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되고 싶으세요?] 신춘문예라는 위험한 열병 끝에 삶을 갱신시키는 '시' 얻어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작은 섬 출신이 중졸 학력으로 서울에서 사는 일은 미달된 학력만큼의 포기를 배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사회보장과 일요일을 포기해야 했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포기해야 했다.

그렇게 서울에서 십여 년을 구르면서 내가 얻은 것은 열등감과 대인기피증, 그리고 카드빚과 시집 한 권이었다. 포기하고 싶지 않은, 포기할 수 없는 시집 한 권. 표지에는 <1995년 신춘문예 당선 시집>이라고 쓰여 있었다.

시집을 나에게 선물한 여자를 좋아했었다. 혼자 좋아하는 여자에게 숨겨온 마음을 고백하듯, 시인이 되고 싶다는 말을 그녀에게 수줍게 했었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얼굴을 잊을 만하면 학교에 가는 학생이었다. 선생의 폭력이 싫었고 공부라는 것이 싫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도 별로 좋아하진 않았다. 학교 가는 길을 꺾어 산으로 가거나 다락방으로 숨어들었다.

심심하면 세계의 명시들이 인쇄된 누이의 일기장을 훔쳐보고는 했었다. 그 때 읽었던 시들은 지금까지도 내 영혼 속에 구름처럼 떠다니고 있다. 그때부터 시인들은 특별한 존재들로 내게 각인되었다. 어쩌면 그때부터 나는 시인을 꿈꾸었던 것일까.

김일영 시집 '삐비꽃이 아주 피기 전에'
그러므로 그녀에게 말했던 내 꿈은 거짓은 아니었지만 그보다는 초라를 숨기기 위한 허풍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걸 알았을까. 그녀는 얼마 후 내게 "꿈을 잃어버리지 마세요." 라는 쪽지가 꽂힌 시집을 건넸다. 그리고 떠나버렸다. 내 것이 아니었으니 떠났다고 할 것도 없지만 아무튼 그 시집으로 나는 처음 신춘문예라는 제도를 알게 되었다.

시집 한 권이 전 재산이었던 스물아홉, 뭘 다시 시작하기에도 그렇다고 포기하기에도 애매한 나이였다. 내 삶으로부터 내가 버림받았다는 생각으로 절룩거리던 나는, 이혼서류를 만지작거리며 헤어질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기분으로 시를 배우러 갔다. 학력, 나이와 상관없이 받아준다는 광고를 보고 간 곳은 사회교육원은 아니었지만 그 비슷한 곳이었다.

나처럼 찌질하게 살아온 인생도 문학 안에서는 대접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창밖에 봄볕을 받아 빛나던 교정의 벗꽃잎들이 내 눈 속으로 가득 흘러들어왔다. 신춘문예 당선시집을 내게 선물했던 여자가 좋은 직업을 가진 남자와 결혼을 한 해였다.

좋은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그저 시인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시를 썼다. 막 출발하려 하는 마지막 버스를 쫓아 달리듯이 나는 허겁지겁 시를 쫓아 밤을 달리고는 했다. 읽어본 글줄도 별로 없고 글 같은 글을 써본 적도 없는, 초등학교 수준의 문법과 문장력이었지만 시는 그런 것에 차별을 두지 않았다. 시집을 사 모으고 읽으면서, 절실한 곳에 살고 있는 언어들을 찾아 캄캄한 창고를 더듬듯 시편들을 써갔다.

술잔의 숫자가 늘고 일 년이 지났을 때, 어설픈 시들을 모아 처음으로 신춘문예에 투고를 했다. 당연히 낙방이었다. 그나마 최종심에서 아슬아슬하게 떨어졌다. 그 다음 해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시인의 궁색한 삶을 선택하기로 다짐했다. 다소 비장했지만 허영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책임질 수 없을 것 같은 착한 여자를 버리듯 떠나보냈고,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그리고 서울을 떠나 누이가 사는 영덕 강구로 내려갔다. 그 곳에서 나는 다방 아가씨들을 배달지로 태워다주고 태워오는 카맨으로 일했다.

시인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허영은 무슨 일을 하더라도 참을 만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마법과 같았다. 동네 양아치들이 주는 치욕도 견딜 만했다. 그곳에서 나는 저녁을 함께 먹던 사람이 한 시간 후에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다방은 문을 닫았다. 공포와 불안은 한동안 나를 따라 다녔다.

겨울을 기다리며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갔다. 신춘문예 말고도 문예지들을 통해서도 시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무지한 나에게는 신춘문예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또다시 신춘문예 계절이 되어 나는 그동안 보물처럼 써 모은 시들을 몇 군데 신문사에 보냈다. 연말이 되어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아는 사람도 없는 그곳의 사글세방에서 나는 그 해의 마지막 날을 캄캄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하수구처럼 외로웠다.

어둠이 무겁던 방에 웅크리고 있던 나를 깨운 것은 당선 통보였다. 내 떨리던 마음과 상관없이 통보를 알려주던 기자는 내일 아침까지 당선소감을 써오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당선자로 해야 된다고 했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좋았다. 나는 허겁지겁 서울에 올라와 신문사에 들러 사진을 찍고 인터뷰를 했다. 뭔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금메달을 걸고 귀국하는 스포츠인 같은 기분으로, 짐을 싸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나 세속적 욕망과 시인은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몇 달이 걸리지 않았다. 바퀴들이 득실거리는 방에서 혼자 공부를 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책들은 잘 읽히지 않았고 내면에 이글거리는 혼란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공부를 하고 싶었다. 시인이 되고 싶어 신춘문예에 매달린 것처럼 대학은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검정고시로 다 늦게 들어간 대학에서 팔팔한 청춘들과 같이 공부를 하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할 만했다. 틈틈이 시를 썼고 유명한 시인이 되고 싶은 욕심을 떨치지 못한 채 시에 정성을 다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신춘고아답게 청탁은 거의 받지 못했다. 시집 원고는 보내는 곳마다 거절당했다. 그렇게 밑천 없이 시작한 살림이다보니 첫 시집까지 6년이 걸렸다. 신춘문예는 나에게 허영이었지만 그 허영을 따라 가다보니 나는 책임져야 할 시집 한 권을 갖게 된 것이다.

시가 나를 찾아와 준 뜻을 다시 생각한다. 시는 웅덩이 같은 나를 정화하고 인생을 견딜 만한 것이 되게 도와주었다. 또 삶을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인색한 세속적 평가에 불평하지 않고 나에게 도움이 되는 시, 자기를 정화하고 삶을 갱신시켜가는 시를 쓰면서 늙어가는 것도 괜찮은 삶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동의하신다면 신춘문예라는 위험한 열병을 깊이 앓아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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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영 시인 200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