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문화, 라이프 화두는] 파워 재킷, '엣지' 있게 부활… 환경보호·공정무역 등 도덕성 강조

어깨가 강조된 일명 '파워수트' 09 F/W 이상봉 컬렉션(왼쪽), 영국 디자이너 개리 하비가 신문지로 만든 드레스(오른쪽)
'호랑이가 변을 보다 죽었다' 류의 무섭고 더럽고 슬픈 이야기가 아니다. 실제로 올해 패션계는 어느 때보다 무서운 동시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이 착했다.

"미스 김, 럭비하러 가나?"

아직도 '미스' 자를 떼지 못한 사장님 눈에는 틀림 없이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어깨가 태평양처럼 넓어 보이는 파워 재킷은 단연 2009년을 대표하는 아이템이다.

80년대 여성 인권 신장의 상징물이었던 이 옷은 어깨 넓이만 그대로 둔 채 전체적으로 폭이 좁고 짧아진 형태로 '엣지' 있게 부활했다. 가끔은 몇몇 패션 리더들을 패션 빅텀으로 만들기도 했지만 적당하게 패드를 댄 파워 재킷은 대충 티셔츠에 스키니 진만 걸쳐도 그야말로 각 잡힌 룩을 만들어 준다는 공로를 인정 받아 늦가을까지 장기집권에 성공했다.

파워 재킷뿐만 아니라 2009년 전체가 80년대 패션에 바쳐진 헌정의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죽 라이더 재킷, 거기에 박힌 투박한 스터드(징), 12cm는 우스운 킬 힐, 허리 라인을 한껏 치켜 올린 하이 웨이스트 스커트, 다리를 순대처럼 보이게 만드는 까만 가죽 레깅스, 시커먼 아이라인 등등.

갖춰 입고 쪼여 입은 무서운 여자들이 거리를 활보했다. 청순한 생머리는 10년째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고 블랙 수트에 어울리는 갈색 물결 웨이브가 유행했으며, 헌팅해도 잘 받아줄 것 같은 다운 웨이스트의 원피스는 그야말로 유행에 뒤떨어지는 차림이었다.

사장님뿐 아니라 남자 친구도 속으로는 싫어했을 이 강인하고 무서운 스타일은 생각보다 꾸준히 사랑받아 겨울의 싸이하이 부츠로까지 이어졌다. 허벅지까지 덮는 이 부츠가 처음 컬렉션에 등장했을 때 한국에서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있었지만, 곧 싸구려 스웨이드 소재로 만든 싸이하이 부츠를 집게에 매달아 매장 맨 앞에 걸어 놓은 명동의 보세 신발 가게 주인이 친히 그 말을 비웃었고 온라인 쇼핑몰에서는 그보다 한 발 앞서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모직 재킷에 짧은 바지, 싸이하이 부츠를 매치한 코디네이션으로 여자들을 유혹했다.

킬 힐은 해가 바뀌어도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지만(플랫폼이라는 막강한 지원군을 등에 업고) 80년대의 불꽃은 내년이면 사그라들 것으로 보인다. 트렌드컨설팅기업 인터패션플래닝의 김해련 대표는 2010년을 드레스의 시즌이라고 예고하며 캐주얼하고 편안한 실루엣이 대세를 이룰 것이라고 말했다. 올라 붙었던 것들은 내려 앉고 꽉 조였던 것들은 풀어지리라. 한층 힘을 뺀 자연스럽고 심플한 무드가 파워 수트 뒤에 줄을 서 자기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착한 척하지 마!!"

올 해 만큼 전 세계 패션계가 도덕성에 집착했던 때가 있을까? 국내외를 막론하고 환경 보호, 공정 무역, 모피 반대, 천연 염색 등 온갖 착하고 예쁜 말들이 패션계를 도배했다. 아니, 갑자기 왜들 이러실까?

국내 유일의 공정무역거래 패션매장을 운영하고 있는 '그루'
먼저 물꼬를 튼 것은 하이패션 쪽이다. 구찌 그룹은 환경 다큐멘터리 영화 <홈>을 통해 녹아 내리는 빙판 위에서 펄쩍펄쩍 뛰는 북극곰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많은 이들을 채식주의자 및 분리 수거의 수호자로 만들었다.

