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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걸으면 정신도 걷는다

[Well Walking] 제주 올레길 인기타고 디지털 시대 역행하며 앞으로 앞으로
  • 사진제공: <제주올레>, 이해선 저, 터치아트
"앉아 있으면 사유는 잠들어 버린다. 흔들어 놓지 않으면 정신은 움직이지 않는다." – 몽테뉴

태초에 걷기가 있었다. 먹고 걷고 자고 싸고… 걷기는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기본적 본능이자 권리 중 하나였다.

그러나 유사 이래 걷지 않기 위해 쏟아 부은 모든 노력으로 인해 이제 인간들은 모두 날거나 미끄러져 가게 되었고, 아니 심지어 움직일 필요도 없이 컴퓨터로 지구 반대편을 볼 수 있게 되자 이 기본적인 본능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잊혀져 갔다.

걷기 발굴자 중 한 명인 한국여행작가협회 허시영 회장은 지난 해 11월경 <대한민국 걷기 좋은 길 111>을 펴내며 말했다.

"걷는 길이 생기고 걷기 바람이 분다는 애기는 사실 좀 생뚱맞다. 애초에 모든 길은 인간이 두 발로 만든 걷는 길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국여행작가협회 작가 27명이 걷는 길에 주목하여 2009년 동시다발적으로 전국에 흩어져서 걷는 길 111 곳을 건져 올린 것은 새로운 여행 트렌드로서 걷기 여행의 출현에 주목하고 싶어서였다."

2007년 개발된 제주 올레길이 국내 걷기 열풍의 시발점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전까지 걸을 길이 없어 걷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문명의 극한 발달로 거의 모든 것을 앉아서 해결할 수 있게 된 지금, 사람들은 시대가 허락한 편리의 효용에 의문을 표하고 박탈당한 것들을 돌려받기 위해 걷기 시작했다.

1 공격을 거부하다

걷는 사람은 평균 시속 3~5km의 속도로 이동한다. 그에게는 세상의 크기와 현실이 명료하게 들어온다. 속도가 증가하면 그에 비례해 사물의 윤곽도 흐려진다. 더 빨라지면 아예 사라진다. 상대방의 표정도, 체온도, 심장 박동도 느낄 겨를이 없다. 서로 얼굴을 볼 수 없는 온라인 세상에서 우리가 좀 더 손쉽게 타인을 난도질할 수 있는 이유다.

웹 상에서 파헤쳐지고 무너진 인권은 불행히도 현실세계에까지 파장을 미친다. 우리는 걸을 때 비로소 우리가 사는 현실을 구성하는 존재와 형태들의 무한한 다양성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사람의 눈은 컴퓨터 모니터가 아닌 걷기에 최적화돼 있다는 사실이다. 걷는 사람은 세상을 점거하거나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살고자 한다.

2 속도를 거부하다

<걷기 예찬>의 역자 김화영 씨의 말에 따르면 문명이란 몸에 부착하거나 몸을 에워싸거나 몸을 실어 나르는 수많은 보조 장치들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다. 그 결과 몸은 정작 삶으로부터 소외되기 시작했다. 물론 기술의 진보로 인해 과거에 비해 시간이 절약된 것은 확실하다. 자동차를 타고 출근할 경우 걸어서 30분 걸리는 거리를 3분 안에 주파할 수 있다.

우리는 27분의 자유와 휴식을 얻었다고 기뻐하지만 이면에는 다른 계산법이 존재한다. 오스트리아의 사상가 이반 일리치에 따르면 출근 시간 3분에 차를 구매하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더해야 제대로 된 대차대조표를 만들 수 있다. 차 값과 유지비를 벌기 위해 우리는 몇 시간 동안 일하는가? 새 계산법에 따르면 사무실에 걸어가는 것보다 차를 타고 가는 것이 훨씬 많은 시간이 든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렇게 따지면 가장 빠른 이동 수단은 걷기다.

