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문화로 읽기]스포츠 애국주의 미디어가 조장 젊은 세대가 주도 거리응원 열풍

"그래도 다행히 올 여름에는 월드컵이 있으니까 함께 축구경기 관람하자고 하는데, 꿈 깨십시오. 이거 뭐 경기 보는 내내 나를 가만 두지 않습니다. 오프사이드가 뭐냐? 파울이 뭐냐? 왜 패널티킥이냐? 심지어 홍명보는 언제 나오느냐, 홍명보 감독 된 지가 언젠데!!! 아, 히딩크를 왜 찾습니까? 정말 어이가 없습니다."
(5월 2일자 KBS 개그콘서트 '남성인권보장위원회' - 서로 다른 취미생활 편)

개그맨 박성호의 이 대사는 2000년대 한국사회, 월드컵 현상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월드컵은 남녀노소의 서로 다른 취미를 넘어, 이념과 종교와 지역감정을 넘어 전국민이 함께 하는 거의 유일한 스포츠다.

다시, 월드컵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독일월드컵을 거쳐 남아공을 준비하며 우린 어떻게 변했을까? 홍명보가 감독이 되고, 대표팀 감독이 히딩크에서 허정무로 바뀌는 동안 월드컵 문화는 어떤 동선을 그려왔을까?

월드컵을 응원하고 이 열기가 만드는 현상을 지켜 보고 분석해 보는 것은 경기를 관람하는 것만큼이나 흥미로운 일이다.

왜, 축구인가?

2002년 월드컵 광장
정희준 동아대 교수는 "월드컵은 다른 국제 대회와 구분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올림픽의 경우 경기종목과 선수가 다양하다는 점에서 우선 월드컵과 구분된다.

야구만으로 승부를 보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은 같은 '월드'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미국이 단독 주관하는 대회라는 점에서 월드컵과 세계적 권위를 비교할 수 없다.

단일 종목임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인의 관심과 미디어의 집중조명을 받는 국제 스포츠 대회는 월드컵이 유일하다. 전 국민이 거리로 나가 응원하는 진풍경도 월드컵만이 연출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질문부터 해야겠다. 왜 하필 축구일까? 최근 발간된 <축구란 무엇인가?>의 저자 크리스토프 바우젠바인은 말한다. "단순하기 때문에." 이는 스크럼 규칙을 설명하기 위해 120페이지가 넘는 설명이 필요한 럭비와 비교하면 확연해진다. '공에 손대지 말 것'과 '공은 차도 되지만 상대편은 차면 안 된다'는 두 가지 규칙으로 축구는 시작된다.

피파(FIFA)가 정한 축구 규칙은 17개 조항이 전부다. (물론 여자친구는 이 17개 조항을 몰라도 응원한다.) 저자는 축구의 이 원초성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대화 소재를 줬다"고 말한다.

한국사회에서 월드컵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은 계기는 2002 한일월드컵이다. 시민이 자발적으로 광장에 모여 경기를 응원하는 한국적 응원 문화, 일명 '광장 문화'의 탄생에 대해 외국은 신기해했고, 우리는 스스로 대견해 했으며, 기업은 마케팅과 조직관리 이론에 응용하는 기민성을 보였다. 사회학에서는 이를 두고 그해 말 대선과 이듬해 촛불집회를 연결시키는 분석들을 내놓았다. 이들은 '2002월드컵 세대=386세대'란 그럴 듯한 공식도 내놓았다.

월드컵 담론 변화 3단계

여기까지는 홍명보, 히딩크밖에 모르는 그녀도 아는 내용이다.

월드컵, 구체적으로 월드컵 열기를 둘러싼 담론은 이후 어떻게 변해 왔을까? 월드컵 거리 응원은 하나의 복합적 상징 덩어리기 때문에 그 자체로 무궁무진한 해석의 보고로 보이지만, 파편화된 해석들을 3개의 큰 담론으로 묶으면 내셔널리즘, 상업주의, 월드컵 세대 출현으로 볼 수 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거치며 월드컵 담론은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비평계의 엇갈리는 해석의 중심에는 월드컵을 계기로 새로 등장한 '광장문화'가 있다. 자발적으로 모인 대규모 응원 군중에 대해 비평계 한 쪽에서는 신애국주의의 가능성을 경고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상처 입은 민족주의 극복과 열린 민족주의로의 상징으로 풀이했다.

