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일은 문화다] 실용서에 치우친 패션 서적, 인문학 기반으로 연구와 고찰 필요

"이게 다 정윤기 때문이다"

올해 1월에 출간된 국내 최고의 스타일리스트 정윤기 씨의 저서 <올 어바웃 스타일>은 이제 한국에서 패션 관련 서적에 대해서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절반은 '뚱뚱한 사람은 가로 줄무늬를 피하세요' 류의 조언, 나머지 절반은 연예인들과의 친분으로 채워진 이 수많은 책들을 어쩌면 좋을까? 우리가 지금 패션 서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스타일 조언을 책에서 얻고자 하는 대중의 욕구는 생각보다 강했다. 지난 2007년 후반 잡지사 에디터 출신인 이선배 씨가 쓴 <잇 스타일(it style)>이라는 책이 베스트 셀러 대열에 오르면서 이듬해 비슷한 시기에 후편 격인 <잇 걸(it girl)>이 출간됐다.

그녀는 서문에서 <잇 스타일>에 열광한 사람들이 중학생부터 50대 남자까지 다양하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다고 밝혔다.

"외국에서 살다 보니 세상에 우리나라 사람처럼 음주가무 좋아하고 외모에 목숨 거는 사람들이 없는 것 같다. 바다 건너 누구의 옷차림이 당일 블로그 이웃들 사이에 퍼지고, 늘 부족한 수입에도 철철이 새 옷을 장만하는 재미로 살아가는 소시민들이 무척이나 많다는 사실이다. 나를 포함한 이들의 바람은 한 가지, 스타일리시하게 살고 싶다는 것!"

이때까지만 해도 신선했다. 전직 잡지사 에디터 출신의 감수성과 '글빨'로 풀어낸 패션 이야기는 재미와 실용, 지적 욕구를 가볍고 상큼하게 채워줬다.

우리가 무심코 걸치는 티셔츠가 사실은 군인과 노동자의 속옷이다가 영화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에서 말론 브랜드가 입고 나와 반항아들의 전유물이 됐다는 것, 현재 정장의 본 고장인 유럽에서는 아르마니나 구찌 등 디자이너 브랜드가 아닌, 우리가 숨겨진 맛집을 찾아 다니듯이 골목 사이의 유서 깊은 양복점에서 자신이 원하는 천을 골라 정장을 맞춰 입는다는 사실은 얼마나 재미있는가.

문제는 그 후로 쏟아져 나온 책들이 다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거나 오히려 퇴보했다는 점이다. 2008년 스타일리스트 서은영의 <스타일 북>, 이미지 컨설턴트 함선희의 <남자는 스타일을 입는다>부터 시작해서 지난해는 그야말로 '스타일에 훈수 놓는 책'의 홍수였다.

<이혜영의 패션 바이블>, <최여진의 비주얼 프로젝트>, <맨즈 잇 스타일>, <아이 러브 스타일> 등 베스트 드레서라고 불리는 연예인들과 스타일리스트들은 전부 나섰고, 여기에 팀건의 <우먼 스타일 북>과 레이첼 조의 <스타일 시크릿> 등 해외파 패션 리더들의 번역서까지 동참했다.

'잇 스타일'
옷 잘 입는 법에 대한 새로울 것 없는 조언과 유명인들과의 친분을 암시하는 신변잡기적 이야기들, 빈약한 내용에 비례해 갈수록 화려해지는 레이아웃에 실망할 무렵, 스타일리스트 정윤기가 <올 어바웃 스타일>을 출간했다. 까만 색 양장본에 세련된 서체의 제목은 '이번엔 뭔가 다르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불러 일으켰다.

한국 최초의 남자 스타일리스트이자 국내 패션 홍보업계의 독보적인 존재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길이 남을 명언까지는 아니더라도 패션에 대한 나름의 창의적인 시각을 보여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책에서 무게라고는 하드커버 외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최고의 스타일리스트가 풀어낸 최고로 가벼운 수다는 회의를 넘어서 의문을 불러 왔다. 왜 우리는 패션이라는 최고의 주제를 놓고 이런 정도의 이야기 밖에 할 수 없는 걸까? 왜 '친한 언니들이 20대부터 안티에이징 크림을 바르라 길래 저도 발라요' 같은 글을 읽고 있어야 할까? 지금 우리가 서점에서 볼 수 있는 건 당장 대학 의류학과 교재로도 못 쓸 재미없는 복식사 책들과 패션 피플들의 텅 빈 수다뿐이다.

