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과 아날로그 충돌과 상생] 미술계 기술에 잠식된 '미디어아트' 회복하려는 움직임 나타나

안수진, 어느 회색분자의 날개Ⅱ, 2009
서울 한 복판에 빛으로 빚은 거인이 출몰하고, 전시장의 미술 작품은 관객에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모두 디지털 기술 덕이다. 디지털 기술을 받아들인 미디어아트는 도시 경관과 시각 예술의 속성을 바꾸고 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이 미래지향적 변화에 브레이크를 건다. 보이는 것이 인간의 속도를 앞지르고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디지털의 도시 습격 사건

많은 서울 시민이 지난 11월 공개된 서울스퀘어의 '미디어 파사드'를 통해 드디어, 말로만 듣던 디지털 기술과 예술의 조우를 목격했을 것이다. 어둠이 깔린 서울 한 복판 가로 99m, 세로 78m LCD에 영국 팝아트 작가 줄리안 오피의 거인들이 빛을 발하며 등장했다.

이것은 한 차례의 이벤트가 아니다. 앞으로 쭉 작품을 바꾸어 가며 도시의 한 시각적 기관으로 작동할 것이다. 도시 경관 속에서 조명이나 설치 작품의 한 요소로서 소극적으로 존재하던 디지털 기술이 자체의 특성을 전면에 드러낸 제스처임을 감안하면, 디지털 시대라는 삶의 조건을 본격적으로 알리는 이정표이자 기념비로서의 예술인 셈이다.

청계천 앞 '스프링'과 흥국생명 빌딩 앞 '망치질 하는 사람'을 초라하게 만드는 스펙터클로서 디지털-미디어아트가 도시에 속속 도입되는 것은 세계적 경향인데다, 권력의 의도에 의한 것이다. 디지털 기술로 만들어낸 찬란한 이미지는 곧 'IT 강국'을 넘어 '디지털 문화 강국'을 지향하는 행정기관의 미래상으로 제시되곤 한다.

서울스퀘어 미디어 파사드에 상영된 줄리안 오피의 영상작품
'미래도시 인천'을 보여준다는 목적으로 지난 8~10월 열린 '2009 인천세계도시축전'이 부대행사로 디지털아트페스티벌을 개최했고, 12월19일부터 서울 광화문 광장 근처에서 열리고 있는 '2009서울빛축제'는 세종문화회관, KT 등을 스크린 삼아 미디어아트 작품을 상영한다. 옛 기무사 터에 들어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미디어아트 중심 미술관이 될 예정이다.

대중미술 혹은 공공미술로서의 디지털아트?

그러나 급진적인 도입 속도가 곧 그만큼의 '발전'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디지털-미디어아트의 담론이 실체보다 부풀려졌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무엇보다 디지털 기술의 시각적 가능성을 구현하는 데 급급해 정작 '미디어'와 '아트'의 속성이 간과된 작업이 많았다.

예를 들면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는 개최된 지 10년째인 지난해 5회를 맞도록 "미디어아트를 포괄적으로 소개하는 것을 넘는 어떤 컨셉트도 발견할 수 없었다"(박영욱 연세대학교 미디어아트연구소 HK교수)는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디지털의 기술적 측면에 스스로 현혹된 작업은 시중에 나와 있는 다채로운 디지털 기기들과 구분되지 않는다. 반이정 미술평론가는 아예 "유투브, 아이폰, 닌텐도 위 등의 비제도권 미디어아트"를 차세대 미술현상 중 하나로 꼽았다. 사실 지금 국내에서 전시되는 많은 미디어아트 작품이 이런 기기의 구닥다리 버전이다. 더구나 "디지털 기술이나 미디어 자체가 매우 실용적인 목적으로 개발된 것인데, 거기에서 예술적 '쾌(快)'를 찾는 미디어아트는 좀 한갓진 것 아닌가" 하는 비판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미디어아트, <전기 나갔을 때 대처방안>의 헤르빅 바이저의 '루시드 팬텀 메신저'
이런 비판들이 중요한 것은 '예술 대중화'나 '공공미술'의 명목으로 대형 미디어아트 작업들이 도시 곳곳에서 펼쳐짐으로써 도시에서 생활하는 모두의 일상적 환경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아트는 디지털 기술의 한 전시 형태가 아니라 이름-커뮤니케이션 도구로서의 미디어- 그대로 관계를 만들어내는 예술로서 의미가 있다는 점을 상기해볼 때, '대중성'을 넘어 '공공성'을 가지려면 도시와 사람,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강수미 미술평론가는 미디어아트가 권력에 의해 현혹하는 기술적 스펙터클로 제시될 때의 위험에 대해 우려했다. "스펙터클이 과도해질 때 무엇을 놓칠까,를 생각했으면 좋겠다. 스펙터클은 관객을 수동적 감상자로 만든다. 그래서 스펙터클을 보는 경험이 도시에서의 삶의 경험을 대체하면 인간 관계, 계급 질서, 현 체제 자체는 잊혀지기 쉽다. 스펙터클이 겨냥하는 군중심리가 사회적 의식의 원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디지털에서 독립하는 미디어아트

