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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참을 수 없는 무거움

[패션잡지의 변화] 패션·라이프스타일 잡지, 문장력의 끝은 어디까지
출발은 묵직한 두통으로부터 시작됐다.

'그에게는 세기말 비엔나 시대의 퇴폐적인 예술가처럼 '성이 거세된' 건조한 야성만이 남아 있다…라이터 불이 확 타오르더니 주의를 집중하고 있는 이 기이한 '성년'의 마른 얼굴이, 진한 눈꺼풀과 앙상한 가슴팍이, 약간 퀭하고도 공허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담배를 몇 차례 힘차게 빨자, 담배의 조그만 불꽃이 규칙적으로 타올랐다 사그라졌다 하면서 그의 얼굴에도 빛과 그늘을 드리웠다.'


이제 막 영화 촬영을 끝낸 연예인이 잡지의 인터뷰에 응했을 때 당신이 보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영화의 내용을 창의적으로 응용한 멋진 화보? 영화를 찍으면서 차곡차곡 쌓인 배우들의 속내? 아니면 잘 빠진 글 그 자체인가?

위의 글은 한 패션지에 실린 영화배우 조인성의 인터뷰 기사다. 처음에는 나쁘지 않다. 거세된 비엔나 시대의 퇴폐적인 예술가가 뭔지는 몰라도 '올록볼록 초콜릿 복근을 가진 마성의 게이' 같은 표현을 대할 때보다는 뭔가 자존감에 덜 상처를 입는 기분이다. 가 그리는 시각적 심상은 독서 시간의 부족으로 잔뜩 메말랐던 문학적 감수성을 어느 정도 촉촉히 적셔 주는 것 같기도 하다.

  • 데이즈드앤컨퓨즈드의 증강현실
그러나 잡지 한 권을 다 읽고 일어날 때쯤 느끼는 이 두통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수필 2권, 시집과 소설 각각 1권씩을 한꺼번에, 그것도 강제로 읽어 치운 듯한 이 묵직함은 무엇인가? 패션 기사에도, 영화 기사에도, 심지어 섹스 기사에도 인용법과 공감각적 심상과 생략으로 인한 여운 남기기와 동일한 문화 수준을 가진 사람들끼리의 찡긋거림이 넘쳐난다.

아니, 잡지 전체가 수식과 은유로 찐득거려 한 발짝도 시원하게 뗄 수가 없다. 머리 아프다고 책 대신 잡지를 택한 것이 무색하다. 도대체 언제부터인가, 잡지가 이토록 무거워진 것은?

첫 번째 가설, 이게 다 블로거 때문이다

IT 강국 코리아는 블로거들의 춘추전국시대를 열었다. 패션, 뷰티, 음식, 기계, 재테크, 커리어, 연애 등 잡지에서 다루는 모든 콘텐츠에 대해 온라인 상의 고수 또는 고수를 자처하는 이들이 등장한 것이다. 그들이 실어 나르는 정보의 속도는 월간지는 물론이고 일간지도 따라 잡을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이다.

새로 출시된 아이폰의 스펙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잡지 대신 파워 블로거를 찾아가 '무한 클릭'하는 쪽을 택한다. 그렇다면 무시무시한 속도를 가진 반면 '예쁘다, 맛있다' 이상을 내놓지 못하는 블로거들을 의식해 잡지가 '문장력'이라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았다는 말도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잡지를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와 닿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남성 잡지 루엘의 전 편집장 문일완 본부장의 말이다.

"미국이나 유럽 쪽에서는 블로거들의 패션 제안이 잡지의 지면에 실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전문적인 내용을 순수한 목적으로 올리기 때문입니다. 그에 반해 국내에서는 잡지가 참고할 만큼 깊이 있는 내용을 포스팅하는 블로거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루엘 역시 남성 클래식 복식을 전문으로 하는 블로거들과 일부 협업한 적이 있지만 그들이 정보를 얻는 루트도 결국 잡지를 넘어서지는 못합니다. 해외 서적이나 온라인 사이트, 브랜드 측에서 발송하는 메일이죠."

