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진의 무한 변주] '찍느냐, 만드느냐' 논란… 작가들의 다양한 '사진행위' 부추겨

주도양의 'Lake2', 123x125cm, 2007
우리나라에서 사진이 미술계에 편입된 시기는 불과 10년 안팎이지만 지금 사진은 놀라운 변화를 거듭하며 전체 조형예술에서 가장 기초이자 중심이 되고 있다.

예술의 전 장르에서 사진만큼 수요자와 생산자가 많은 경우도 없다. 이제 카메라를 소지한 사람이면 누구나 사진을 찍고, 만들고, 향유하는 시대다.

사진은 강력한 대중성과 예술성을 무기로 고공행진 중이다. 이처럼 사진의 민주화 시대를 개화시킨 데에 DSLR카메라 기술의 눈부신 발달과 함께 해파처럼 촘촘한 인터넷 망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제껏 오늘날과 같이 많은 사진작가들이 목소리를 높였던 적은 없었다.

사실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사진은 사진의 '사실성'과 '기록성'을 근간으로 한 작품들이 주류였다. '사진은 만드는(make) 것인가? 찍는(take)것인가?'의 논란이 뜨거웠던 이유이다. 스트레이트하게 찍는 사진과(take) 오리고 붙이고, 포토샵으로 합성한 사진(make)의 작품성을 놓고 지금은 무색한 공방전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 발단은 <사진, 새 시좌전>(워커힐 미술관, 서울, 1988)으로부터 시작된다. 이후 우리 사진계는 '현대' 한국 사진의 정체성 찾기에 분주했다. 봇물 터지듯 탐색, 수평, 관점, 미래, 위상 등 단어의 의미에 치중한 사진전들이 개최되었다.

한국 사진계 변화의 물꼬를 튼 <사진, 새 시좌전> 전
근현대 사진에 대한 담론도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중반까지 해외유학파들의 귀국 전시가 우후죽순으로 개최되며 '새로운 사진'들이 보여졌다. 당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탈근대 담론의 유입으로 한국 사진계는 무정부적인 혼돈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이 모두 불과 10년 전 일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사진의 풍경은 어떠할까. 소위 '컨템퍼러리(contemporary)'를 풍미하는 사진들은 어디서 생겨난 것일까. 물론 디지털 기술의 발달도 한 몫을 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찍느냐, 만드느냐'의 의미에 '하다', 즉 '사진행위'에 대한 작가들의 시각이 한층 넓어지고 견고해진 데서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콘셉트가 뚜렷해졌다는 의미다. 이 말은 곧 작가의 분명한 콘셉트야말로 '컨템퍼러리' 사진 장(場)에서는 필수이고 이는 사진전공자뿐만 아니라 전체 조형예술 전공자들이 사진을 기본으로 활동반경을 넓히게 되며 더욱 풍요로워졌다.

현대 사진을 살펴보면 사진사 초기나 근대사진에서 이미 발표되었던 사진의 콘셉트가 기초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퍼포먼스와 해프닝을 한 장의 사진으로 담아내는 행위는 이미 60~70년대에 등장한 대지미술가로부터 시작된 작업임을 알 수 있고, 타블로 사진(tableau photography)처럼 무대연출을 하여 사진 찍는 행위는 비운의 사진가라 불리우는 이폴리트 바야르(Hippoyte Bayard)의 사진에서 단초를 찾을 수 있다.

그가 발표한 '익사한 자화상(1840년)'을 보면 사진술 발명 초기에 자신의 연구가 정부로부터 외면당하자 이에 격분한 나머지 스스로 시체처럼 분장하여 사진을 찍어냈다. 또한 데이비드 옥타비우스 힐(David Octavius Hill)과 로버트 아담스(Robert Adams), 줄리아 마가렛 카메론(Julia Margaret Cameron), 나다르(Nadar) 등 초기 초상사진들은 현대작가들이 단골처럼 응용하는 인물사진의 아이템이 되고 있다.