3 안락함을 거부하다

미친 듯이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 이면에는 극도의 웅크림이 있다. 불과 몇 시간 만에 다른 대륙으로 이동하는 데 필요한 것은 비행기지 우리의 다리가 아니다. 다리를 움직이지 않을 때 우리의 뇌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프랑스의 사상가 몽테뉴에게 있어 몸과 정신의 일치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갑작스레 떠오르는 생각이나 직관의 분출은 몸에 달린 신경, 근육, 장기와 밀접하게 달라붙어 있다.

그에 따르면 사유는 '뒤얽힌 혈관, 섬유, 정맥 힘줄을 타고 의식까지 전진'한다. 우리가 한 걸음 내디딜 때면 발에 있는 26개의 뼈와 100개가 넘는 인대, 근육, 그리고 힘줄과 신경의 유기적인 운동이 일어난다. 사유가 전적으로 생리적인 논리에 따라 다듬고 형상화된다는 말은 걷기를 잊어버린 우리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든다. 에세이스트 에밀 시오랑은 1965년 쓴 글에 이렇게 밝힌 바가 있다.

"일요일인 어제 나는 리옹 숲기슭을 20km도 넘게 걸었다. 오늘 내 안에는 철학에 대한 도취와 열광이 충만하다. 뇌는 근육을 움직일 때만 작동한다."

몸이 걸을 때 정신은 따라 걷는다. 한 번의 걸음으로 그 둘은 같이 움직인다. 자기의 걸음을 걷는 이는 자기의 삶을 사는 것이다.

4 고루함을 거부하다

걷기는 더 이상 퇴직한 장년의 유희거리나 인터넷과 친해지기 힘든 기성세대의 전유물이 아니다. 최첨단 기술을 탑재해 걷기를 오락으로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려오고 있는 것이다. 'GPS 드로잉'은 GPS를 들고 이동했을 때 지도 위에 기록된 위치 정보가 이어져 그림이 되는 신종 예술이다.

영국의 제레미 우드가 시초로 그는 2000년경부터 GPS를 가지고 영국 변두리를 걷거나 차를 타고 이동해 그림을 그린 후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려 사람들과 공유했다. 그의 홈페이지 gpsdrawing.com에 가면 발로 그린 코끼리와 나비, 사람 옆 얼굴을 볼 수 있다.

이 재미있는 놀이는 곧 전세계로 퍼져 지난해 8월 뉴욕 타임스에 소개된 지도 공유 사이트 에브리트레일닷컴(everytrail.com)에는 걷고 뛰고 자전거를 타며 만들어 낸 GPS 드로잉이 넘쳐 난다. 샌프란시스코에는 게임 캐릭터인 팩맨이, 브루클린에는 강아지가 그려져 있다. 미국의 토마시 베레진스키 씨는 GPS 지도 그리기에 취미를 붙여 1년 만에 7kg를 뺐다고 전한다. GPS 드로잉은 수신기가 없더라도 스마트폰만 있으면 얼마든지 그릴 수 있다. 'everytrail'이나 'mapmyrun' 같은 어플을 다운받아 작동시키면 경로를 따른 움직임이 지도 위에 그려진다.

국내에도 GPS 드로잉은 아니지만 걷기가 놀이로 승화된 사례가 있다. MBC에서 펴낸 <2010 트렌드 웨이브>는 올해 유행 중 하나로 콘셉트 워킹을 꼽으며 지난해 여름 디시인사이드에서 유행했던 '지하철 노선 정복 놀이'를 언급했다. 전역한 군인이 상일동부터 여의도까지 지하철 5호선을 따라 걸으며 시작된 이 놀이는 말 그대로 걷기로써 지하철 역을 정복하는 프로젝트다.

같은 커뮤니티 이용자들은 그가 인증을 위해 찍어 올린 역 사진에 고무돼 연달아 2호선 정복 사진, 8호선 정복 사진 등을 올리며 놀이에 참여했다. 이처럼 온라인 커뮤니티의 발달과 최신 기술의 접목으로 걷기는 젊은 세대들의 또 다른 놀이 문화로 거듭나는 중이다.

참고서적: < 걷기예찬> 다비드 르 브르통, 현대문학 <걷기의 철학> 크리스토프 라무르, 개마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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