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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이 축구에 열광하는 까닭은?

[축구, 여자를 말하다]
2002 월드컵 국민적 축제 '공감'과 억압의 카타르시스 경험… 응원 자체를 즐겨
  • 2010 남아공 월드컵 예선전 대한민국과 아르헨티나의 경기가 열린 17일 오후 한강시민공원 반포지구에서 붉은악마가 이청용 선수의 골에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12일 2010 남아공월드컵 조별 예선 그리스전에 이어 17일 한국과 아르헨티나전 때도 전국에서 거리응원이 펼쳐졌다.

전국 거리와 공원, 운동장을 가득 메운 200만 명이 넘는 인파가 태극전사들의 16강 진출을 기원하는 응원을 열정적으로 펼쳤다. 그 가운데는 여자 축구 팬들이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이들은 붉은 티셔츠에 붉은 헤어밴드 등을 두르고 목놓아 "대~한민국"을 외쳤다. 남아공월드컵의 그라운드에는 여자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지만, 밖의 관중석과 응원석에는 열띤 응원을 펼치는 여성들이 자리하고 있다. 축구에 대한 여자들의 '이유 있는 열정'은 무엇인가

여성 , 축구와 만나다

한국과 아르헨티나의 경기가 있던 서울 방배동의 한 대형 놀이터는 한국을 응원하기 위해 모인 가족 단위의 응원객들로 빈틈이 없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부터 이 놀이터에서 모였던 방배동 주민들은 이날도 어김없이 응원을 이어갔다. 주부 조정아(43) 씨도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터를 찾았다. 조 씨는 아들(9), 딸(7)과 함께 붉은 티셔츠로 갈아 입었다.

  • 2010 남아공 월드컵 조별예선 첫번째 경기인 그리스전이 열린 12일 오후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거리응원을 위해 서울광장에 모인 여성들. 고영권기자 youngkoh@hk.co.kr
조 씨는 "평일이라서 남편 없이 아이들과 거리응원을 나왔다. 지난 2006년 독일 월드컵 때에도 아침에 출근할 남편을 설득해 아이들과 함께 놀이터로 나왔다. 우리집에서는 남편보다 내가 더 월드컵을 즐긴다"고 말했다.

조씨 이외에도 놀이터에는 아이들을 대동한 '주부 부대'들이 대다수였다. 이들은 직장에서 늦는 남편들을 뒤로 하고 축구를 즐기고 있었다. 한 50대 주부는 "남편과 아들은 집에서 축구를 보고 있고, 나 혼자 붉은 악마로 변신해 응원을 나왔다"고 말했다.

서울광장이나 월드컵경기장 등의 응원 물결 속에는 젊은 여성들의 함성 소리를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은 화려한 '응원 패션'으로 무장하고, 거리의 붉은 악마로 변신한다. 빨간 불이 들어오는 뿔 모양의 헤어밴드, 목과 손목을 감싼 붉은 손수건, 허리 라인이 드러나는 배꼽티와 핫팬츠 등은 이제 한국 젊은 여성들의 응원 유니폼이 된 거 같다.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응원 자체를 즐기고 있다.

주창윤 서울여자대 언론영상학부 교수는 "2002년 월드컵 이후 축구에 열광하는 여성들이 증가했다"고 말한다. 여성들이 참여세대에 동참하면서 응원 문화에도 앞장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주 교수는 "2002년 월드컵 당시 가장 폭발적으로 응원한 사람들이 여중생, 여고생이었다. 이들은 사회적으로나 가정 내에서 가장 억압된 대상이다.

