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예술이 되다]지도와 인간의 관계, 사회가 공유한 세계관, 지도가 의미하는 것의 다양한 변주들

박성환 작가의 '화물짐, 접이식 다리 그리고 지도판', 2008~2009
지도, 예술이 되다

"이것은 눈으로 보는 지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상상하는 지도입니다. 손가락을 나무 지도의 틈새에 넣은 다음 그 굴곡을 느껴야 합니다. 그 굴곡을 느낀 다음에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 해안선의 굴곡을 상상해야 합니다. 촉각과 상상력이 완벽하게 일치해야만 당신은 당신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소설가 김중혁의 단편 소설 <에스키모, 여기가 끝이야>에는 나무 지도가 등장한다. 에스키모들이 해안선의 모양대로 깎아 만든 것으로, 손으로 윤곽을 만지고 기억과 주변에 대한 인식을 동원해야 비로소 길을 내준다. 아니, 길을 경험하게 해준다.

지도는 비공식적 쓸모로도 인류를 매혹해 왔다.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켰고, 모험심을 자극했으며, 때로는 우리가 발 딛은 좌표를 고정시킴으로써 안도감을 주기도 했다. 누구에게나 지도를 훑으며 먼 곳의 삶을 상상하거나 지나온 길의 추억을 되새긴 일이 있을 것이다. 예술가들에게도 지도는 영감의 원천이었다.

디지털화한 지리적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오늘날, 지도는 일상 속에서 보다 더 자유롭고 다양하게 펼쳐져 있다. 개인 컴퓨터에 세계의 실시간 지형과 골목 풍경이 전송되고, 자동차에는 내비게이터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스마트폰은 눈 앞의 밋밋한 길에 최신의 정보를 덧입힌다. 이런 현상은 그 자체로 볼거리이자 즐길거리다.

박성환 작가의 '흩어지는 인포그래픽스', 2010
문화 콘텐츠로서의 지도의 가능성을 가장 노골적으로 구현한 예 중 하나는 작년에 만들어졌던 '모노폴리 시티 스트리츠 게임'일 것이다. 구글맵에 도시를 개발하는 보드 게임 모노폴리의 규칙을 적용한 이 게임에서 세계 지리는 거대한 게임판이 되었다.

아디다스는 아이폰용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거리 특성을 디지털 콘텐츠로 바꾸어 놓았다. '아디다스 어반 아트 가이드'는 독일 베를린과 함부르크의 스트리트 아트를 보여주고, 그 위치를 지도에 표시해 준다.

이처럼 지도의 확장과 함께 지형지물을 가늠하고 길을 찾는 행위는 문화 생활의 일부가 되고 있다. 구글맵의 스트리트뷰 서비스 역시 소프트웨어 개발자가 아닌 미디어 아티스트의 프로젝트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지도와 인간의 관계, 지도를 통해 사회가 공유했던 세계관과 개인이 체득했던 지리 감각은 어떻게 될까. 지도는 우리에게 무엇이었고 무엇이 될까. 지도와 관련한 예술 작업들은 이에 대한 인식과 전망을 담고 있다.

누구의 지도인가?

박성환 작가의 '팔각형 지구 위의 지도들', 2010
영국의 시각예술센터인 리빙톤플레이스에서는 <누구의 지도인가? Whose Map is it?>라는 제목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지도를 모티프로 한 9명 작가의 작업을 모았다. 전시장을 가득 메운 지도들은 작가의 관심사에 따라 새롭게 그려진 것들이다. 템즈강의 지류들이 신체의 동맥처럼 붉게 표현되었는가 하면, 쿠바에서 룸바가 전파된 궤적을 따라가는 지도도 있다.

기획자들은 이 전시의 의의를 "전통적으로 지도 제작에 반영된 사회정치적 구조와 문화 권력을 전복하려는 시도"라고 설명했다. 석유산업으로 인한 나이지리아의 환경변화를 지도화한 작업이 대표적인 예다. 세계를 개척하고 개발하는 데 쓰인 공식적 지도가 간과한 현장을 살려내는 것이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것으로 믿어지는 지도가 사실 얼마나 정치적으로 만들어져 왔는지 많은 역사적 연구가 증언한다. 지도는 근대국민국가의 발생과 함께 각국의 주권을 주장하는 도구 역할을 했으며 제국주의 시대, 냉전 시대를 거치며 강대국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이미지로써 퍼져 나갔다. 세계 지도가 일반적으로 유럽을 중심으로 그려진 것도 그 때문이다.

