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 코드, 변화의 바람] 성 소수자 문화… '이상한 사람들' 아닌 '함께 사는 사람들'로

영화 '헤드윅'
검정 가죽 치마, 망사 스타킹, 롱 부츠. 진한 화장에 금발 가발까지 쓴 여인(?)의 얼굴엔 광대뼈가, 목엔 울대뼈가 유독 두드러져 보인다.

무대 위의 '여인'이 노래를 부르면, 그 아래 객석은 그의 액션에 뜨거운 환호와 박수로 화답한다.

이처럼 신나고 유쾌한 뮤지컬로 정평이 나 있는 <헤드윅>이지만, 그 내용을 알고 보면 '퀴퀴하기' 이를 데 없다. 게다가 헤드윅은 무대 위의 판타지. 현실의 이성애자들에게 퀴어는 아직도 낯선 존재다.

퀴어(queer)는 동성애나 트랜스 젠더, 복장도착자 등 성 소수자 문화를 포괄하는 말이다. 그동안 <왕의 남자>와 <브로큰백 마운틴>, <쌍화점> 등 동성애 코드가 담긴 작품들이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같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퀴어를 다루는 시도는 많지 않았다. 퀴어는 이성애자들에게 여전히 하나의 '대상'일 뿐이었다.

최근 등장하고 있는 몇몇 시도들은 퀴어를 이성애자 사회의 동반자로 인식하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금기에서 풀려나 또 하나의 '우리'가 되고 있는 퀴어 작품들과 그들이 내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본다.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
드라마 속 퀴어, 밑반찬에서 주요리로

'금기'에서는 벗어났어도 한국드라마에서 동성애를 다루기란 만만치 않다. 몇 년 전 사극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주몽>에서 협보(임대호)와 사용(배수빈)의 이색적인 사랑이 그려졌지만 시청자들을 위한 곁가지 재미에 불과했다. 선정적인 설정으로 이름 높은 임성한 작가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말 <보석비빔밥>에서는 여성 캐릭터들의 동성애와 양성애적 에피소드가 등장해 이슈가 됐지만, 극 전개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정도였다.

동성애 코드를 전면적으로 내세운 드라마는 <커피프린스 1호점>이 첫 번째였지만, 이 역시 본격적인 퀴어를 다룬 것은 아니었다. 최한결(공유)이 남자인 고은찬(윤은혜)을 좋아하게 되어 고민하다 결국 사랑을 결심하는 과정까지는 분명히 '퀴어 드라마'였다. 그러나 고은찬이 여자임을 밝힌 후부터 최한결의 고민은 깨끗이 사라지고, 결국 이성애자들의 '개운한' 연애 이야기가 다시 시작됐다.

지난 달 말 첫 방송을 시작한 MBC 드라마 <개인의 취향>은 그런 <커피프린스 1호점>을 살짝 변주시킨 설정으로 출발했다. 이야기의 시작에는 여자들의 '게이 친구 판타지'가 있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 애인을 빼앗긴 주인공 개인(손예진)이 여자도 남자도 믿지 못하게 되자 게이 친구(이민호)를 룸메이트로 들이게 되는 것.

하지만 <커피프린스 1호점>에서도 여주인공이 남자인 척했듯이, 이 드라마에서 게이 친구는 사실 게이가 아니다. 결국 이성애자인 이성들이 한 공간에서 사는 이야기는 성숙하지 못한 두 남녀의 성장담 혹은 로맨스가 될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가짜 게이의 커밍 아웃 혹은 아웃팅까지의 유통기한을 안고 있는 게이 설정은 로맨틱 코미디의 소모품일 수밖에 없다.

드라마 '주몽'의 협보와 사용
그럼에도 이 작품은 게이 코드를 다루는 방식에서 기존 드라마들과 다른 태도를 보인다. 이제까지 드라마에서 '게이'라는 설정이 갈등의 시작이었다면, 이 작품에서 게이는 희망의 시작이다. '타자'인 것은 여전하지만, 여성과 남성의 진부한 대립 구도 사이에서 인간관계의 다양함을 설파하는 효과적인 도구가 된다.

연출을 맡고 있는 손형석 PD 역시 이 드라마를 '까칠한 매력의 주인공이 게이로 오해되면서 풀어가는 유쾌하고 밝은 로맨틱 코미디'로 정의하며, "이들의 연애를 통해 설레는 마음으로 연애하고 싶은 기분이 들게끔 만들겠다"고 담백한 연출 방향을 밝힌다.

우리 안의 '다른 모습'이 왜 파격인가

"아들하고 같이 보세요. 소수자에 대한 편견이 없는 아들로 만들어주세요."

"모녀가 함께 보고 계신 그림이 떠오르네요. 횟수를 거듭하면서 아마 점점 편안히 즐길 수 있을 거예요."

드라마 '개인의 취향'
스타 방송작가인 김수현이 자신의 트위터에 쓴 글들이다. 지난 달 김 작가의 신작인 SBS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가 시작된 후 그의 트위터에는 응원과 함께 우려의 소리도 종종 보인다. '가족드라마'와 '멜로드라마'라는, 주말극의 양대 장르에서 오랫동안 최고의 자리를 지켜온 김 작가가 이번 작품에서 동성애를 다루고 있기 때문.

앞서 <커피프린스 1호점>이나 <개인의 취향>이 가짜 게이에 관한 해프닝이라면, <인생은 아름다워>는 진짜 게이들이 겪는 일들을 다룬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게다가 그것을 다루는 작가가 김수현이다. <사랑이 뭐길래>(1991), <목욕탕집 남자들>(1995)에서 가부장제의 견고한 가족애를 담아냈던 그 김수현이다.