미술계에서는 디지털 기술에 잠식된 '미디어아트'를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 10~11월 서울 성북동에 위치한 스페이스캔에서는 <미디어아트, 전기 나갔을 때의 대처방안> 전이 열렸다.

"공학적인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결합한 기술 편향적인 미디어아트가 내용보다 형식적인 매체실험에 초점을 맞추어 새로운 기술과 놀람(awaken)을 추구함으로써 작품의 의미를 새로운 기술과 형식이라는 틀에 한정 짓게 한 상황을 반성하고 대안을 찾기"(백곤 스페이스캔 큐레이터) 위한 시도였다. 전기로 상징되는 기술적 기반을 제거했을 때 미디어아트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를 모색함으로써 미디어아트가 무엇인지 질문하는 작업들이 전시되었다.

미디더아트, <전기 나갔을 때 대처방안>의 전병삼의 'Lack of Energy'
예를 들면, 헤르빅 바이저의 '루시드 팬텀 메신저'는 액정, 실리콘, 유리섬유 등 디지털 영상의 '재료'들을 액화한 후 유리 그릇에 담은 작품. 이를테면 디지털-미디어아트의 해체 작업이다. 마치 물에 물감을 푼 것 같은 아날로그적 결과물은 디지털-미디어아트를 "전제하고 야유한다."(김상우)

전병삼의 'Lack of Energy'는 "버튼을 누르거나 센서에 의해 감지되는 관객들의 참여가 미학적인 소통으로 받아들여지는"(백곤) 미디어아트 담론에 빗대어 해석해볼 수 있다. 모니터 상의 정지된 뉴스 화면과 '로딩 중'이라는 메시지로 관객이 열심히 자가발전기를 돌리도록 부추기지만 로딩이 다 된 후에 뉴스가 나오기는커녕 모니터가 꺼져 버리는 아이러니한 작품이다. 그것이 오늘날 디지털-미디어아트가 상정하는 관객 참여, 소통의 의미라는 것일까.

이런 전시 내용은 결국 "디지털 기술의 포괄적인 영향력이 현대예술의 주요 개념 중 하나인 매체(medium)라는 개념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전시의 부대행사로 10월23일 열린 포럼에서 미디어 연구자 김지훈은 "디지털 기술은 어떤 매체라도 서로 번역될 수 있도록 하고, 따라서 전통적인 매체 개념이 무효해진다"는 미디어아트 담론에서의 주류적 주장과 이에 대해 매체적 변별성을 내세우며 저항하는 시도들이 있음을 설명했다. 이는 모든 미디어아트가 디지털 기술로 수렴될 때, 각각의 매체 특성에 기반해 형성 소통되어온 예술의 꼴과 관객과의 상호작용 양상이 사라진다는 우려에 의한 것이다.

이런 우려를 받아들일 때 디지털-미디어아트는 비로소 디지털 기술의 평준화, 쌍방향적 특성을, 거기에 잠재된 최대한의 가능성인 '예술의 민주화'로 실현하는 시도로써 고민되고 이야기될 수 있지 않을까.

