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은나라 홍도관의 비밀조조묘 가치 능가하는 은(殷) 문물 한국에 존재, 세계 학계 관심 집중중국 은주(殷周)교체기 상황 기록, 언어학·천문학·고고학계 파장일듯
은나라 마지막 왕 제신(帝辛, 일명 주왕 紂王)이 글을 새겨 남긴 홍도관(紅陶罐, 붉은 단지)이 그것으로 최근 그에 대한 중국 문화부의 고고과학적 검측 결과 진품으로 확인되면서 중국 학계는 물론, 세계고고학계, 역사학계 등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은(殷)은 역사적으로 실재한 최초의 중국 왕조로 상(商)으로도 불린다. 1899년 은허(殷墟) 유적이 발굴되면서 상(商, 또는 殷)나라의 실체가 알려졌으며, 당시 발견된 갑골문(甲骨文)은 한자(漢字)의 기원으로 전해진다. 우리 역사와는 고조선과 관련 있다.
문제의 홍도관은 1990년대 초 중국 요녕성 지역에서 발견됐으나 세인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단순한 공예품 정도로 인식된 채 2005년 한국으로 건너왔다.
평범한 고대 도자기로 여겨지던 홍도관은 2006년초 고문자 연구가인 대종언어연구소 박대종 소장이 홍도관에 새겨진 은대의 글자를 해석하면서 국제적인 관심 대상으로 부상했다.
<전문=金見. 率辛師 亡周侯元西伯行 右師田自州西邑 祖丁乙爪 有明紀斁任 允自西伯侯. 祖丁乙! 征文夕祀, 辛丁乙師眉走 亯井, 朕御皿(蠱) 曰: 角眀, 有余征導舟0玄, 田封, 它肯御.> (O=民밑에 巴)
"(대낮에 불길하게도) 금성이 나타났습니다. 辛의 군대를 이끌까요. 서백(주 무왕)의 항오(군대)와 그 우군(연합군)이 주(州) 서읍으로부터 혁명을 일으키는 일이 없을까요. 엄정한 기강이 무너지고 방임되는 일이 있을까요" 등의 내용이다.
박 소장은 홍도관 바닥면에 도기를 굽기 전에 새긴 은대의 점복(占卜)과 관련된 복사(卜辭) 전문용어인 은대(殷代) '점(
박 소장의 논문을 검토한 중국의 저명한 고문자학자인 중산(中山)대학 진위담(陳煒湛) 교수는 "홍도관 바닥부위의 은대 '점(
홍도관의 61개 글자 중에는 '余(여)'자와 '朕(짐)'자가 보이는데 두 글자 모두 은나라 왕이 자신을 지칭하는 왕의 제1인칭 대명사다. 이는 홍도관이 은나라 왕이 점을 친 후 글자를 새긴 기물, 즉 왕이 남긴 문물임을 입증한다.
또 홍도관에는 주(周)나라 제후를 뜻하는 '周侯(주후)'라는 용어와 서쪽 제후들의 우두머리를 의미하는 '西伯(서백)'이라는 특수 칭위가 새겨져 있다. 중국 제일의 정사인 사마천(BC 145∼BC 86년)의 <사기(史記)> 周本紀(주본기)에서는 서백이 은나라 제신(帝辛) 때 주후(周侯)였던 주나라의 서백창(西伯昌), 또는 그 아들 서백발(西伯發)을 가리킨다. 따라서 홍도관의 '周侯(주후)'와 '西伯(서백)' 용어는, 홍도관이 은나라의 여러 왕 중 마지막 왕인 帝辛(제신: 紂王)의 기물임을 말해준다.
홍도관에 새겨진 61개 글자 중에는 '주후 서백'의 또다른 호칭인 '문왕(文王)'을 의미하는 '文'자와 은나라 제신(帝辛)이 생전에 불리던 명호(名號)인 '辛'이 나온다. 따라서 이 홍도관은 중국에서 1899년 이후 발견된 10만 여편에 달하는 그 어떤 갑골문보다 연대판단이 분명한 도기이다.
이러한 강력한 문자학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홍도관은 그동안 진위 논란에 시달렸다. 주로 중국측에서 홍도관이 현대에 만들어진 위작품일 수 있다는 논지를 폈기 때문이다. 홍도관의 진위 여부에 따라 중국은 물론,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고대사가 달라질 수 있기에 홍도관의 실체는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즉, 은대(殷代) 명문(銘文)이 새겨진 홍도관이 갑골문 발견 연대인 1899년 이전의 것이어야 현대인의 위작이 아니라는 사실이 판명되는 것이다
진위담 중산대 교수는 2006년 홍도관이 대단한 가치를 지닌 진품임을 인정하면서 박대종 소장에게 열석광(熱釋光) 검측을 통해 홍도관의 연대를 확실시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 열석광(Thermoluminescence: TL) 검측은 고대 도자기의 연대 측정에 주로 이용되는 측정법으로 열발광, 열형광 검측으로도 불린다.
