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공연의 변신] 동시대성 효과 발휘하기 위해 현대적 초장과 각색 전제되야

'둥둥 낙랑 등'의 이지수, 곽명화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들은 한국을 알기 위해 서울의 인사동이나 안동의 하회마을을 찾는다. 일본에서는 도쿄나 교토에 있는 가부키 공연장이 그런 곳이다.

도쿄의 긴자에 있는 가부키 공연 전용극장 '가부키자'는 평일에도 2000석에 가까운 객석이 거의 매진될 정도로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 가부키자를 포함해 전 일본에서 1년간 가부키를 관람하는 관객은 약 30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해조차 어려운 고어(古語) 대사로 이뤄진 가부키의 대중적인 인기는 한국의 전통예술의 현실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일본의 가부키, 중국의 경극은 각각의 형식은 다르지만 그것이 기능한 바는 우리나라의 전통예술과 흡사한 면이 있다. 독재를 일삼는 위정자나 부를 부당하게 독식하는 상류층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는 서양의 뮤지컬이나 오페라 전통에도 남아있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의 서민예술인 판소리나 탈춤, 광대놀이 등도 현대적 변용 방식에 따라 인기있는 대중예술로 발돋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해준다.

오래 전부터 전통예술은 원형의 보존과 함께 끊임없이 현대적 진화를 거듭하며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최근 10여 년간 각종 국악공연을 주름잡고 있는 퓨전국악 열풍은 그 대표적인 예다. 대형 발레, 뮤지컬, 클래식 공연이 선점한 연말 공연시장에서도 국악공연들은 '퓨전한' 형태로 관객에게 다가간다.

단순히 크리스마스나 연말이라는 시기를 노리지 않은 뚝심 있는 공연들도 있다. 연말의 들뜬 분위기를 충분히 활용하는 공연들과, 진중한 작품으로 차분히 송년을 맞자는 또 다른 양상은 관객에게 다가가기 위한 전통문화 콘텐츠의 노력을 가늠하게 한다.

남산국악당 크리스마스 스위트 콘서트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맛을 낸 국악 공연

'징글벨', '울면 안 돼', '펠릭스 나비다' …. 크리스마스를 대표하는 캐롤들이 유난히 구성지게 들려온다. 뭔가 구슬프기도 하고 가느다란 소리를 가만히 좇다보면 뜻밖에도 그 정체는 피리나 해금이 내는 소리다.

종교 가곡에서 시작한 캐롤은 이제 전 세계인이 전 장르로 변주할 수 있는 대중적인 노래가 됐다. 때문에 국악기로 연주하는 캐롤도 별로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럼에도 퓨전국악에서 시도하는 크로스오버조차 접하지 못했던 관객에게 크리스마스 옷을 입은 국악의 모습은 여전히 낯설게 느껴질 만하다. 올해는 이런 낯섦을 해소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크리스마스를 즈음해서 국악공연장이나 공연단들이 잇따라 '국악으로 크리스마스 즐기기'라는 콘셉트로 공연을 선보이기 때문이다.

14일 서울남산국악당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 스위트 콘서트 <사랑만들기>'는 대중에게 친숙한 국악인 겸 배우 오정해를 사회로 해 국악과 재즈의 만남을 마련한다. 이 콘서트에서 함께 무대에 오르는 재즈 아티스트 이정식과 국악인 이상준과 박경훈은 캐롤을 비롯해 클래식과 영화음악, 국악과 재즈 연주곡을 연주한다. 색소폰과 피리, 피아노가 어우러지는 이색적인 무대는 익숙한 선율 아래 장르의 구분을 잊게 만든다.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은 제302회 정기연주회를 <성탄음악회>라는 제목으로 연다. 시립단체인 만큼 이번 크리스마스 콘서트는 화려한 진용을 자랑한다. 서울시합창단, 서울시소년소녀합창단 등 이웃단체와 코리아 오페라 콰이어, 송솔나무, 비바 보체, 필링스테이션 등 다양한 장르의 뮤지션들이 '고요한 밤 거룩한 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등 크리스마스 노래들을 들려준다. 특히 해금연주자 김유나의 i-해금(전자해금) 독주는 국내 최초로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이목을 집중하게 만든다.

숙명가야금연주단
한편 지난해 국악인형극 <덩덩 쿵따쿵>을 상설 시리즈로 기획해 하반기 연속 매진을 기록했던 경기도국악당은 올해 크리스마스 특별공연으로 <크리스마스 쿵따쿵>을 무대에 올린다. 이번 공연은 48년 동안 한국 인형극계를 이끌어 온 현대인형극회의 섬세한 춤사위가 돋보인다.

부채춤과 장고춤, 선녀춤에 이어 사물놀이로 이어지는 전통춤의 향연은 어린 관객뿐만 아니라 성인 관객들의 어깨까지 들썩이게 한다. 작곡가 박병오의 지휘로 국악 연주자들이 해금과 소금으로 연주하는 크리스마스 캐롤은 비교적 대중적 친화력을 가진 국악인형극의 또 다른 가능성을 시험해볼 수 있는 기회다.

