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 비움, 행복] 법정 스님 입적후 경제·사회·심리학으로 본 '무소유' 열풍의 실체

사실,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 나는 아무것도 갖고 오지 않았다.

살 만큼 살다가 이 지상에서 사라져 갈 때에도 빈손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살다 보니 이것저것 내 몫이 생기게 되었다.

물론 일상에 소용되는 물건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없어서도 안 될 정도로 꼭 요긴한 것들만일까? 살펴볼수록 없어도 좋을 만한 것들이 적지 않다. -<무소유> 중에서

법정 스님 사후에 무소유 열풍이 불고 있다. 법정 스님이 입적하자 그의 대표 산문집 <무소유>의 판매가 급증하더니 곧 동이 나고 말았다.

76년 초판이 나온 이래 300만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가 스님의 입적을 계기로 다시 뜨거운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11일 입적한 법정 스님의 법구가 다비식을 위해 순천 송광사로 운구된 12일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많은 신도들이 모인 가운데 스님 법구가 운구차량에 실리고 있다. 다비준비위원회는 일체의 장례식을 거행하지 말라는 스님의 당부에따라 관도 만들지 않았다./김주성기자
그가 생전에 <무소유>를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는 것은 아니었다. '허욕을 버리고 필요한 만큼만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법정은 글뿐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죽는 순간까지 철저히 무소유 정신을 실천했고, 이것이 뭇사람들에게 더욱 큰 감동과 가르침으로 다가왔다.

너나 할 것 없이 소유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시대에 무소유의 정신과 삶에 이처럼 환호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법정 현상'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무소유와 정반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물질만능주의로 치닫고 있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돌아보는 자성의 목소리도 높다는 반증이다.

<무소유>의 폭발적인 인기는 대중이 스님의 무소유 정신에 공감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무소유>를 출간한 범우사 윤형두 대표는 "마케팅을 전혀 하지 않았지만 독자들은 그저 글이 좋아 이 책을 사서 읽었다"며 "물질주의에 찌들고, 빈익빈부익부가 심화돼 가는 사회에서 무소유가 던지는 메시지에 영혼의 위로를 얻는 이들이 많다는 증거가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윤 대표는 일본에서도 90년대 초반 무욕(無慾)과 무위(無爲)의 사상을 소개한 <청빈의 사상>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서양에서 '비움'의 철학을 강조한 틱 낫한 스님의 저서가 많은 이들에게 감화를 준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무소유>의 판매부수를 보면, 70년대부터 90년대 외환위기 전까지 100만부 가량 기록하다 외환위기 이후인 2000년대 들어 200만부를 돌파하며 급증하는 양상을 보였다. 외환위기 이후 강남 부동산 가격 폭등과 펀드 열풍 등이 불면서 재산 불리기에 대한 집착이 더욱 거세졌으며, 이전보다 계층 양극화가 심화된 시기다. 또, 2002년 1억 장이 넘는 신용카드가 발행됐으며, 해외 명품열기를 비롯해 '구별 짓기'를 위한 과소비 문화도 빠르게 확산됐다.

이런 상황에서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는 독자가 급증한 것은 소유에 대한 염증과 성찰의 목소리도 함께 커졌음을 시사한다.

경제학 "소유, 일정수준 이상 증가하면 박탈감만 커져"

많이 소유할수록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경제학자들의 수학적 모델로도 입증이 됐다. 14일 영국 가디언지는 "캐나다 경제학자들이 수학적 모델을 통해 국민의 생활이 일정수준 이상 되는 부국(富國)이 되면 국민의 행복감은 오히려 낮아진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전했다.

캐나다의 경제학자인 커티스 이튼과 뮤케시 에스워런 교수는 최근 경제학 학술지 '이코노믹 저널' 지에 발표한 논문에서 국가가 일정 수준의 부(冨)를 축적한 이후에는 부로부터 얻는 이득은 없고, 상대적 박탈감만 커진다고 결론 내렸다.