잡지와 블로거가 동일한 소식을 전한다고 해도 질적인 면에서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블로거가 아이폰 소식을 누구보다 빨리 전할 수는 있지만 아이폰 개발에 얽힌 스티브 잡스의 비하인드 스토리 – "버튼 공포증이 있어서 하나만 만들었어요" 같은 고품질 정보는(물론 가상이다) 블로그가 아닌 잡지를 통해 공개된다.

화보는 또 하나의 강력한 무기다. 애플 홈페이지에 있는 아이폰 사진 또는 디카로 찍은 아이폰 사진이 블로거가 올릴 수 있는 비주얼의 전부라면, 잡지는 브랜드 측의 '짱짱한' 협찬을 등에 업고 수십 개의 아이폰을 스튜디오 바닥에 늘어놓거나 잘 빠진 모델에게 들려 원하는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

  • 엘르의 온라인 매거진 엘르엣진
오히려 지금 목격되고 있는 것은 블로거와 잡지의 상생 관계다. 데이즈드앤컨퓨즈드는 최근 표지에 증강현실 기법을 도입해 기타를 들고 있는 모델 장윤주의 사진을 웹 카메라에 비추면 노래를 하는 영상이 뜨도록 했다. 이 소식을 처음으로 알린 것이 바로 블로거들이었다. 매체로서 매체를 필요로 하는 입장에 처했을 때 블로그는 새로운 통로다.

보그에 실린 지난 서울 컬렉션 기사는 파워 블로거들의 작품이다. 보그는 이름 난 파워 블로거들을 모조리 리스트업해 발빠른 업데이트가 필요한 기사에 정보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블로거가 비대해진 잡지에 대한 혐의를 벗었다면 다음 용의자는 누구인가.

두 번째 가설, 등단의 한(限) 여기서 푸시면 안됩니다

동의하는 사람이 얼마가 되든 도 글쟁이다. 육하원칙에 따른 팩트의 나열 이상의 글을 쓰고 싶어한다는 이야기다.

"잡지가 문장에 신경 쓰기 시작한 건 몇몇 뜻있는 편집장에 의해서 주도된 거라고 생각해요. 그들은 '엣지' 같은 엉뚱한 외래어를 한글로 순화하는 데 앞장서고 글보다는 그림에 비중을 둔 패션 들에게도 필력을 요구했죠. 그리고 이걸 다른 잡지들이 많이 따라갔어요."

데이즈드앤컨퓨즈드 이우성 의 말이다. 그는 남성 잡지 지큐에서 일하던 중 한국일보 문학상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처럼 알게 모르게 문인을 꿈 꾼 들의 수는 생각보다 많다. 그리고 그들이 결과적으로 보도를 주업무로 하는 가 되었다고 해서 글에 대한 욕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편집장이 되면 더욱 강해진다.

아래 들의 입장에서도 단순히 정보를 실어 나르는 도구로 역할하기보다는 어휘와 행간 하나하나에 강박적으로 매달리며 자기만의 문장을 남기는 것이 더 보람찬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렇게 개인의 문체와 각종 수식, 작가적 욕심으로 무거워진 글들은, 재미와 정보를 동시에 제공하는 라이프 스타일 잡지라는 이름 아래 용납되고 장려되었다.

한 달 보고 버릴 책이라는 잡지의 태생적 한계를 벗어나려는 움직임도 한 몫 했다. 정보의 질은 독보적이라고 쳐도 시의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약점을 드러내게 된 잡지는 좀 더 시야를 넓혀 한 권의 책으로 남고자 하는 욕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전처럼 최신 유행하는 옷과 식당을 단편적으로 소개하기보다는 패션을 포함한 당대의 모든 문화를, 이왕이면 고급 문장을 사용해서 포장해 가치를 높이고 수명을 연장하고자 시도한 것이다.