영화로 얻은 수익금은 전부 환경 보호 기금으로 썼다. 이탈리아 잡화 브랜드 호간은 '올림피아'라는 이름의 한정판 운동화를 만들어 수익금을 에이즈에 감염된 중국 아동 치료에 쓸 예정이다. 신발 하나를 사면 한 명의 어린이가 9년 동안 교육을 받을 수 있다.

국내에서는 한창 더웠던 7월 경기도 미술관에서 윤리적 패션에 관한 전시회가 열렸는데 국내외 작가 19팀이 참가한 이 전시에서는 패션으로 할 수 있는 착한 일의 다양하고 창의적인 방법론들이 제시됐다.

마크 리우는 옷을 만들 때 단 한 조각의 천도 쓰레기로 버려지지 않는 '제로 웨이스티드 디자인'을 선보였고, 국내 작가 이정혜는 나이에 따른 군살도 넉넉하게 감싸줄 수 있는 니트 웨어 '동지들'을 디자인함으로써 본성이 매몰찬 패션계에 경종을 울렸다. 빽가 백성현 씨는 디자이너 레이블의 중고 의상을 판매하는 가게 바트를 열었다. '아껴 입고 다시 입자'는 캐치프레이즈가 환경보호단체가 아닌 압구정동 로드숍에서 흘러 나온 첫 사례일 것이다.

한 쪽에서는 공정무역이라는 좀더 글로벌하고 근본적인 선행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인사동에 있는 옷 가게 그루는 인도, 네팔 등 빈곤 국가 노동자들에게 적정한 대가를 주고 만든 옷과 소품들을 판매한다. 소재나 옷을 짓는 방식도 전부 자연친화적이다. 실을 잣고 직조하고 재단하고 봉제해 팔리기까지 한 사람도 울리지 않는 착한 옷들이다.

이런 움직임을 지지하는 미디어도 탄생했다. 지난 10월 창간한 사진 작가 김현성의 는 모피 사용을 반대하고 동물을 사랑하며 채식을 권장하는 콘셉트의 1인 패션 미디어다. 이 밖에도 가공 과정에서 중금속인 크롬 대신 식물성 탄닌을 사용한 베지터블 가죽과 제작까지 총 6개월이 걸리는 진흙 염색으로 만든 옷이 각각 구호와 이새에서 선보여졌다.

환경 보호와 나눔은 이제 패션 기업이 가장 손쉽게 구사하는 마케팅 전략이 되었다. 여기에 진심이 담겨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지만 한낱 전략이라 해도 무슨 상관인가. 착한 척한다고 빈정거리기에는 우리의 지구는 고양이 손이라도 아쉬운 상황이다. 부디 앞으로도 착한 척 좀더 해주길.

지나치기 아까운 유의미한 장면들

"엣지 있게 하란 말이야"

올해 패션은 TV 앞에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다 보여줬다. 디자이너들의 작업실(프로젝트 런웨이)과 패션 잡지 사무실(스타일)이 노출됐으며 킬 힐을 신고 발바닥이 까지도록 뛰어다니는 패션지 에디터들의 세계(디 에디터스)도 여과 없이 보여졌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그나마 괜찮았지만 드라마는 국내 패션 잡지 기자들의 공통 유머 소재가 될 만큼 어이 없는 설정이 이어졌다. 첫 시도였으니 다음에는 좀 더 엣지있게 나올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보그가 땅을 칠 일?

세계 1위 패션지의 위엄은 컬렉션 맨 앞자리에 달려 있다. 누구나 들어갈 수 없는 그 자리에 앉아 가장 먼저 다음 시즌 유행을 살피고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권리. 그러나 버버리는 이번 시즌 컬렉션을 인터넷으로 생중계했고 맥퀸은 트위터로 쇼 직전 자신의 두근거리는 심정까지 전부 떠벌렸다. 안나 윈투어 옆 자리에 패션 블로거 브라이언 보이가 앉으면서 하이 패션은 더 이상 그들만의 세계가 아니게 되었다. 인터넷이 이루어낸 패션의 평등이 위험 요소로 작용할지, 또 다른 발전의 시발점이 될 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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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