이들의 연구는 1899년 '과시적 소비'라는 개념을 창시한 미국의 경제학자 베블렌의 이론에서 영향을 받았다. 베블렌은 '유한 계급론(The Theory of the Leisure Class)'이라는 저서에서 사람들이 소비를 통해 사회적 지위를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과시적인 소비로 이어진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리고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점차 과시적인 소비를 일삼게 된다는 것이다.

이튼과 에스워런 교수는 이 같은 베블렌 이론에 바탕을 두고, 부국이 될수록 국민들의 보석이나 명품 브랜드처럼 신분을 상징할 수 있는 사치품의 소비에 집착하게 되는데, 이런 소비 성향은 사치품을 소유하지 못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박탈감을 준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경제가 일정 수준 이상 성장하는 것은 사회 전체적으로 볼 때, 게임에서 쌍방 득실의 차가 0인 '제로섬 게임'이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사회학, 소득 증가할수록 탈물질적 욕구도 강해진다

행복감이 소유에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은 많은 사회학자들이 입증하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고려대 사회학과 김윤태 교수는 '세계 행복학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 네덜란드의 사회학자 루트 빈호벤 교수의 통계조사를 인용해 "국가소득이 일정수준 이상 올라가면 국민의 주관적 만족감은 더 이상 올라가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돈이 행복에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소유욕이 충족되면, 물질 이외의 가치에서 행복감을 얻으려 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김 교수는 "소득수준이 높은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국은 1970년대부터 이미 물질보다 삶의 질을 더 중시하는 가치로 이동했다"고 말했다.

탈물질적 가치를 옹호하는 '무소유 열기'는 절대빈곤을 벗어난 사회에서 주로 고소득층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가치관이자 라이프스타일이라는 것이다.

90년대 후반, 미국에서 등장한 '보보스' 족이 좋은 예다. 보보스(bobos)란 물질적 가치를 숭배하는 부르주아와 금욕적, 반물질적 가치를 숭배하는 보헤미안의 합성어로, 미국의 고소득 엘리트 계급의 새로운 가치관과 스타일을 대변한다. 서유럽에서는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층을 중심으로 70~80년대부터 이미 탈물질적 가치를 중시하는 성향이 대두됐다.

미국이나 서유럽에 비해 아직까지 소득수준이 낮은 우리나라는 어떨까.

김 교수는 "아직까지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보더라도 물질적 선호도가 훨씬 높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그는 '법정 현상'에서 보이는 무소유 열망은 앞으로 점차 강해질 것으로 전망했다. 경제수준이 계속 높아지고 있기 때문에 소유에 의한 충족감은 한계에 부딪힐 것이라는 게 그 이유다.

심리학, 많이 소유할수록 행복감 떨어져

법정은 <무소유>에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고 했다.

좋은 집, 좋은 학벌, 좋은 직장, 좋은 옷 등 남들보다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갖기 위해 분투하는 현실은 무소유 정신에서 반추해 보면 우리를 더 많이 옭아매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무소유 열풍은 우리가 얼마나 소유에 집착하는 사회이며,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이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심리학에서는 경제수준이 높아질수록 소유욕도 덩달아 높아지고, 이로 인해 행복감은 점점 더 떨어진다고 보고 있다. 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 교수는 "처음에는 작은 것으로 만족할 수 있지만 다음의 만족을 위해서는 더 큰 것이 필요하다. 욕망의 충족은 점점 더 큰 욕망을 낳기 때문에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만족은 더 작아지게 마련"이라고 했다.

황 교수는 "뉴욕의 여피나 미국 할리우드 스타들 사이에서 불교의 명상 열풍이 부는 등 소득수준이 높은 계층에서 탈소유를 선망하는 것은 더 이상 물질적인 소유를 통해 행복을 얻기 힘들다는 것을 터득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또, 의사나 변호사 등 고소득 직업의 사람들이 느끼는 스트레스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2배가 넘고, 이들이 인생에 대해 느끼는 만족감이나 행복감은 평균보다 더 낮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따라서 일부 경제학자나 사회학자들의 주장처럼, 심리학자들 역시 절대빈곤 상태를 벗어나 일정 수준 이상의 소득수준에 이르면 무소유를 통해 행복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나타난다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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