이를 위해 일부 잡지들은 문인들과 적극적으로 협업하고 있다. 지큐는 시인들에게 미발표 시를 실을 수 있는 지면을 내주었고 데이즈드앤컨퓨즈드는 한 가지 주제를 두고 여러 젊은 작가들이 한 페이지짜리 글짓기를 하는 기획을 여러 번 낸 바 있다.

문제는 이것들이 지나칠 때다. 의 자아가 넘쳐서 문장을 비집고 나오는 바람에 결국은 뻥 터져 정보고 팩트고 모조리 삼켜버리는 경우다.

"칼럼에는 주관적인 내용과 주관적인 문체가 들어가도 돼요. 하지만 정보를 전달하는 글에도 수식이 지나치게 많이 들어가는 것은 문제입니다. 인터뷰에 바깥 풍경에 대한 의 감상이 절반이라면 그게 인터뷰라고 할 수 있을까요? 는 독자들이 몰랐던 라이프 스타일에 대해 담백하게 알려주기만 하면 돼요. 팩트를 전달해야 하는 의무는 시사지나 패션지나 마찬가지에요."

문일완 본부장의 말은 한편으로는 문학에 맞는 글과 잡지에 맞는 글이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별 다른 기반 없이 지나치게 멋 부려 쓴 글에 대한 우려이기도 하다.

"재미라는 이름 아래 잡지의 글이 너무 잡스러워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체는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취향을 타게 됐죠. 물론 잡지가 다른 매체에 비해 재미에 대한 요구가 크고 소비지향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재미는 개그와 말장난으로만 생기는 게 아니에요. 잘 찍은 사진, 간결하게 정리된 팩트, 교훈이나 감동 모두 재미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종이 잡지의 시대는 끝났다?

지금까지의 잡지의 변화가 주로 내용적인 면에 한정됐다면 최근 온라인 환경의 격변은 잡지 형태의 근본적 변화를 예고한다. 전문가들은 이북(e-book)의 출현을 앞두고 종이 매체로서의 잡지의 미래는 비관적이라고 말한다.

트렌드를 말하고 라이프 스타일을 제안하고 멋진 비주얼을 만들어내는 잡지의 역할은 그대로이겠지만 그것이 종이로 보여질 날은 멀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이폰이 나왔을 때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버티던 잡지들은 크기도 비슷한 아이패드가 나오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아이패드와의 돈독한 결합 방식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약간의 진통이 예상되기는 하지만 이는 오히려 잡지사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날씬한 아이패드를 들고 손가락으로 밀어가며 잡지를 보고 싶어하는 것은 사실 소비자들뿐이 아니다. 잡지사 역시 '종이에 찍어낸다'는 오랜 틀에서 해방되기만 한다면 인쇄와 배송에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을 아껴 이를 인력 양성에 투자해 기사의 질을 높일 수 있다.

게다가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과정은 조금도 손보지 않고 그를 유통하는 플랫폼을 왕창 늘려 '원 소스 멀티 유즈'의 달콤한 과실을 따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엘르는 본격적인 이북 서비스에 앞서 엘르엣진과 엘르엣티브이를 통해 잡지의 콘텐츠를 선보이고 있다.

엘르엣진의 경우 독자 에디터를 모집하는 등 각 채널 별로 정보 생성 방식에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인 내용은 엘르 들이 만들어 낸 콘텐츠에 기반하고 있어 별도로 들어가는 비용이나 노동은 거의 없다. 멘즈 헬스 미국판은 운동하는 모델의 사진을 아이패드 내에서 터치하면 영상으로 변환돼 실제로 모델이 뛰는 모습을 볼 수 있게 했다. 뛰는 남자 옆에는 소모 칼로리와 운동 시간 등의 정보가 뜬다.

지금부터는 이 신세계를 놓고 어떻게 머리를 굴리느냐에 따라 잡지의 생사가 결정 날 판이다. 잡지 사진을 찍는 포토그래퍼들도 바뀐 환경에 맞게 기술을 변화시키는 중이라고 하니 '종이 페티시'가 있지 않고서야 이 대세를 거스를 사람은 아마도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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