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재탄생]그들의 욕망과 상처, 우리들의 연민과 공감 불러… 시대 따라 계속 변주

드라마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의 비비안
이제 악인들은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지 않는다. 정의와 싸우다 마지막에야 완행열차에 몸을 싣는 악인들이 있는가 하면, 시청자의 응원을 받으며 최후까지 건재를 과시하는 악인들도 있다.

선을 돋보이게 하는 보조 역할에서 벗어난 악은 입체적이고 생동감 있는 개성으로 시청자를 사로잡는다. 한없이 착하고 바르기만 한 주인공에 비해 인간적인 매력을 갖춘 악역들은 오히려 극을 이끄는 원동력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랑받는 악역, 인기있는 드라마의 이유

"거리를 못 돌아다녀요. 저만 보면 인상을 쓰고, 심지어 욕까지 하는 분들도 있어요."

아침 토크 프로그램에 출연한 한 연기자가 푸념을 늘어놓고 있다. 하지만 말하는 본인은 물론, 진행자와 방청객들도 모두 깔깔대며 즐거운 반응이다. 욕까지 먹을 만큼 실감나는 악역 연기가 드라마의 인기를 반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 <개인의 취향>의 김인희
악의 무리를 무찌르고 정의가 승리하고 마는 사필귀정의 이야기 구조는 마르고 닳도록 반복되고 있다. 그럼에도 그 뻔한 구조가 여전히 시청자에게 유효한 것은 악이 얼마나 매력적으로 그려지느냐에 달려 있다.

시청률을 끌어올리며 이슈를 만들었던 드라마들에는 입체적이고 막강한 악한 캐릭터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사람들은 극이 전개되면서 정의가 악을 물리치거나, 혹은 악이 정화되는 과정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때문.

하지만 마지막까지 정체성을 잃지 않고(?) 카리스마를 발산하며 최후를 맞는 악역들은 더 큰 사랑을 받기도 한다. <하얀거탑>의 장준혁은 극 처음부터 최도영이라는 인물과 극단적으로 대비되며 악한 주인공으로서의 차별성을 얻는 데 성공했다. 온갖 권모술수와 처세술, 기회주의와 속물근성으로 점철된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장준혁은 특유의 자신감과 완벽한 실력으로 시청자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이 출세지향의 악한에게 사람들이 열광했던 것은 애정보다는 연민과 공감 때문이었다. 소시민이라는 태생적 한계와 그를 극복하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장준혁의 모습에서 '돈 없고 백 없는' 소시민들이 인간적 공감을 보내준 것이다.

이 연민과 공감을 자아내는 악한 캐릭터는 이후 계속해서 변주되어왔다. 타이틀 롤보다 더한 인기로 극을 지배했던 <선덕여왕>의 미실이 그렇고, 주인공 삼인방을 내내 괴롭히다 끝내 그들을 사지에 몰아넣었던 <추노>의 황철웅도 장준혁의 다른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

드라마 <수상한 삼형제>의 태실장
욕망의 표현에 충실한 여자, 악녀

선악의 대비 속에서 남성 악당이 비교적 평면적인 인물로 그려졌다면, 악역의 진화를 촉발시킨 것은 악녀 캐릭터였다. 특히 남성에게 배신당한 여자의 증오심에서 탄생한 '복수하는 악녀'의 캐릭터는 시청자들로 하여금 처음으로 악의 편에 서는 것을 망설이지 않게 했다.

복수극이 끝나고 앙금이 해소된 악녀에게 동정과 격려가 쏟아졌다는 것은 시청자 역시 그가 피해자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어서다. 하지만 현대의 악녀는 더 이상 피해자의 위치에 있지 않다. '괴짜'나 '엽기'가 기존의 부정적인 뉘앙스 대신 긍정적인 이미지를 얻은 것처럼, 악녀도 본능에 충실하고 표현에 솔직한 여성을 가리키는 말로 변하고 있다. 한 케이블 방송에서 시즌을 거듭해 방영되고 있는 <악녀일기>는 악녀에 대한 현대 여성들의 욕망의 단편을 그대로 보여준다.

드라마에서 악녀는 그런 욕망을 표현하기에 더 효과적인 인물들이다. <개인의 취향>에서 친구의 연인을 빼앗아 결혼한데다 다시 그 친구의 연인이 될 남자마저 유혹하고 있는 큐레이터 김인희는 악녀의 전형이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이 악녀의 역할이 결국 두 주인공의 애정전선을 촉진시키는 매개라는 점을 알기에 그를 미워하지 않는다.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의 비비안은 그 옛날의 <청춘의 덫>의 윤희를 연상시킨다. 남자에게 한결 같은 마음을 전했지만, 배신당했다고 느끼는 순간 애정은 증오로 돌변한다. 결국 비비안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최강타를, 윤희가 그랬던 것처럼 '부숴버리고' 만다. 하지만 팜므 파탈의 전형 같은 그도 결국 최강타가 생명의 위협을 받자 다시 구해내며 사랑에 약한 악녀의 모습을 보여준다.

드라마 <추노>의 황철웅
반면 모든 악역들이 이런 정당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로 시청률을 높이고 있는 <수상한 삼형제>에는 진짜 악녀들로 가득차 있다. 못된 시어머니와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는 큰며느리, 이기적인 작은며느리, 그리고 불륜으로 가정을 파탄낸 태실장까지 미운 악녀들이 이전투구를 벌인다.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속물들이라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공감을 자아내지 못하는 '막장 행동'을 서슴지 않는 이 악녀들은 스스로 비난과 욕설의 대상이 되며 시청자에게 통쾌함을 선사한다.

