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공연의 변신] 문화적 맥락 읽어내는 안목과 우리만의 창조적 상상력 필요

강은일 해금연주자
크리스마스에 국악을 듣는다? 몇 해 전부터 12월의 국악공연이 눈에 띄게 풍성해지면서 이 사실은 이제 낯선 얘기가 아니다. 국악관현악단과 같은 국공립단체는 12월 중 '송년콘서트'로 한해를 마무리한다. 다른 공연보다는 대중적이다. 가수들이 국악관현악단과 협연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목이 더 집중된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이브, '정길선 가야금 콘서트'가 국립국악원(우면당)에서 열렸다. 무대만 봐도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 캐럴 연주도 빠지지 않았다. 지난해 공연의 성공에 힘입어, 중견연주가 정길선은 12월 초 크리스마스 캐럴 음반을 출시했다.

"얼쑤, 크리스마스!" 올해 성탄절 당일, 국립국악원(우면당) 무대에는 예가회가 오른다. 문재숙(이화여자대학교 교수, 가야금산조 인간문화재)을 중심으로 한 예가회는 주로 가야금을 전공하는 기독교인의 모임이다.

그런데 이렇게 성탄절과 연말의 의미에 충실한 공연이 있는 반면, 사실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다. 국악계에서 12월에 공연이 몰리는 원인에는 그다지 바람직하지 못한 것들도 있다. 가령 문화재단과 같은 곳에서 지원을 받은 연주가들은 해를 넘기기 전에 공연을 치러내야 한다. 그 때문인지 그런 공연 중에는 부실한 행사들이 많다.

매년 치러지는 문화예술계 각 분야의 시상식은 그 분야 사람들만의 축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밖의 사람들에게도 특별한 관심거리가 된다. 국악 분야에서도 그런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KBS국악대상이다. 한 해 동안 우수한 활동을 펼친 국악인들에게 상을 주고, 이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축하받는 자리다. 그런데 이 시상식이 아쉽게도 큰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다.

창작국악그룹 그림 'The 林'
사실 많은 사람들이 후보가 누군였고, 어떤 사람이 최종적으로 선정됐는지 잘 모른다. 더불어 지방에서 활동하는 국악인들에게 국악대상이 크게 열려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만약 KBS국악대상이 앞으로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범 국악계에서 새로운 연말 국악축제를 만들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한 해의 끝에 자리한 행사들은 국악이 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게 하는 초석이 되고 있다. 2009 서울젊은국악축제(12.11~18, 노원문화회관, 마포아트센터 등)는 앞으로 더욱 기대되는 축제다. "추운 겨울에 뿌리를 내린 우리음악이 자라 '꽃이 필 때까지'"라는 슬로건을 내건 이 축제는 국악계의 '청년정신'을 확인할 수 있는 축제다. 올해 처음 연말에 열리는 이 축제는 앞으로 국악계의 겨울 시즌 대표 축제로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제까지 연말 최고의 화제 공연은 남산국악당에서 열리는 24시간 논스톱 콘서트였다. 오후 여섯 시에 진도북놀이로 시작된 이 공연은 6시간 단위로 진행되었다. 판소리, 퓨전국악, 정악, 산조와 시나위 등으로 나누어 국악계의 기량이 출중한 20대와 30대가 주축이 됐다.

이 공연은 우리나라 공연사에서 명실상부한 최초의 24시간 마라톤콘서트로, 국악방송을 통해서 인터넷TV로 실시간 생중계되었다. 특히 자정부터 오전 6시까지 계속된 심야공연은 비교컨대 홍대 클럽과 다를 바 없었다. 홍대 클럽에서의 공연이 젊은이에 국한된 반면, 남산국악당의 공연은 젊은이는 물론 노부부, 또한 한 가족이 모두 관람을 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지난해 첫선을 보여 화제가 된 '겨울, 국악한마당'은 올해도 1박2일 콘서트 '남산골에 도깨비가 떴다"라는 공연으로 대중에게 다가갔다. 공연시간은 줄었지만, '도깨비'라는 주제를 정해서 무대와 객석이 함께 놀 수 있는 공연으로 기획되었다. 지난해에 시작돼 올해까지 이어지는 이런 공연은 다른 분야가 흉내낼 수 없고, 다른 분야보다 앞서가는 공연 형태임에 틀림없다.