그러나 당시 월드컵이라는 국민적 축제에서 이들의 참여를 사회적으로 용인해 주는 분위기가 형성됐다"며 "월드컵은 이들에게 좀 더 넓은 범위의 놀이를 주는 계기가 됐다. 이들 세대가 경험한 참여의식이 다른 세대에도 전이되면서 계속 여성들의 움직임이 증가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 2010 남아공 월드컵 예선전 대한민국과 아르헨티나의 경기가 열린 17일 오후 한강시민공원 반포지구에 모인 한 여성이 한국이 4:1로 패하자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연합뉴스>
여성들의 열정적인 응원문화 열풍은 '월드컵 미녀', '월드컵 패션' 등을 양산했다. 특히 거리응원에 나선 젊은 여성들의 응원 모습이나 패션 스타일은 인터넷에 회자되며 클릭 수를 높이기도 했다.

스타일리스트 박경화 씨는 "여자들의 축구에 대한 열정은 응원 패션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특히 붉은 티셔츠를 민소매나 탱크톱으로 리폼해서 입는 스타일이 유행하는가 하면 '응원 메이크업' 팁까지 소개되고 있다"고 말했다.

여성들이 주도적으로 응원을 펼치는 현상이 더 이상 이상하게 보이지도 않는다. 여자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앉아 대형 화면을 보며 두 팔을 들어 올리며 환호하는 모습은 남자 축구팬 못지 않다.

대중문화평론가 정덕현 씨는 "우리는 축구를 통해 집단적인 황홀감에 빠져든다. '공감'이라는 메커니즘을 통해 집단적인 황홀감을 맛본다"고 언급했다. 17일 한국이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4대 1로 대패하자 여기저기서 아쉬움의 탄식이 들려왔다. 그 속에서 16강 진출이 가능한 '경우의 수'를 따지는 여자들을 보고 동질감을 느끼지 않을 남자들은 없을 것이다.

축구라는 스포츠가 갖는 강하고 남성적인 이미지, 선수들의 탄탄하고 탄력 있는 몸매와 근육, 연예인 못지 않은 선수들의 대중적 인기 등도 여성들이 축구에 빠지는 요인이다. 그럼, 축구는 남성들만의 리그이며 여성들은 늘 관람객으로만 머물고 있는가.

  • 영화 '슈팅 라이크 베컴'
축구는 이미 여성들과 가까이 존재했다. 축구 심판으로 잘 알려진 임은주 씨는 1994년 축구 심판이 된 이후, 1997년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국제심판 자격증을 획득했다. 1999년에는 국내 처음으로 여자 프로 심판 자격증을 따내기도 했다. 그는 현재 은퇴를 하고 축구 해설가로 활동하며 전문성 있는 축구 지식을 전달하고 있다.

또한 책 <축구 아는 여자>(나무수)에서는 여자들에게 축구에 대한 지식을 설명하고 있다. 재미있는 건 이 책의 저자인 여성스포츠 MC 이은하 씨가 여성들에게 축구 지식을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이 여성에게 축구를 가르쳐주는 화법은 흥미롭다.

축구의 룰뿐만 아니라 유명 축구 클럽의 감독과 선수들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여성들이 관심 있어할 법한 축구스타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도 빼놓지 않고 있다. 여자가 전해주는 축구 이야기는 남성 독자들에게도 매력적인 코드로 어필하고 있다.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 루이비통도 최근 축구스타 펠레, 마라도나, 지단을 브랜드 광고 모델로 내세우며 여심을 자극하고 있다. 축구와 여자의 관계가 결코 느슨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영화, 축구로 여자를 그리다

  • 영화 '그레이시 스토리'
현실에서 축구와 여자들의 거리는 무척 가까워졌다. 여성들의 열정적 응원으로 두 지점의 거리는 더 가까워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문화 속의 축구는 여자에게 높은 벽처럼 느껴진다. 특히 영화 속에서 두 지점은 넘을 수 없는 동경의 대상 등으로 표현된다.

영화 <슈팅 라이크 베컴>과 <그레이시 스토리>는 축구선수가 되고 싶은 두 소녀의 꿈을 담고 있다. 하지만 축구의 벽은 높다. <슈팅 라이크 베컴>의 제스(파민더 나그라)는 인도계 영국인으로, 집안의 보수적인 분위기 탓에 여자 축구부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 <그레이시 스토리>의 그레이시(칼리 슈로더)는 더 난감한 상황이다.