또 다른 한 편에서는 이를 국가주의적 광기로 읽기도 했고, 이 모든 해석을 부정하며 정치한 해석에 대해 항의하는 탈이데올로기적 비평도 쏟아졌다. 한 마디로 월드컵 문화에 대한 비평계 춘추전국시대가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의 분위기였고, 엇갈린 시야의 방향키는 내셔널리즘이 쥐고 있었다.

이동연 한예종 교수는 "2002년이 다양한 목소리가 경합하는 시기라면 2006 독일월드컵 때부터 는 광장문화나 내셔널리즘보다 월드컵의 상업주의 지적이 대두됐다"고 말한다. SK텔레콤과 KT, 현대차를 비롯해 한일월드컵에서 예상치 못한 대박을 건진 기업들이 치밀한 계산 하에 광고와 마케팅을 시작한 것이 2006 독일월드컵 때부터다.

월드컵 거리응원의 중심 지역 동선을 그려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실 거리응원의 메카는 시청앞이 아니라 광화문이었다. 2002년 한국과 폴란드전 당시 시민들은 광화문과 세종로에서 거리응원을 펼쳤지만, 미국과의 경기를 앞두고 혹시나 일어날지 모를 미국대사관 앞 불상사를 막기 위해 서울시가 시청을 개방했다.

그 점에서 2002년 한일월드컵의 주체는 자발적 시민이다. 그러나 2006년부터 거리응원의 중심은 시청앞 서울광장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SK텔레콤을 비롯한 기업들이 서울광장 사용권을 두고 시민단체와 마찰을 겪기도 했다. 이동연 교수는 "당시 문화연대도 SK관련 문제제기를 지속적으로 했고 월드컵의 자본주의 성격이나 쏠림 현상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가 본격적으로 나왔다"고 말했다.

2010년의 거리응원도 시청이 중심이다. 그러나 이제 서울광장의 사용은 시민도 기업도 아닌 서울시(정부)에 의해 결정된다. 광장의 본래 의미(비어있는 곳, 시민의 의사를 발현할 수 있는 곳)는 제도에 의해서 막혀 있고, 월드컵 등 제한적 상황에서만 발현된다.

나이키 신고 반미?

그렇다면 월드컵 담론의 중심이었던 내셔널리즘은 어떻게 됐을까?

이동연 교수는 "한국선수들의 해외 진출이 대거 늘면서 축구담론이 탈국적화되었다"고 말한다. 이제 월드컵을 응원할 때도 국가적 우월함을 보여주는 축구보다 맨유의 박지성, 볼턴의 이청용이 갖는 일종의 '탈국적화된 세대 스타일'에 찬사를 보내는 경우가 많다는 것. 이들 세대에게 "대~한민국"은 부르면 목 메이는 조국이라기보다 응원 구호, 하나의 기표로 다가온다.

뚜껑을 열어봐야 알겠지만, 2010년 월드컵을 둘러싸고 예상되는 담론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나이키 신고 반미'다. 이는 지난 5월 문화연대 포럼에서 정희준 교수가 발표한 비평의 제목이다. 그는 이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이키 신고 반미집회에 나가고 집회가 끝나면 광화문, 인사동의 스타벅스로 향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반미란 대단히 감정적이고 정서적이며 또 특정 사건이나 대중문화, 예를 들어 스포츠 공간의 분위기에 좌우되는 것 같다. 이제 반미도 유행이고 패션인 것이다.'

나이키 신고 반미집회 나가는 이들을 월드컵 응원의 주체라고 본다면, 이들 세대가 월드컵 응원에서 보이는 애국주의 역시 유행과 패션으로 소비되는 '인스턴트 애국주의'라는 것이다.