국립국악원 창작악단
해마다 연말이면 세계 곳곳에서 연극 <크리스마스 송가>와 발레 <호두까기 인형>을 만난다. 과연 이 땅에선 어떤 자생적인 연말 공연을 만들어내야 할까? 해답은 둘이다. '굿'과 '궁중음악'이다. 이런 전통을 바탕으로 새로운 무대공연을 만들어내야 한다.

물론 굿은 여전히 단순한 미신으로 여겨져서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굿은 이제 우리네 세시풍속과 민속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 민족은 굿을 통해서 벽사진경(壁邪進慶)을 갈망했다. 그간의 나쁜 것을 내몰고, 좋은 것을 얻고자 하는 소박한 바람이 거기에 담겨 있다.

한 해의 끝자리에서 진도씻김굿이나 동해안별신굿의 굿판이 열리는데, 이를 무대예술로 보다 세련되게 만든다면 국내외 많은 사람들의 더욱 더 이런 무대에 관심을 쏟게 될 것이다. '굿'은 한국이 보유하고 있는, 매우 '전통적'이면서도 매우 '현대적'인 공연양식으로 정착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공연은 한해의 마지막에 열릴 때, 그 의미와 재미를 더할 수 있다.

또 하나는 궁중음악 공연이다. 그리고 이는 국립국악원에서 열릴 때 더욱 영향력이 크다. 국립국악원에선 그동안 '태평지악' 등 궁중음악을 소재로 해서 대표적인 브랜드를 만드는 데 힘써왔다.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공연이 '연례(年例)적인 연례(宴禮)'가 되지 못한 점은 못내 아쉽다.

우리에겐 <수제천(壽齊天)>과 <여민락(與民樂)>이라는 귀중한 음악이 있다. 이는 한국인을 떠나서 세계의 많은 교양인들에게도 깊이 있게 다가갈 수 있는 궁중음악이다. 이 음악을 오직 국립국악원에서 연말에 듣는다면 그 감동의 깊이가 더할 것이다. 귀한 것은 아껴두어야 한다는 말도 있다. 과거 우리 민족에게는 회례연(會禮宴)의 전통이 있다. 임금과 만조백관이 모여서 한해의 끝자리를 훌륭한 음악과 함께 마무리지었다.

마찬가지로 한해의 끝날 '종무식'을 대신해서 국립국악원 예악당에 대통령을 비롯해서 정치계, 재계, 문화계 사람들이 모여서 '여민락'을 들으면서 한해를 마무리하면 얼마나 멋질까. 이처럼 진정한 여민동락(與民同樂)을 통해서 모두가 함께 격조 있는 기쁨을 나눌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내야 한다.

연말의 멋진 국악공연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지금 국악계에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가 절실히 필요하다. 하나는 전통을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이다. 단지 피상적인 전통음악에 대한 답습이 아니라, 거기에 담겨 있는 문화적인 맥락을 읽어내는 거다. 그리고 그것을 오늘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또 하나는 창조적인 상상력이다. 지금 국악계의 많은 연말 콘서트가 있지만, 대개 다른 분야에서 이미 했던 것을 국악에 적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는 국악에서만이 할 수 있는 공연 형식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국악 분야의 연말공연이 '우리(국악)도 할 수 있는' 공연으로 자위했다면, 이제는 '우리만이 할 수 있는' 공연으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2010년, 진정 개성과 창의성이 돋보이는 국악공연을 기대한다.

▶▶▶ 관련기사 ◀◀◀
▶ 연말 '공연 대란', 전통 공연의 생존법은
▶ 크리스마스 맛 낸 전통공연, 관객 입맛 바꿀까
▶ 새로운 전통 공연의 출발 조건
▶ 전통문화 콘텐츠의 새 가능성 보여줬다


윤중강 국악평론가˙목원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