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문화로 읽기] 2002 월드컵 한국사회 개인을 '주체'로 만들어준 계기

바야흐로 월드컵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허가 받은 '일탈의 시간'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벌써 텔레비전 광고는 월드컵 특수를 노리는 기색을 역력하게 드러낸다.

'붉은 악마'를 연상시키는 숱한 이미지들이 맥주부터 휴대폰 광고까지 넘쳐난다. 흥미로운 것은 광고의 내용이다. 일상 속에 파묻혀 있던 '월드컵 영웅들'이 다시 뭉친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마치 픽사 애니메이션 <인크레더블>의 슈퍼영웅들처럼 평상시에 무기력하고 지루하게 살아가던 이들이 월드컵을 맞아 본모습을 되찾는다는 설정이 눈길을 끈다.

이 광고들이 보여주는 것을 단순하게 기업의 홍보마케팅이라고 치부하기는 어렵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의 교환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상대방이 만들어 놓은 상품을 살 의향이 없으면 가치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기업이 좋은 상품을 생산하더라도, 소비대중의 호응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따라서 월드컵 특수를 노린 광고들이 말해주는 것은 월드컵 특수 심리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바로 이 심리야말로 나 같은 문화비평가의 관심 사항이기도 하다.

대중문화는 기본적으로 일상의 즐거움과 관련을 맺고 있다. 대중문화는 대중의 쾌락을 위한 것이다. 여기에서 대중이라 함은 그 누구도 아닌 '소비자'이다. 아니 요즘 말로 바꾸면 '프로슈머' 정도에 해당하겠다.

사실 프로슈머라는 말은 그렇게 새로운 용어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자는 언제나 생산자였기 때문이다. 이 생산자는 물건을 만들고, 다시 그 물건을 시장에서 구매해 화폐의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여가의 개념은 고도 자본주의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월드컵은 왜 한국적 오락이 됐나?

월드컵 특수가 있다는 것은 월드컵에 대한 '소비심리'가 있다는 말인데, 여기에서 소비의 개념은 언제나 잉여적인 차원을 속 깊이 감춰놓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면 모든 소비는 잉여이고 과잉이다. 월드컵 특수는 이런 잉여와 과잉을 지칭하는 마케팅 용어라고 할 수 있다.

과잉은 일상의 안정을 벗어나는 혼란의 상황이다. 월드컵이 과잉의 상황을 의미한다는 것은 곧 '주체화'의 문제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모든 주체는 '꿈★은 이루어진다'는 공식을 통해 탄생한다. 간절히 바라던 것이 이루어지는 순간, 우리는 삶의 의미를 깨닫고, 주체로 거듭 태어난다.

2002년 월드컵은 한국 사회의 개인들을 '주체'로 만들어준 계기였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을 '월드컵 주체'라고 불렀다. 2002년 이전과 이후는 이 월드컵 주체를 통해 확연하게 구분된다.

이 주체는 1990년대 이후 전면화한 소비주의를 세계관으로 채택하고, '대한민국'을 내면화하고 있다는 특징을 보여준다. 386주체들과 사뭇 다른 이 주체들은 이념보다도 쾌락을 중심으로 정치성을 구성한다. 말하자면, 이들에게 민주주의는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요구하는 것이다.

이들의 민주주의는 쾌락의 평등주의라는 내면의 '법'을 체현하고 있다. 쾌락의 평등주의는 "내가 즐기는 만큼 너도 즐길 수 있다"는 것, 바꾸어 말하면, "네가 즐기는 만큼 나도 즐겨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2002년 월드컵은 한국 사회에 쾌락의 평등주의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한 응답이었다. 말 그대로 꿈이 이루어진 것이고,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은 월드컵의 공간에서 분단국가나 약소국의 이미지를 압도하는 '오! 필승 코리아'라는 새로운 국가의 이미지를 발견했던 것이다. 2002년 월드컵 이후 한국인은 국가를 가슴 속에 가지게 되었다.

물론 이 국가는 상상에서나 완전한 것이지 현실로 내려오면 언제나 부족한 것이다. 아니 다시 말하면, 현실의 부족함을 언제나 환기시키는 완전한 상상상의 공동체가 바로 월드컵이 현시시킨 국가의 이미지이다. 그래서 월드컵 주체의 '코리아'는 '오! 필승'이라는 당위명제를 내포한다.

따라서 2002년 월드컵에서 잠깐 어른거렸다 사라진 '국가'는 한국 사회에 '오지 않은 근대'의 유령이자, '도래할 정상국가'에 대한 요구이다. 2008년 촛불은 이렇게 '미학적인 차원'으로 출몰했던 월드컵의 평등주의가 다시 정치적인 것의 모습으로 귀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촛불의 주체는 월드컵 주체가 다시 태어난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서 다시 태어났다는 말은 월드컵 주체가 내면화한 국가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구체적으로 정부에게 쾌락의 평등주의를 요구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 요구를 지탱시키고 지속시킨 것은 바로 월드컵에서 경험한 '집단적 즐거움'이었다.

2010 월드컵 주체는?

집단은 개인에게 존재의 가치를 증명한다. 이런 맥락에서 모든 정치는 일정하게 파퓰리즘이라는, 자기 자신을 비추는 거울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월드컵 주체의 집단성을 곧바로 전체주의로 연결하는 것은 과도한 결벽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월드컵 주체는 전체주의적이라기보다, 자기계발적이다. 신자유주의가 채택한 혁신성과 보수성을 동시에 겸비하고 있다는 양가성을 드러낸다. 과거의 습속에 대해 저항적이면서도 미래의 변화에 대해 수동적인 것은 이 때문이다.

월드컵 주체는 새로운 정치적 차원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즐거움'이라는 말이 이 차원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키워드이다. 즐거움이라는 쾌락원칙의 범주가 어떤 정치적 폭발력을 가질 수 있는지를 2008년 촛불은 우리에게 훌륭하게 증명했다. 물론 이 즐거움은 평상시 우리의 일상에 조각조각 흩어져 있다. 그러나 어떤 과잉의 공간을 만나는 순간, 이 즐거움은 폭발적으로 집단화할 것이다.

월드컵은 바로 이 즐거움을 '안전하게' 집단화하게 만들어주는 기제이다. 월드컵은 단순한 국가 간 축구경기가 아닌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가 강요하는 '탈국가주의'에 저항하는 집단적 열망이 월드컵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현실에서 실현할 수 없는 상상의 국가를 우리는 월드컵에서 재확인한다.

국가는 과잉의 응결체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국가로 응결되는 순간, 그 과잉은 다시 억제되어야 한다. 마치 월드컵 특수를 노린 광고들이 최종적으로 '상표'로 대중의 욕망을 포섭하려고 드는 것처럼, 국가라는 기표도 월드컵이라는 공간이 불러낸 집단적 열망을 붙잡아두려고 하는 것이다.
월드컵, 그냥 보고 즐기기에 훨씬 더 복잡한 속내를 감추고 있는 셈이다.



이택광 대중문화평론가, 경희대 영미문화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