지난 12월 갤러리세줄에서 열린 <디지脫-다중적 감성>전은 디지털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인간과 세계 사이에서 둘 사이를 조정하고 화해시키는 도구"(김찬동 아르코미술관장)로서의 '미디어'를 중심으로 디지털 시대의 관계의 불완전성을 극복하는 작업들을 선보였다. 소개된 다섯 명의 작가는 "의도적으로 로우테크를 구사하거나 하이테크를 로우테크적 맥락에서 구사"한다.

<디지脫 다중적 감성>전에 전시된 김기철의 'Contact'
소리를 보이게 만드는 '소리조각' 작업을 하는 김기철 작가가 대표적이다. 이 전시에서 선보인 'Contact'는 마주 본 인형들이 각각에 연결된 마이크에 가해지는 소리의 강도와 질감, 높낮이에 따라 다르게 움직이도록 만든 작품. 관객들은 마이크 앞에서 다양한 소리를 냄으로써 이 미디어이자 작품을 통해 상대 관객과 '소통'할 수 있다.

김영헌 작가의 'For My Son's Son'은 영상작업과 오브제를 연결한 작품이다. 비디오 모니터에서 튜브에 바람 넣는 영상이 상영되면, 여기에 연결된 옷이 부풀어 올라 인형이 된다. 비디오라는 미디어가 오브제에 생명을 불어 넣는 것 같은 광경이다.

이런 작업들은 관객을 적극적으로 참여시킨다. 버튼을 누르는 것처럼 말초적인 방식이 아닌, 관객 자신이 몸과 감각, 상상력과 지적 능력을 활발히 '쓰도록' 유도하는 방식으로. 'Contact'는 관객이 어떤 소리가 인형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실험하도록 만들며, 'For My Son's Son'은 기계 문명과 현대인의 불가분한 관계를 상기시킨다.

예술, 기술과 긴장하며 길 찾기

디지털에 저항하는 미디어아트의 경향의 지향은 기술에 함몰되는 것을 경계하고, 인간이 자신을 확장하기 위해 만든 도구로서의 기술의 목적을 복원하는 것, 그럼으로써 다시 인간의 가치와 능력을 성찰하고 긍정하는 것으로 수렴된다.

안수진, 평면의 시간, 2005
그런 의미에서 디지털-미디어아트의 고전적 버전 같은 안수진 작가의 '전자-키네틱아트' 작업은 중요한 참조점이 될 수 있다. 김종영미술관의 '2009년 오늘의 작가'로 선정된 그의 작업은 기계 메커니즘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현대인의 존재 조건에 대한 풍성한 알레고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평면의 시간'은 서울과, 지구 반대편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그리고 적도 근처 나이로비에 직립해 있는 인간들의 수직축이 각각 지구 자전에 의해 변화하는 각도를 계산해 구동시킨 것이다.

작품의 원리는 과학적이지만, 의도는 철학적이고 소통 방식으로서의 인상은 명상적이다. 작가는 "우리가 사는 지구가 원형의 형태이며 그 위에 살고 있는 인류는 마치 솔방울의 가시처럼 지구표면에 붙어 있다는 사실을 도통 실감하지 못한 것"이 출발점이었다고 밝힌다. 그리고 결국 "고대인의 시각에서 끝없이 너른 세계와 대면하는 외로운 단독자의 주체성과, 세상을 향한 우리들의 인식의 평면성"을 동시에 표현해냈다.

그 앞에서 관객은 여태껏 당연하게 '체험'했던 자신의 수직축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된다. 시간 맞춰 정확하게 기울어지는 인간들의 각도에 자신을 대입해 보고, 저 엄정한 과학적 사실과 나의 견고한 현실 간 괴리를 깨치게 되는 것이다. 중간 중간 설치된 모니터의 수평선 영상은 이런 명상을 돕는다.

안수진 작가의 작품, 혹은 기계들에 포함된 메커니즘은 "인간을 둘러싼 환경과 그 환경의 질서"이면서 "어떠한 합리적 용도도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반(反)기계로서 현대 기계문명에 대한 비판"(김정락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이 된다. 효율과 합리가 유일한 가치인 "기계를 닮고자 하는 삶에 대한 공포"(안수진 작가)를 넘어 기계를 인간의 전방위적 도구이자 모티프로 장악해내는 이런 배포야말로 예술이 새로운 기술을 맞는 적절한 태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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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