가족이라는 기본 틀과 구성원의 애정사가 씨줄과 날줄로 엮인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그가 생각하는 퀴어는 그 단어처럼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라 '함께 사는 사람들'이어서 더 의미 있다. 장남 태섭(송창의)과 이혼남 경수(이상우) 커플이 등장하면서 드러난 동성애 코드는 코믹하거나 '남의 이야기'로 치부될 문제가 아니다. 어느날 우리 가족에서도 불현듯 나타날 수 있는 현실적인 고민이다. 그래서 드라마 속 보수적인 이성애자 가족이 겪게 될 당황스러운 상황은 시청자로 하여금 더 깊은 공감을 이끌어낼 것으로 보인다.

동성애 설정에 대한 김수현 작가의 반응은 담담하다. "별로 파격이랄 거 없는데요. 동성애가 그렇게 느껴지나 봐요." 쿨하게 대꾸하는 노작가는 30여 년 전인 <청춘의 덫>(1978)에서 혼전동거와 임신을, 30년이 지난 근작 <엄마가 뿔났다>(2008)에서도 1년 간의 자체 휴가를 만끽하는 엄마로 한바탕 논란을 이끌기도 했다.

하지만 그 자신이 말했듯이 김수현 세계의 특징이자 최대의 장점은 '파격'보다는 동시대 변화에 대한 탁월한 적응력과 대중의 욕망을 꿰뚫는 통찰력이다. 그래서 트위터에 적힌, '자식과 같이 보라'는 권유는 퀴어에 대한 김 작가의 인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
한쪽에 치우친 퀴어는 NO! 레즈비언 이야기 들어봐

그런데 영화건 드라마건 동성애 작품은 왜 게이들 이야기뿐일까. 레즈비언 로맨스나 삶을 다룬 작품은 왜 다루어지지 않는 것일까. 8일부터 열리는 제12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이런 의문에 답이라도 하듯 상설 섹션인 '퀴어 레인보우'를 마련해 무지개처럼 다양한 레즈비언 이야기를 보여준다.

올해 퀴어 레인보우 섹션의 부제는 '세대공감'이다. 다큐멘터리와 로맨틱 코미디 등 다양한 장르 13편에서 10대 소녀에서 70대 할머니들까지 고른 세대의 퀴어 이야기가 관객과 만난다. 특히 종교와 민족 문제까지 아우르는 다큐멘터리에서는 더 넓고 깊어진 퀴어 정치학의 성장을 체감하게 한다.

13편의 작품 중에서도 눈에 띄는 작품은 나나 노일 감독의 <파로에서 온 내 친구>다. 히치하이킹을 하던 14살 소녀와 사랑에 빠져 본의 아니게 남자 행세를 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언뜻 <커피 프린스 1호점>을 떠올리게 한다.

국내작품들은 한국 사회의 퀴어에 대한 인식과 내면화된 호모포비아(homophobia, 동성애자 기피)를 다루고 있어 더 피부에 와닿는다. 단편 <이탈>은 20대의 연애와 젊은 시절의 방황을 통해 자기 안의 호모포비아를 극복하고 긍정하기까지의 과정을 아름다운 영상에 담아낸 작품이다.

영화 '쌍화점'
<커밍아웃 여행>은 지금도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을 법한 이야기를 다뤄 감동을 자아낸다. 영화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된 30대 중반 영화감독과 그 어머니의 여행을 통해 커밍아웃 후 모녀관계를 재설정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한편 이제까지의 레즈비언 이야기들이 주로 어리거나 젊은 층에 국한되어 있었다면 <탑 트윈스-천하무적 쌍둥이 레즈비언>은 레즈비언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 눈이 간다. 할머니들의 이야기라고 해서 영화도 '올드'하지는 않다. 뉴질랜드의 유명 코미디언이자 '탑 트윈스'라는 컨트리 가수로 활동 중인 이 쌍둥이 할머니들은 다른 세대보다 오히려 더 활기차고 긍정적이다. 젊은 시절의 열정을 잃지 않고 여전히 활발하게 사랑하고 노래하는 이들의 모습은 레즈비언의 삶에 대한 편견을 씻겨준다.

퀴어 레인보우 섹션을 맡고 있는 조혜영 프로그래머는 "올해 상영되는 영화들을 통해 60년대 서구에서 시작되어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퀴어문화운동의 역사를 느끼게 만든다"고 설명한다. 60년대 진보적 분위기 속에서 퀴어문화운동을 시작했던 이들이 이제 60~70대가 되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시기가 되면서, 각 세대만이 겪게 되는 문제들을 다양하게 고민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조 프로그래머는 "올해 상영되는 영화들을 통해 각 세대의 관객들이 함께 울고 웃으며 자신의 세대에서 경험하고 있는 고민과 감정을 함께 나누고, 퀴어한 삶의 미래를 가늠해보며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늘 밖으로 나온 퀴어는 이제 밝고 때로는 유쾌하게 우리 곁을 활보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애자들에게 그들은 여전히 낯선 존재다. 다행히 최근 몇 년 사이 다양한 분야에서 대중적으로 활용되면서 퀴어에 대한 인식도 시나브로 바뀌어가고 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퀴어 레인보우 섹션 '파로에서 온 내 친구'
영화와 드라마 등 대중 장르에서 퀴어에 대한 시선의 변화는 우선 '차이'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제까지의 퀴어가 그저 흥미로운 타자로서 소비되어 왔다면 최근 나타나고 있는 퀴어 캐릭터들은 이성애자 사회가 소수자에 대한 이해와 소통의 가능성을 찾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퀴어 레인보우 섹션 '탑 트윈스 - 천하무적 쌍둥이 레즈비언'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