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갤러리] 권태균 개인전 <노마드 NOMAD>

1983년 9월, 경남 고성, 소나무에 실례하고 있는 연희지
역사는 오랫동안 거대하게 서술되어 왔다. 기록은 권력의 전유물이었으며, 일상은 역사가들의 펜 밖으로 밀려나기 일쑤였다.

그러나 정작, 한국사회 근대화의 격동 속에서 면면하게 버티어 준 지지대는 보잘 것 없는 삶들이었다. 전쟁과 가난, 시대가 강요한 고난 속에서도 아이를 낳고, 자신이 아는 모든 기쁨을 물려 주고, 아이들의 온기로 다시 남은 생을 버티어 갔던, 자연의 섭리와도 같았던 끈끈한 삶들이었다.

작가 권태균의 사진은 그것을 여실히 증명한다. 80년대, 역사가 지나가고 있는 장면들을 열심히 포착했다. 많은 사진들이 길 위에 있다. 중심에는 전통의 유산 혹은 아이들이 있다. 전자에 대한 존중과 후자가 품고 있는 생명력에 대한 애정이 이들 사진의 주제처럼 보인다.

1983년 9월 경남 고성의 한 뒷산에서는 소나무에 실례하는 연희자의 모습을 발견했다. 한 다리를 쩌억 올린 그의 뒷모양이 당대의 어떤 권력 다툼과 심각한 이데올로기도 무시하는 듯 해학적이다. 같은 해 3월에는 경북 안동에서는 버들강아지를 꺾어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을 만난 참이다. 어떤 시대에도 북슬북슬 물 오른 버들강아지의 감촉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절이 있는 법이다.

'시대상'을 반영하듯 역동적인 상황이나 포즈도 없다. 주인공들은 그냥 어딜 가는 중이거나, '마실' 나왔거나 집에 돌아가는 경우가 태반인데 그들의 걸음걸이, 품행, 카메라를 대하는 멀뚱한 표정 같은 것이 고스란히 그 시대 같다. 사진 제목은 곧 당시 정황에 대한 기록이다.

1983년 1월, 전남 담양, 마실 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두 아이
좁은 의미에서의 인간사가 아닌 자연의 순환과 더불어 시작과 끝이 아득한 인류사의 한 단면을 드러내는 듯 하다.

'변화하는 1980년대 한국인의 삶에 대한 작은 기록-1'이라는 부제가 붙은 권태균 개인전 <노마드 NOMAD>는 26일까지 서울 종로구 관훈동에 위치한 갤러리룩스에서 열린다. 02-720-8488.


1980년 1월, 충북 청원, 아침 안개 속에 손주를 얹고 마실 나온 할머니
1983년 3월, 경북 안동, 버들강아지를 꺾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
1986년 8월, 전남 진도, 집 앞에 서 있는 아이들
1983년 9월, 경남 김해, 버스 안에서 업혀 있는 아이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