스포츠 내셔널리즘은 월드컵에서도 여지없이 보이고 이를 미디어가 조장, 젊은 세대가 그 흐름을 주도한다는 점은 2002년과 2006년, 2010년에 걸쳐 여전히 일치한다. 그러나 이들이 외치는 '네이션'은 과거 근대국가의 그것이 아니라, 상상의 네이션이다. (전문가 기고 '월드컵 주체의 탄생' 참조)

정희준 교수는 "과거와 같은 엄숙한 민족주의, 배타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즐기는 민족주의가 된 듯하다. 그러면서 애국심도 젊은 세대의 유행이 된 것 같다. 그들이 트렌드로 즐기고 잊어버리는 일종의 소비 대상이 된 것이다. 기업들이 소비자인 젊은층을 위주로 월드컵 광고를 만들고 그 안에 애국주의 코드를 섞는 것만 해도 쉽게 드러난다. 상대적으로 붉은 악마와 같은 자발적 주체가 적어지면서 자본이 이를 대신하고 있다"고 말했다.

월드컵을 둘러싼 담론을 말 많고 행동 굼뜬 지식인의 말이라 치부할 수도 있겠다. 월드컵은 그저 한 번 질펀하게 즐기는 축제일뿐이라고. 그러나 이 응원이 주는 쾌락은 기실 정치적, 사회적, 상업적 관계에서 빚어진 결과다.

'월드컵의 즐거움은 어디서 오는가?' 월드컵을 보는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가 될 수 있을 터다.

월드컵 새롭게 보는 방법
월드컵 기간, 점심시간 할 말이 많아져요. 월드컵 참가국, 출전 선수 명단 외우고 부장 비위를 맞추려니까 옆에 있는 김 대리가 한-그리스 전 이야기를 꺼내네요. 오늘자 칼럼 보고 자기가 분석한 것처럼 구라 쳐요. 주도권이 김 대리로 넘어가요. 이런 우라질 시추에이션! 다음 점심시간에는 나도 이쁨 받고 싶어요. 월드컵 말고 올림픽, WBC, 김연아까지 한 방에 말 발 서는 책, 추천해 주세요.

<축구란 무엇인가?> 크리스토프 바우젠바인 지음/ 민음사 펴냄

축구 역사와 이론, 축구가 가져온 대중 현상, 역대 경기 등 축구에 대한 전반적인 관점을 다룬 책. 축구 전문 작가인 저가는 축구가 구기 종목 가운데 가장 대중성이 있는 스포츠가 된 까닭을 묻고 그 역사와 의미, 경기를 살피며 축구의 매력을 말한다. 축구서적이 상당히 많은 독일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됐다.

<매혹과 열광> 한스 U. 굼브레히트 지음/ 돌베개 펴냄

인문학자의 스포츠 예찬서. 스포츠 광팬인 저자는 비판과 취향을 넘어 스포츠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스포츠가 왜 찬양의 대상이 되었는지, 어떻게 미적 체험이 되는지 살펴보고, 스포츠 역사와 매혹의 요소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분석했다. 축구, 육상뿐만 아니라 아이스하키, 권투를 거쳐 스모에 이르기까지 주요 경기와 선수들에 대한 흥미로운 정보와 함께 날카로운 분석과 철학을 담았다.

<스포츠 코리아 판타지> 정희준 지음/ 개마고원 펴냄

한국사회 스포츠 역사를 되짚으며 '한국적'이라 할 수밖에 없는 스포츠 현상들의 원인과 그 작동방식을 들여다 본다. 근대 이전 숭문 사상부터 전두환의 3S정책, 4.19와 5.18을 두루 탐색하며 한국사회가 언제부터 어떻게 스포츠와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스포츠가 만들어낸 판타지를 재현한다. 우리가 왜 스포츠에 열광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스포츠와 한국식 내셔널리즘에 관한 가장 체계적인 보고서.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