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란 무엇이며 왜 인문학적 사유로 간주되어야 하는가? 도시는 오랜 인류의 역사를 거쳐 완성된 문화의 총체적 장소로 인류학적 실체를 가진 복합체다.

역사란 '보고 확인함으로써 지식을 얻는 것'으로 과거의 흔적에서 그 시대 전체의 사실과 사건을 터득하는 동시화법적 지식을 의미한다. 한 사건의 결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어 미래를 예비하는 지식을 제공하므로 모든 역사적 장소가 완벽하게 보존될수록 그 도시의 미래는 밝다.

문화는 '한 장소에 정착된 인간으로서의 활동'을 뜻한다. 즉 집, 동네, 도시에 정착하여 교육을 통해 인격과 규범을 가진 인간들의 생산적 활동을 의미한다. 인류학적 실체란 도시의 기초를 이루는 유형, 무형의 자산으로 사회, 자연, 풍속, 민족, 전통 등의 사회적 요인들이다. 도시의 본질을 형성하는 이 요인들은 너무 복잡하고 다양해서 오랜 경험의 역사적 지식에 의해서만 형성된다.

고대부터 현재까지 도시에 대한 인문학적 사유를 정리하면, 첫째 도시는 사회학적 장소로 도덕과 품위를 지키고 문화를 창조하는 곳이었다(인류학, 사회학). 둘째 도시는 인간의 행복한 삶을 위해 존재하여야 하므로 반드시 아름다워야 한다(예술철학, 정치, 도덕학). 셋째 도시는 민족의 보존과 번영의 상징적 장소이다(역사학, 민속학적, 철학).

서울의 강북은 대한민국을 증명하는 장소다. 강북은 서울 600년, 대한민국 5000년 역사적 장소로 모든 길, 골목, 구석 곳곳이 유적이자 유물이다. 하지만 강제로 지워져 버렸다. 반세기의 일본의 압제에서도, 또 6ㆍ25의 폭격에서도 살아남은 한민족의 실체적 증거가 통째로 증발된 것이다.

조상들의 영혼, 피땀이 서려있는 피맛골, 종로, 북촌, 육조거리, 청계천에서 벌어졌던 삶의 흔적이 경제성장이라는 거대한 원폭에 맞아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다. 공사현장에는 파는 곳마다 유물이 쏟아지지만 왜 나오는지, 이곳이 과거 무슨 장소였는지 역사·지리학자들조차 무지하다.

인간의 존재성은 현재가 아니라 과거에서 가치가 추구된다는 진리가 한국에서는 웃기는 궤변에 불과하다. 대한민국의 존재를 증명하는 '시간적 실체'가 파괴되는데 계속 건설을 외친다. 민족의 정기를 나타내는 한양의 축, 맥락은 해괴망측한 건설로 무참하게 파괴한다. 그래서 당나귀와 마차가 다니던 수백 년 옛길, 한옥 촌, 돌담, 성곽, 마당, 장터 등의 영혼의 장소들은 '옛 것, 늙은 것, 가난한 것'으로 손가락질 받으며 역사의 생을 마감하였다.

부정부패의 탐관오리를 처형했던 중학천의 혜정교터, 1898년 을사조약 시 '시일야방성대곡'을 게재한 황성신문사, 1926년 6월 순종의 국장행렬 시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던 만세운동거리, 인사동 태화관 자리의 3ㆍ1독립선언지 등의 거룩한 장소들은 꼴 사나운 건물로 뒤범벅이 되는 저주를 받았다.

일제시대 수많은 민족열사, 유관순을 고문으로 살해한 서대문 형무소, 독립문의 역사적 부활은커녕 엉뚱한 곳에 방치하고, 5대 궁궐,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종묘와 서울사직단, 홍인지문, 서울성곽 등은 문화재청의 존립을 위한 관리대상으로 서서히 썩어가고 있다. 조상들이 실제로 살았던 장소는 다 파괴해 놓고 한옥을 본뜬 남산 한옥마을, 가짜 민속촌, 독재 망령의 전쟁기념관, 역사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등의 엉뚱한 콘크리트 덩어리들을 마구 건설하는 모순과 악습의 고통이 반복되고 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그 이유는 1960년부터의 한국은 도시가 무슨 장소인지를 설명하는 인문학적 사유와 원칙 대신 돈이 목적인 물질만능주의의 길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정책의 중심이 시민이 아니라 재력과 권력의 쟁취이다 보니 민족과 조상의 영혼을 말살하는 거대재벌, 거대권력의 사회로 변질된 것이다.

그들은 부동산 개발의 먹이를 찾아 강남으로 이전하였다. 그리고 자연을 마구 파헤쳐 신도시, 상가, 고층아파트들로 범벅이 된 기업왕국의 도시를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더이상 부동산 먹잇감으로 파헤칠 곳이 없는지 다시 강북으로 와 강남처럼 개발한다고 한다.

도시는 인간의 삶이 아름답게 표현되는 곳이다. 도시는 서울시장이 외치는 '디자인서울'이라는 외형적 허상이 아니다. 한강에 수백억 원의 인공섬을 띄운다고 서울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다. 아름다운 도시는 예술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예술화는 사람들의 취향, 욕망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도시의 본질과 실체를 중요시하는 원칙에서 비롯된다.

강북의 건설은 무조건 100년 뒤로 돌아가는 정신혁명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강북 4대문 안을 조선시대의 모습으로 완전 복원해야 한다. 만일 서울의 강북이 그 시대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한복을 입는 것이 더 어울리는 강북의 도시환경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서울은 전 세계에서 매년 수억 명씩 찾는 오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파리가 절대 부럽지 않을 것이다.

떼오도르 폴 김ㅣ프랑스 도시건축학자, <사고와 진리에서 태어나는 도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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