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손' 로댕이 온다] 고뇌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을 표현, 인체를 개념적인 것으로 바꿔

대리석 보관 아뜰리에의 '신의 손' 옆에서 로댕. (사진제공=로댕미술관 제공)
오귀스트 로댕(1840-1917)은 미켈란젤로 이후 가장 위대한 조각가로 평가받고 있다.

다양한 모습을 지닌 인체를 통해 근대적 자아 즉, 고뇌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을 표현하고자 한 로댕의 창조성은 근대 계몽주의 철학을 개척한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란 철학적 대전제를 시각적으로 구현한 <생각하는 사람>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로댕 이전의 조각가들은 대체로 신, 영웅, 통치자, 권력자 등을 찬양하는 작품에 주력했으나, 로댕에 이르러 마침내 '근대적 주체로서의 인간'이 표현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혁신성을 발견할 수 있다.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로댕은 '진실의 추구자이자, 인생의 파수꾼'이었다. 그러나 로댕은 전통의 부정과 파괴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미술의 일반적 흐름과는 달리 고전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고대로부터 내려온 부동적이고 지각적인 대상으로서의 인체를 개념적인 것으로 바꾸어놓음으로써 현대조각의 형성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다.

로댕은 미켈란젤로로부터 장식미술학교에 다닐 당시 배웠던 카르포(Jean-Baptiste Carpeaux)에 이르기까지 고전조각에 대한 철저한 연구를 바탕으로 현대조각의 문을 열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위대한 손'을 지닌 예술가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생각하는 사람'(1881-1882). 석고,184.5x107x150cm. (사진제공=로댕미술관 제공)
생전에 자신에게 주어진 온갖 비난과 공격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자신의 세계를 펼쳐온 그에게서 우리는 자신의 예술세계에 충실한 예술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를 기념하여 열린 대규모 개인전을 통해 일약 국제적 명성을 얻은 로댕의 예술이 지닌 위대함은 조수였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의 열렬한 찬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20세기 초반의 많은 조각가들이 그를 다리 삼아 자신들의 세계를 개척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로댕은 고전조각으로부터 현대조각으로 나아가는 방향을 제시한 현대조각의 창시자이자 선구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로댕은 초기작인 <청동시대>가 실물을 주조한 것이란 혹평과 함께 멸시를 당하기도 했으나 뒤이어 발표한 <세례요한>의 세속적 성공으로 정부로부터 새로이 문을 열 장식미술관의 문에 제3공화국의 정치이념인 인간의 우애와 권리를 표현해 줄 것을 주문받아 <지옥의 문> 제작에 착수하였다.

1880년에 시작한 <지옥의 문>은 그가 죽을 때까지 진행한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르네상스 거장 기베르티의 <천국의 문>에 대응하여 제작한 <지옥의 문>의 주제는 단테가 쓴 『신곡』의 지옥편(Inferno)과 보들레르의 『악의 꽃』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서술적 흐름에 따라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으로 설계하였으나, 장식미술관 건축계획이 취소되자 자신의 작업실에 놓아두고 지속적으로 수정, 보완하거나 덧붙였기 때문에 이야기의 흐름이 명료하지는 않으나 극적이면서 풍부한 내용을 지닌 인물들이 소용돌이치는 한 편의 대서사시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 문의 주인공인 <생각하는 사람>은 작품의 중심의 팀파눔에 앉아 지옥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잠겨 있는데 그는 지옥을 바라보는 단테 혹은 조각가 자신이거나 로댕의 말대로 사고(思考)하는 인간에 대한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문의 전체구조에서 중요한 지옥은 제2제정의 부패와 퇴폐는 물론 모순된 시대의 고통과 격정을 반영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안드로메다 26x30x21cm, 대리석, 1887년
방종, 허영, 타락, 절망, 고통, 죄의식이 점철된 지옥의 모습은 단테가 정치사건에 연루되어 망명을 경험한 후 겪어야 했던 정치적, 윤리적, 종교적 문제로 고민하면서 집필한 지옥의 모습은 물론 요한계시록,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등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욕망과 고통, 심판과 정죄의 서사를 표현한 것이란 점에서 랭보의 <지옥의 계절>과도 정서적으로 연결된다.

<지옥의 문>을 만들고 있으면서도 로댕은 칼레 시가 백년전쟁 중인 1347년 영국군에 포위당했을 때 도시를 구하기 위해 죽음을 자처한 용감한 여섯 시민들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조형물을 세울 계획을 듣자 칼레 시장을 자신의 작업실로 초청하여 결국 <칼레의 시민> 제작계획을 성사시킨다. 로댕은 이 역사적 기념물을 위한 작업에서 각 인물의 감정을 손의 표정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다.

로댕의 예술세계가 농축된 <발자크상>은 유령과 같은 것, '이름도 없고 조잡한 덩어리, 거대한 태아'란 이유로 거부당했지만 에밀 졸라로부터 지지를 받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1898년 파리의 한 화랑에서 그의 <입맞춤>과 <발자크상>이 전시되었을 때, <발자크상> 만은 야유와 조소 속에 그가 정신착란에 걸렸다는 비난을 들었으나, 그 군중들 속에서 부르델만이 "바로 저것, 그는 우리 모두에게 길을 보여주었다"라고 감탄했던 사실은 그가 선배 조각가 로댕의 현대성을 정확하게 읽었음을 보여준다.

로댕은 여러 번에 걸친 습작을 통해 마침내 하나의 덩어리처럼 표현된 발자크의 모습에서 디테일 대신 거친 표면이, 영웅적 자세보다 고뇌하는 인간상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상에서 로댕이 비록 전통을 파괴하지는 않았지만 전통을 바탕으로 조각표현의 영역을 확장함으로써 고전주의의 관습에 얽매여 있던 조각에 현대성을 부여한 조각가로 평가할 수 있다. 조각가의 손의 압력과 심지어 지문조차 느낄 수 있는 질감과 빛에 연출되는 작품의 표면효과, 극적인 음영의 대비를 추구함으로써 회화의 인상주의에 필적하는 조형적 성취를 이룩해내었다는 점에서 그를 인상주의 조각가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최태만 국민대 교수·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