면서 다시금 화제를 모았던 그의 특별전이 오는 12월 12일부터 100일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국내 최대 규모의 회고전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앤디 워홀의 위대한 세계'는 총 5개의 테마로 구성되어 워홀의 다양한 작품 세계를 선보인다. 1부에서는 코카콜라, 캠벨 수프 깡통, 1달러 지폐 등을 소재로 한 작품을 비롯해 수집광의 면모를 보여주는 방대한 소장품을 전시한다. 2부에서는 그의 단골 소재였던 '죽음'을 모티브로 한 대표작을 선보이며 3부에서는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추상적 성향의 작품이 전시된다.

4부에는 워홀의 자화상 시리즈가 펼쳐지며 5부에는 마이클 잭슨, 마릴린 먼로, 존 레논 등 워홀과 교류하던 셀러브리티의 초상화 작품을 볼 수 있다. 총 250여 점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대중의 시선 한가운데에 머물면서 대중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었던 앤디 워홀을 만나는 자리가 될 듯하다.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