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과 아날로그 충돌과 상생] 아날로그 최후의 보루 디지털 작업 가속화… 새로운 접점 찾기 박차

2009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요스트톱그렌컴퍼니. 축구예찬(노르웨이)
아무리 디지털 세상이 되어가도 공연예술은 아날로그의 최종 보루 같은 의미를 가졌다. 적어도 몇 년 전까지는.

이유는 '몸' 때문이다. 2009년의 주요 이슈였던 디지털 또는 디지로그 공연 열풍에도 불구하고 객석의 반응은 아직까지는 이런 무대의 변화가 혼란스러운 눈치다. 무대 위의 몸과 현란한 영상들이 섞이지 않은 채 혼재하고 있는 공연이 여전히 상당수이기 때문이다.

설령 '개념을 모르는' 관객이 창작자의 고매한 의도를 눈치채지 못했다 해도, 이러한 반응은 자연스럽다. 애초에 몸을 매개로 하는 공연예술의 특성상 몸과 빛이 완벽하게 어우러지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 장르의 예술들이 골고루 디지털의 세례를 받고 있을 때, 춤˙연극˙뮤지컬 등은 꿋꿋이 아날로그의 우위를 지켜왔다.

디지털의 힘과 아날로그의 귀환

2000년대 이후 공연물을 넘어 최근 영화에까지 진출하고 있는 비보잉은 이런 아날로그로서의 매력을 최대한 발산하고 주목받고 있는 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손쉽게 예술을 관람하고 감상할 수 있는 시대, 온몸으로 시연하고 느껴야 하는 몸의 예술은 여전한 감동을 선사한다.

비보잉 영화 '올웨이스 비보이'
육체적 한계를 무시한 몸 역량의 관람은 '태양의 서커스' 붐에서도 읽을 수 있다. 천막공연과 서커스라는 지난 세기의 유산이 첨단 디지털 시대에도 맹위를 떨치고 있는 것은 실체 없는 디지털 예술의 공허함을 아날로그 예술이 채워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디지털의 힘은 창작 여건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었다. 2007년 '텔미'의 UCC 열풍은 공연예술이 꼭 무대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 전에도 없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텔미 신드롬 이후 공연 전 실황이나 자신의 작품세계를 알리고 싶은 젊고 가난한 예술가들은 '새로운 무대'로 UCC를 택했다.

창작자뿐만 아니라 역시 젊고(게으른) 가난한 관객도 인터넷을 통해 새로운 관람의 장을 함께 마련했다. 공연예술의 조건을 '실재하는 몸'에서 '가상의 몸'으로 일거에 전환시킨 디지털 혁명의 파급력은 예술의 유통과 수용 구조까지 변화시켰다.

이후 공연예술의 디지털 작업은 가속화됐다. 인간의 몸만이 극의 중심이 되는 구태를 버리고 빛과 소리와 관련한 첨단 미디어의 향연을 빠짐없이 배치시켰다. 그 결과 볼거리는 풍성해졌다. 대신 이에 익숙지 않은 관객은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했다.

마치 외국 공연을 볼 때 자막 서비스의 방향이 무대 정면과 일치하지 않을 때 관람이 불편한 것처럼, 몸이 영상과 겹치거나 분리될 때 그 의미를 찾기 위해 골머리를 썩혀야 했다. 인터넷상에 난무하는 신예술의 파편들은 더 이상 예술 본연의 아우라를 발산하지 못한다. 디지털 예술의 가벼움과 공허함이 감동을 주지 못할 때, 사람들은 다시 예전의 '진짜 몸'과 온정을 그리워하게 된다.

밴드 '장기하와 얼굴들'
그래서 불황과 맞물린 아날로그 코드의 귀환은 당연한 현상이다. 디지털 시대에 발터 벤야민의 원본-복제론이 지겹도록 회자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손쉽게 복제되고 그 결과로 몰개성화되는 디지털 시대의 예술에서 개인의 고유한 아우라는 희미해진다.

누가 더 세련되는가의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은 오히려 조금 더 촌스러운 콘셉트다. 장기하의 성공은 '2009년에 재림한 송창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 단순한 복고 콘셉트에 편승하지 않고 코러스 겸 백업댄서인 미미시스터즈로 개성을 강화한 것도 아날로그 정서의 공략에 성공한 요인이다.

몸과 매체의 융합이 디지로그 성공의 열쇠

하지만 시대의 흐름에 전략적으로 역행하는 것이 곧 성공비결은 아니다. 디지털 매체는 분명 아날로그 시대가 해내지 못한 세계를 보여주는 힘을 갖고 있다. 특히 공연예술은 문학이나 회화가 가진 2차원적 한계와 영화가 가진 가상의 한계 사이에서 '실재하는 몸'과 '일회성'이라는 그 자신만의 무궁무진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결국은 이러한 아날로그 원래의 매력을 디지털 매체를 통해 어떻게 이상적으로 배합˙융합하는가가 이 시대 공연예술의 과제가 될 것이다.

2009년에 무대에 등장한 디지로그는 이런 고민을 잘 보여주는 키워드였다. 온갖 첨단 공연에는 빠짐없이 디지로그라는 수사가 붙었다. 그것이 본래의 기능을 잘 했는가는 차치하고, 콘셉트의 면에서 아날로그 정신과 디지털 매체를 융합시키려 애쓴 흔적들이 자주 보였다.

지난 가을 디스트릭트 UX스튜디오에서 열린 디지로그 사물놀이는 아날로그를 대표하는 사물놀이 공연이 디지털 코드와 만날 때 파생되는 시너지를 보여줬다. 장구와 꽹과리의 날선 굉음과 그 사이를 오가는 전통무용수의 몸은 아날로그의 매력을 그대로 선보인다.

특이한 것은 여기서 디지털이 삽입되는 지점은 공연의 포장이 아니라 오히려 서사다. 김덕수 사물놀이패 사이로 나타난 홀로그램 나무는 처음엔 죽어있었지만 이들의 신명나는 가락에 따라 다시 살아나며 꽃을 피운다. 이런 줄거리는 두 코드가 분리되어 있던 기존 모습과 달리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상생을 다분히 의도하고 있었다.

2009 서울국제공연예술제의 모토는 아예 '아날로그&디지로그'였다. 김철리 예술감독은 디지털이 아무리 발달해도 아날로그는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그동안 공연예술에서 과학기술이 상대적으로 무시된 경향이 있는데, 20세기 중반 브레히트가 연극에 영화를 도입했었다"고 설명했다. 이는 공연예술과 그 시대의 첨단 기술과의 결합이 비단 이 시대만의 흐름은 아니며, 결국 첨단 과학과 오래된 생각이 효과적으로 만날 때 새로운 의미가 생긴다는 뜻이다.

새해에도 여전히 디지로그 시도는 계속될 전망이다. 공연예술계의 한켠에서는 아날로그로의 복귀를 바라는 시선이 아직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공존은 이미 시대적 고민인 것처럼 보인다.

올해도 무대 위엔 여전히 셰익스피어와 체호프가 어김없이 돌아올 것이다. 어쩌면 이 시대가 고민해야 할 것은 두 코드의 기계적 융합보다는 새로운 셰익스피어와 체호프의 모습일 것이다. 이때 디지털은 재해석의 차원에서 활용할 수 있는 하나의 좋은 도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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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