전시에 참여한 김대수 작가의 작품
특히 독일의 토마스 루프(Thomas Ruff)의 일련의 인물사진은 직설적(인물을 스트레이트하게 증명사진처럼 촬영하여 대형 인화함)으로 작업을 했는데 이는 초기 초상사진에 반한 작업이라 할 만하다. 이처럼 사진 선구자들이 보여준 선례나 도전들은 현대 사진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왜 사진을 찍었을까' 관객에게 끊임없이 질문하는 사진들도 있다. 소위 '심심한 사진'들이다. 이 심심한 사진들은 종종 눈부시게 화려하고 큰 인화를 택하여 관객의 혼돈을 가중시킨다.

이들은 우리가 통상 무시하거나 관심을 덜 주는 공간, 사물, 사람을 주제(소재)로 선택하여 보여주는데, 이들의 방법은 모더니즘 시대에 외면당했던 소위 타자라 불리 우는 영역들(신체, 일상, 여성들의 삶의 공간, 일기의 한 조각 등)을 해부하듯 다시 보여주기를 시도하며 시각적 효과를 노리고 있다.

그런 한편 사진예술의 아우라를 결정짓는 '작품의 원본성, 작가의 천재성, 사진의 진실성'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시도하는 작가군도 찾을 수 있다. 이는 사진에 대한 그동안의 이해와 바람의 변천사를 낱낱이 전복하거나 뒤엎는 행위에 속한다.

사진행위, 혹은 '사진적'인 것에 대한 반성 및 점검들은 모더니즘 시대의 기계적 합리성을 근간으로 한 '사진은 사실이고 기록이다'라는 막강한 미학에 대한 도전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통속적인 사진을 고도의 예술적인 전략으로 개조하는 데 일조하며 작품 스스로 관객에게 여러 가지를 말하게 한다.

신은경, 포토스튜디오, 2007
고집스럽게 자기의 시각을 지켜내는 작가들도 있다. 아날로그 흑백사진프린트를 고수하며 모더니즘 사진의 미학에 충실한 작가들이다. 사진에서의 톤(tone)과 프레이밍(framing)의 의미에 집중하며 스티글리츠의 이퀴벨런트(equivalent) 미학을 강화시키고 있다.

현대 사진이 이처럼 다채롭고 다성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데는 사진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를 살펴야 한다. 미디어와 갤러리의 무한 관심은 사진 작품의 질과 양을 다양화시킨 데 일조했다. 또한 저널리스트를 포함한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의 작업이 당연히 갤러리에서 전시되고, 미술 컬렉션에 수용될 목적으로 작품을 발표하는 일은 다큐멘터리 사진에 대한 전반적인 검증 및 반성의 계기를 불러왔다.

5년 전까지만 해도 그것은 제도적, 재정적 측면에서 선구적인 사진작가들이 기대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목적에도 부합하지 못했다. 이처럼 인화된 사진을 거래하는 상업적인 미술시장의 등장과 학계와 출판계, 미술관, 갤러리 등의 관심이 증대되면서 비서구권 사진작가들의 작품이 미술계의 전면에 부각되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

자, 이제부터다. 우리 사진이 더욱 탄탄하게 뿌리내릴 수 있는 기회는 호황을 누리는 바로 이 시기다. 내 생각에 사진은 너무 복잡하다. 사진의 정체성을 말하려면 사진시장, 사진행위를 둘러싼 모든 관습, 인문사회과학 및 인간 삶의 역사와 사진의 관계를 끊임없이 고찰해야 한다. 작가들은 내가 왜 사진을 찍는지를 고민할 일이며, 그 사진을 제대로 보고 분석할 수 있는 평론의 깊이와 다양성, 1차, 2차, 3차 갤러리의 수용능력, '사진이 어떤 담론을 형성할 것인지 큐레이터들의 기획력' 등이 절실히 필요한 때다.

결국 사진이 대중매체시대에 얼마큼의 문화적, 미학적 가치를 갖는가는 사진이미지를 제대로 생산하고, 수용하고, 읽어내는 활발한 사진 장(場)을 형성하는 과제로 넘어간다.

데비한, 걷는 삼미신, Walking three graces, 220x150cm, 2008


글 최연하 독립큐레이터 사진전문기획자 사진의 북쪽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