이에 따라 2008년 4월 홍콩 성시대학의 양보류(梁寶鎏) 박사에 이어 2009년 12월 중국 상해박물관의 하군정(夏君定) 연구원이 방한하여 홍도관에 대한 시료를 채취하였다. 특히 하군정은 2004년 중국 '국가문물국 보호과학기술 창신(創新) 일등상'을 받은 가히 중국 내 열석광측정(TL) 분야의 최고 전문가로, 상해박물관 문물보호 및 고고과학실험실 연구원이자, 중국 문화부의 문물보호기술 관계자이다.
그리고 올해 1월 중국 문화부 문물보호기술 직인이 찍힌 측정결과가 국제우편으로 한국에 배달되었다. '상해박물관 열석광 연대측정보고'라는 제하의 이 보고서는 해당 홍도관의 제조 연대를 '거금 480±100년'으로 산정했다. 오차를 감안할 때 지금으로부터 최대 580년에서 최소 380년 전으로 이는 중국 역사에서 명(明, 1368년∼1644년)나라 때에 해당한다.
이러한 측정 결과는 홍도관이 1899년 은대의 갑골문 발견 이후에 위작된 것일 수 있다는 세간의 의심과 오해를 완전히 불식시키는 중국 정부 차원의 고고과학적 검측 결과이다. 더불어 홍도관이 완성되기 전, 그 표면에 새긴 은대'점(
만일 현대인이 홍도관을 구하여 그 위에 은대의 글을 새겼다면 도기 표면의 색과 새긴 부위의 색이 불일치하는 후각(後刻)이 된다. 일본의 고문자 전문가인 나리케 테쓰로 교수는 "글자의 필획 부분의 색은 도기의 흙색과 같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글자를 쓰고 나서 구운 것임에 틀림없다"고 하였다. 중국의 하군정 연구원도 지난해 12월 홍도관을 관찰하고 "바닥부위의 글자는 반드시 도기를 굽기 전에 새긴 것으로 전각(前刻)임이 분명하다"고 확인했다.
결론적으로 홍도관에 새겨진 61글자의 내력과 고고과학적 검측 등을 종합할 때 홍도관은 은나라 마지막 왕 제신(帝辛)이 남긴 도기임이 입증된다.
중국의 역사서 사기(史記) 등에는 지금으로부터 3000여년 전(BC 1000여년 ) 은나라의 제후국 통치자인 주(周) 무왕이 두 차례 은나라 침입을 시도, 첫 번째는 회군했고 두 번째 침입에서 은나라를 멸망시킨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에 따르면 홍도관 명문은 주 무왕의 2차 침입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홍도관이 은나라 때의 도기임이 확인되면서 중국은 물론, 한국과 세계 역사학계에 적잖은 파장을 가져올 것으로 예상된다. 홍도관에 대해 "전 중국, 더 나아가서는 세계를 진동시키기에 충분한 것이다"라고 한 진위담 교수의 평가가 현실화될 전망이다.
대종언어연구소 박대종 소장 "61개글자 해독과정 다큐로 남기고파" 한국과 중국을 포함해 동아시아의 고대사를 다시 써야 할 만큼 중요한 가치를 지닌 은대(殷代)의 홍도관은 고문자연구가인 대종언어연구소 박대종 소장에 의해 빛을 보게 됐다. 박 소장이 홍도관에 새겨진 61개 글자를 해독함으로써 가능해진 것. 박 소장은 "홍도관을 연구하고 나니 보다 많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며 "앞으로 한국과 중국의 고대사 관련성을 더 심도 있게 연구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 은대의 홍도관을 연구하게된 계기는
- 홍도관 연구가 쉽지 않았을 텐데 "홍도관 명문(銘文)을 해석한 후 국내 전문가와 논의를 해보려 했으나 갑골문에 대해 정확히 아는 분을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중국과 일본의 고문자, 고고학 전문가들과 토론을 했고 여러 성과를 거뒀다. 연구 중간에 홍도관의 진위가 거론되곤 했는데 2008년 홍콩에 이어 올초 중국 문화부의 고고과학적 검측 결과 진품임이 확인돼 일단락됐다" - 이번 홍도관의 중요한 가치를 꼽는다면 언어문자학적으로는 기존 갑골문 및 금문에서 발견된 적이 없는 새로운 글자들이 발견되었다. 천문점성학 면에서는 중국천문학이 인도천문학에서 비롯되었다는 시각이 잘못되었음을 밝히는 증빙자료가 되어 이 부분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또 역사고고학적 분야에서는 은나라가 망할 무렵 금성이 대낮에 출현한 사실이 현대의 첨단 천문학에 의거하여 그 연대를 밝힐 수 있고 나아가 그 연대로써 중국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한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의 정확성 여부를 검증할 수 있으니 그 또한 큰 파장을 불러올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이 홍도관으로 인해 각필부호의 기원, 서법의 역사, 중국도자사의 역사 등 여러 면에서 기존의 학설이 수정되어야 하는 일들이 뒤따를 것으로 판단된다." - 향후 계획은 "홍도관 주둥이 아래의 측면에 빙 둘러 원형으로 새겨진 고대의 글자들을 탐색하고 그 진정한 가치를 밝히는 과정은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반지원정대가 겪었던 것 못지 않게 매우 험난하기도 했고 한편으론 신비스러운 일도 많았는데 그간의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남기고 싶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이 홍도관이 자신의 진가를 빛내줄 곳에 안착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
박종진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