1970년대 축구 가문의 딸로 때어나 안타깝게 사망한 오빠 대신 축구선수가 되려고 한다. '여자라서 안 된다? 그것이 바로, 최고의 반칙이다!'고 외치지만 시대적 상황과 편견이 그레이시를 남자들과 함께 축구하는 환경에서 멀어지게 만들 뿐이다.

영화 <오프사이드> 속 여자들은 더욱 절박하다. 축구부에 들어가 공을 차는 게 오히려 부러울 따름이다. 영화 속 소녀들은 축구 경기를 보고 싶어도 전혀 볼 수가 없다. 월드컵 16강 진출을 위해 이란과 바레인이 예선 마지막 경기를 펼치고 있지만, 이란의 여성들은 경기장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경기장 밖에서 발만 동동 구르며 축구 보기를 목놓아 외치지만 소용없다. 사회적 규범이라는 높은 벽이 축구 경기장의 담만큼이나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자들의 세계에선 다르다. 최근 개봉한 영화 <맨발의 꿈>이나 <꿈은 이루어진다>는 남자들의 또 다른 꿈을 이야기한다. <맨발의 꿈>은 동티모르에서 유소년 축구선수들을 지도하게 된 한 한국인 감독의 실화를 담았다. 가난과 내전의 아픔 속에서 축구는 희망의 불씨가 되어 아이들을 자극한다.

  • 영화 '쉬즈 더 맨'
<꿈은 이루어진다>는 비무장 지대 안 북한 병사들과 남한 군인들이 월드컵 라디오 중계를 듣기 위해 벌어지는 해프닝을 그렸다. 축구를 통해 남북한이 장막을 없애고 화해의 장을 만들어 놓았다. 이들 영화에선 축구가 우정과 꿈으로 포장돼 있다. 하지만 축구는 유독 여자를 만나면 높은 장벽으로 다가와 넘을 수 없는 고비의 순간으로 변화한다.

그나마 영화 <쉬즈 더 맨>의 바이올라(아만다 바인즈)는 훨씬 나은 편이다. 그는 아예 남장을 하고 자신의 오빠 행세를 하면서도 그라운드를 누볐으니 말이다. 바이올라는 축구를 위해서 편견이나 관습과 싸워야 하는 제스와 그레이시보다는 보다 능동적으로 축구를 접하고 있다. 바이올라는 남자들과 함께 축구 훈련도 받으며 축구가 결코 남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증명했다. 여자들도 얼마든지 남자들과 그라운드를 누빌 수 있는 열정이 있다는 것을 드러냈다.

4월 오스트리아의 감독 브리짓 와이히 감독은 기록영화 <하나, 둘, 셋>을 통해 북한 여자 축구선수 4인의 생활을 보여줬다. 영화는 외부와 철저하게 차단된 북한사회에서 축구를 하며 사는 선수들의 일상적을 그리고 있다. 수비수 라미애와 골키퍼 리종휘, 미드필더 리향옥, 공격수 진별희 등은 축구 이외에 너무나 평범한 삶의 주인공이다.

<하나, 둘, 셋>은 이데올로기적이면서 정치적인 영화가 아닌 북한 여성들의 일상을 보여주려 애썼다. 이들의 은퇴 전후의 모습이라든지, 결혼 및 약혼 등 북한 여자로서의 생활을 공개했다. <하나, 둘, 셋>은 오스트리아 감독 눈에 비친 북한 여성들의 또 다른 자유로움이 담겨있다.

그래도 여자들은 축구에 대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해석하며 여전히 거리를 좁히고 있다. <슈팅 라이크 베컴>에서"오프사이드는 프렌치 겨자가 데리야끼 소스와 바다소금 사이에 있어야 하는 때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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