철학의 부재 = 패션문화의 부재

"패션은 한 시대를 덮고 있는 외피입니다."

정윤기 '올 어바웃 스타일'
패션 큐레이터 김홍기 씨는 패션이 시대의 대표적인 프랙탈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나 탐구가 부재해 담론의 무게가 가벼워진다고 말한다.

"이번 해에 뭐가 유행인지를 묻기 전에 그 옷을 왜 사려고 했는지, 무엇에 끌렸는지를 먼저 궁금해해야 하지 않을까요? 왜 청바지를 찢어 입는지, 빈티지에 끌리는 심리는 무엇인지, 어그 부츠 탄생의 배경은 무엇인지, 이런 것들을 파고들다 보면 그 안에 들어 있는 시대 전체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에 대해 역사학, 인류학, 미학, 심리학적 지식을 동원해 해석을 시도하는 사람도, 또 그걸 재미있게 풀어 쓸 수 있는 사람도 없는 것이 현실이에요. 학계나 출판계, 어디에서도 돈은 안되고 품만 들어가는 일에 앞장서려고 하지 않죠."

패션이 인문학자들의 주제가 되지 못하는 것은 사실 우리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마찬가지다. 패션을 '쉬이 지나가 버릴 것', '헛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은 그들이라고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우리에 비한다면 훨씬 더 앞서 있는 것이 사실이다. 스타일링 서적들이 쌓여 있는 구역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작업실 탐닉>이라는 번역서가 있다.

일본의 무대 미술가이자 자서전 격 소설 <소년 H> 등을 쓴 베스트 셀러 작가 세노 갓파가 일본의 화가, 요리 연구가, 인형 장인들의 작업실을 훔쳐 보며 쓴 에세이다. 직접 손으로 그린 인상적인 일러스트와 각 분야 예술가들과의 오랜 인연, 그들로부터 받은 인상을 기록한 그 책에는 패션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의 이야기도 있다.

저자는 비록 '패션 감각이라고는 제로에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디자이너가 가진 철학 – 소재든 형태든 자신이 좋아하는 대로 입는 것이 크리에이티브라는 – 에 공감해 그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접근, 자신의 렌즈에 비춰 재해석했다. 노장의 패션 디자이너와 미술가가 이루는 철학의 크로스 오버는 짧은 지면에서도 번뜩이며 향기를 뿜어냈다.

'최여진의 비주얼 UP 프로젝트'
국내에서도 조금씩 기미가 보인다. 데님이라는 문화적 물체에 대해 조사하고자 할 때 서점에서 볼 수 있는 내용이 이전에는 '포켓은 아래 쪽에 달려 있어야 엉덩이가 업(up)돼 보인다' 뿐이었다면, 최근에는 연구와 고찰의 흔적이 엿보이는 패션 보고서들이 눈에 띈다.

광고 회사 TBWA Korea 직원 7명이 모여서 쓴 <청바지, 세상을 점령하다>는 반짝거리는 광고쟁이들의 청바지에 대한 해석 모음집이다. 청바지를 '팍스 아메리카나'의 산물로 보고 그 안에서 미국인들의 자본주의를 읽어내는가 하면 그가 우리를 지배하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문화적, 철학적, 사회학적으로 조명했다.

이 외에도 실용, 질김, 대중성 등 청바지의 특징을 파고든 7가지의 기발한 해석들이 수록돼 있다. 청바지의 역사와 효용을 집 요하게 파헤치고 재조립하는 과정에서 '보보스의 오브제', '십일조까지 받는 종교', '비단, 비단만이 비단이 아니다' 같은 주옥 같은 문장들이 쏟아졌다. 참신하고 깊이 있는 발상 앞에서 무거운 전문 서적과 가벼운 실용 서적의 구분은 무너진다.

깊은 고찰에 근거한 창의적 사고야말로 진짜 재미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미친 듯이 빠르게 돌아가는 패션계에서 영속성을 갖는 이유는 청바지라는 클래식한 아이템을 다뤘기 때문이 아니라 청바지라는 외래 문물에 대해 한국 지성의 재해석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서구 문명인 패션이 한국화 되기 위해서라도 이런 작업은 앞으로 더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작업실 탐닉>에서 이세이가 말했듯이 "패션은 하우투(How to)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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