젊은 국악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 국악의 새로운 미래를 모색하는 '서울젊은국악축제'는 올해도 어김없이 한해 결산 무대를 마련했다. 음악 속에 시대감각을 담아내는 실험을 계속해왔던 이 행사는 15일 열리는 과 피아니스트 박종훈의 크리스마스 콘서트로 그 정신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클래식과 팝의 재해석, 비보이와의 협연, 라운지 음악 도입 등 새로운 공연예술코드를 선도해온 의 이번 협연은 피아노와 어떤 앙상블을 보여줄 것인가로 또 한 번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을 이끌고 있는 송혜진 숙명여대 전통문화예술대학원 교수는 "예년에 비해서는 국악 관련 공연이 관심을 많이 받고 있지만, 홍보나 마케팅의 어려움으로 인한 현실에서 이런 공연은 청중이 국악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고 설명했다. 송 교수는 "20세기 들어 음악 언어들이 다양해진 환경에서 가야금은 다른 언어를 녹여낼 수 있는 효과적인 매체가 될 것"이라며 이번 '가야금 크리스마스 콘서트'에의 참여를 당부했다.

명작 콘텐츠로 마니아 관객 양성 기대

'덩덩 쿵따쿵'의 탈춤 장면
하지만 크리스마스나 연말의 감성적 관객들을 염두에 두기보다는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 포석을 둔 작품들도 연말 관객들의 시험대에 오른다.

오는 22일부터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무대에 오르는 최치림 연출의 <둥둥 낙랑 둥>은 <삼국사기-고구려 본기>에 실려있는 '자명고' 설화를 새로운 시각으로 재구성한 최인훈 작가의 원작을 무대화한 작품이다. '자명고' 설화는 올해 드라마(<자명고>)와 발레(<왕자 호동>) 등으로 다양하게 조명되며 새로운 인기 콘텐츠로 부상 중이다.

기존 설화에서 호동과 낙랑공주는 나라에 대한 충성심과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 갈등하다 비극적 결말을 맞이했다면, 최인훈의 원작 희곡은 이 설화의 다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낙랑 공주의 쌍둥이 언니가 호동의 의붓어머니가 된다는 설정을 통해 또 다른 사랑에의 욕망이 결국 파멸로 이어지는 과정을 서사적으로 그려낸다.

고전이 갖는 제약에도 불구하고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는 '동시대성'을 갖췄다고 평가받는 <둥둥 낙랑 둥>은 전통춤과 무술, 전통 국악기의 라이브 연주 등이 어우러져 원작이 가진 샤머니즘과 에로티시즘적 정서를 효과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이상일 평론가는 이 작품에 대해 "한국 최초의 '시극(詩劇)'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고 평했다. 그만큼 절제와 압축, 생략으로 점철된 최인훈 작가의 시적 언어들이 무대 위의 호동과 낙랑을 통해 표현되는 과정도 흥미로운 관람 포인트다.

한편 지난 2003년 판소리가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면서 그 중요성이 새삼 환기된 창극 한 작품도 주목할 만하다. 그동안 일본의 가부키의 성공과 곧잘 비교돼왔던 창극은 판소리에 뿌리를 둔 만큼 판소리 어법의 보전이라는 전통 유지와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상품으로의 위상 확립을 과제로 고민해왔다. 5일부터 달오름극장 무대에 오르고 있는 국립창극단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 고민의 한 대답이 될 수 있다.

창극 '로미오와 줄리엣'
원작은 국립창극단 원로단원이기도 한 명창 안숙선 선생이 작창에 참여해 신명나고 가슴 아픈 한국식 음악극으로 재탄생됐다. 창극화된 원작 캐릭터는 몬테규 가의 로미오와 캐퓰릿 가의 줄리엣은 각각 경상도 함양 귀족 문태규의 아들 로묘와 전라도 남원 귀족 최불립의 딸 주리로 재치있게 바뀌었다. '판소리하는 로묘와 주리'는 2월 초연 때 관객의 흥미를 돋우는 데 성공했고, 이후 가을에 열린 서울국제공연예술제의 개막작으로 초청되며 전통문화의 세계화를 향한 순항을 이어갔다.

번안극을 창극화한 첫 번째 시도였던 <로미오와 줄리엣>은 창극의 대중화에 적지 않게 기여했다는 점에서 현대적 창극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번 공연은 그간 셰익스피어의 시극이 창극화되면서 지나치게 생략되거나 이해하기 어려웠던 부분이 수정보완되는 만큼, 보다 세련된 창극 <로미오와 줄리엣>을 만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셰익스피어가 위대한 작가인 이유는 시대 불문, 장르 불문 통용되는 동시대성이다. 단 그 동시대성이 항상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관객의 입맛에 맞는 현대적 포장과 각색의 적절한 적용이 전제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음악을 재해석하거나 타 장르와 결합하며 새로운 형태의 공연을 창출하는 것 역시 여전히 필요한 과정이다.

그래서 공연계 관계자들은 "단기적으로는 대중 관객의 관심을 모을 수 있는 기획공연으로 끊임없이 전통예술의 존재를 환기시키고, 장기적으로는 전통예술만의 매력 안에서 동시대성을 모색하는 고민과 노력이 더 필요하다"고 조언하고 있다.

▶▶▶ 관련기사 ◀◀◀
▶ 연말 '공연 대란', 전통 공연의 생존법은
▶ 크리스마스 맛 낸 전통공연, 관객 입맛 바꿀까
▶ 새로운 전통 공연의 출발 조건
▶ 전통문화 콘텐츠의 새 가능성 보여줬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