선과 악의 역할 바꾸기

"왜 이렇게 서우가 악당 같죠?"(박력*)
"마음이 아프네요 문근영이 더 불쌍해요."(abne***)
"그냥 <신데렐라 엄마>로 제목을 바꾸고 미숙언니를 주인공으로 하지."(ging**)

최근 드라마 <신데렐라 언니>를 문자 중계하는 한 인터넷 커뮤니티의 반응은 그대로 '악역 활용 변천사'를 보여주는 듯하다. 극 초반 신데렐라를 짜증나는 아이로, 신데렐라 언니를 쿨한 캐릭터로 설정해 원작 동화의 역할 바꾸기를 시도했던 <신데렐라 언니>는 의도했던 바를 일찍 성취했다.

드라마에서도 신데렐라는 여전히 착하고 신데렐라 언니는 나쁘다. 하지만 시청자의 공감을 받은 쪽은 신데렐라 언니다. 부모의 사랑을 갈구하고 독차지하려는 신데렐라 효선의 유아적 행태가 피곤하게 느껴져서다. 반면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매정한 신데렐라 언니 은조는 그 차가움 뒤의 고독함을 여러 차례 내비쳤다. 속물적인 엄마와 어린 아이 같은 의붓동생 사이에서 은조는 두 사람을 틈틈이 배려하면서도 자신의 고통은 혼자 감내한다.

드라마 <신데렐라 언니>의 은조와 효선
의도적인 악이 아니라는 점에서 두 자매의 선악 구분이 모호해질 때쯤 유력하게 떠오르는 악역은 기훈이다. 불순한 의도로 두 자매의 세계에 들어온 그는 기어이 그 세계를 위태롭게 지탱하던 인물을 쓰러뜨리고 만다. 하지만 그마저도 악역이라고 단정하기는 쉽지 않다. 자신이 갈구하던 것을 갖기 위해 다른 이의 것을 빼앗았다는 것을 안 순간, 그들을 위해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버리는 결단을 보이기 때문.

등장인물 모두 각자의 사연이 있고 어느 정도의 공감도 가는 캐릭터들을 제외하면, 비난할 수 있는 악역은 은조의 엄마 강숙이다. 사실 <신데렐라 언니>의 모든 고민과 갈등은 강숙에서 비롯된다. 물론 그에게도 나름의 정당성은 있다. 영화 <하트 브레이커스>의 모녀 사기단처럼 자신과 딸을 위한 이익 추구가 그의 사악함의 배경이다.

하지만 그 속내를 감추고 대성 일가에서 8년간 '착한 엄마' 연기를 해내는 그의 철두철미한 와신상담은 은조와 시청자를 질리게 했다. 아울러 남편 사망 이후 속내를 드러내며 신데렐라 엄마로 본격 귀환하는 모습은 카이저 소제의 반전을 방불케 한다. 한 네티즌의 말처럼 이 드라마의 진정한 악역은 '신데렐라 엄마'라고 할 만한 것이다.

구분 어려워진 선악, 우린 어느 쪽일까

이제까지 보는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악역은 대체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순수한 악의 결정체였다. 영화 <미저리>의 애니 윌킨스나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 박사, <세븐>의 존 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시거 등은 마치 인간성이라는 것이 거세된 듯한 악의 화신들이다. 이들 앞에 선 정의는 너무나 미약해서 둘 사이의 차이는 극명해보인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시거
<다크 나이트>의 조커는 악당을 넘어선 '혼돈' 그 자체였다. 그가 원하는 것은 돈도 아니고 살인이나 파괴도 아니다. 단지 고담시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일이다. 초능력도, 변변한 무기도 없지만 혼돈을 위한 즐겁게 노력(?)하는 그 앞에서 배트맨의 정의 역시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특히 <배트맨> 시리즈의 악당들은 선악 구분이 모호한 인물들로 깊은 인상을 준다. 그들이 대개 이 사회가 낳은 괴물들이다. 조커나 펭귄, 투페이스, 캣우먼 등은 어둠에서 태어난 안티 히어로 배트맨과 이복쌍둥이 같은 관계다.

<왓치맨>의 히어로들 역시 이런 딜레마에 빠져 있다. 전쟁 이후 할 일이 없어진 히어로들이 다시 한 번 지구를 구하는 이야기지만,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한다는 명분 아래 한 히어로가 벌이는 계략은 정당화될 수 있을까. 지구평화를 위해 세계의 주요도시를 파괴하고 죄없는 인명이 희생시킨 그는 정의의 수호자와 허울좋은 악의 판단을 관객에게 맡긴다.

픽션 속에서 선악 구분이 모호하거나 딜레마에 빠진 캐릭터들이 계속해서 등장하는 것은 현대사회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이 기계적인 이분법으로 판별될 수 없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심지어 <신데렐라 언니>의 강숙까지도 모성애의 측면으로 보면 이해 가능하다.

분명한 것은 최근 사랑받는 악역에는 전형적인 악의 모습보다는 우리 자신도 가지고 있을지 모를 욕망과 상처가 숨어있다는 것. 비현실적인 정의보다 더 인간적이고 낮은 곳에 임하는 악역에 더 공감하는 이유는 그런 그들 안의 욕망과 상처에 공명하기 때문이다.

영화 <왓치맨>의 로지맨디아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