역사학자 제러미 블랙의 지적대로 "지도는 현실의 선택적 재현일 수밖에 없다." 3차원의 세계를 2차원 평면에 옮기는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정치적 판단이 개입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지도의 유통 역시 마찬가지다. 지정학자 클라우스 도드는 <중동전쟁이 내 출근길에 미치는 영향은>에서 미국에서의 지도의 대중화 배경에 전쟁이 있었다고 말한다.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격한 1942년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이 직면하고 있는 국가 안보의 위협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미국 시민에게 지도와 지구본을 구입하도록 요청했다. 덕분에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구독 부수도 크게 늘었다.

<누구의 지도인가?>에 전시된 오토봉 캉가의 '델타 스토리즈 콜랍스드 프로젝트 Delta Stories Collapsed Projects', 2005~2006
"미국 군대가 유럽, 아시아, 태평양 전선에 투입되면 시민들은 과달카날이나 노르망디가 지도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어했다.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전쟁터로부터 식구가 살아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남아있는 가족과 친척은 비통한 마음을 억누르며 지도에서 그 위치를 더듬었다."

한국에 도입된 세계 지도 역시 이런 영향 하에 있었다. 지도를 테마로 작업해 온 박성환 작가는 80년대에 "소련과 중국 등 공산권 국가들이 붉은 색으로 칠해진 세계지도"를 본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 내셔널 지오그래픽도 크게 유행했어요. 세계 각국의 지도들이 부록으로 나왔는데, 그것을 보며 풍경을 상상하곤 했죠."

지도를 분해해 재조립하다

지도를 보는 것은 세계에 대한 간접경험이다. 좀더 엄밀히 말하면, 특정한 세계관에 대한 경험이다. 그 권위가 일종의 권력임을 인식할 때 지도를 보는 상상력은 좀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누구의 지도인가?> 전에 전시된 수잔 스톡웰의 '리버 오브 블러드River of Blood', 2010
하다못해 사회과부도를 볼 때도 말이다. 박성환 작가는 시중에 나와 있는 사회과부도들이 다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중학교 사회과부도 5권의 색감과 형태가 조금씩 다르더라고요. 어떤 책의 육지는 누르스름한 푸른 색이라 이성적으로 볼 수 있었는데, 어떤 책에서는 좀더 붉게 표현되어 인상이 달랐어요. 이런 감각적 차이가 보는 이의 세계상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요?"

박성환 작가는 정형화한 지도를 분해해 보여줌으로써 관객이 머릿속으로 세계를 재조립하도록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지도판을 온통 부수어 한 더미로 쌓아놓은 새로운 지도를 선보이기도 했다. 사람마다 다른 길을 찾아낼 수 있는 지도라는 뜻이다.

젊은 작가들에 이르러 지도에 대한 상상력은 테크놀로지와 결합해 비약적으로 확장되고 있다. 금천예술공장 입주 작가인 장석준과 남지웅은 영상 지도 그리기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지역 곳곳의 좌표를 촬영한 영상을 이어 붙여 다큐멘터리로 만드는 작업이다.

카메라를 들고 지도 제작에 나선 이들은 작가와 주민만이 아니다. 로봇과 자동차, 모형항공기도 동원된다. 사람과 다른 높낮이와 속도를 지녔기에 이들의 카메라에 찍힌 영상은 새로운 시선과 감각을 보여준다.

장석준 남지웅 작가의 '사마리스의 벽' 중 로봇이 찍은 공장 내부
작가의 상상력과 현지의 삶, 테크놀로지의 가능성이 부감의 정치, 경제적 이해를 대체하는 것이다. 공상소설 속 이상도시 이름을 따 '사마리스의 벽'이라고 제목 지은 이 영상 지도는 7월 26일부터 31일까지 금천예술공장에서 상영된다.

혼란의 시대, 세계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법

"지도에는 사회적인 두께가 있다. 그리고 지도가 지닌 이 두께 속에서 우리들은 '세계'나 '사회'를 보고, 그 속에서 자기와 타자의 관계를 짜나가는 것이다."

사회학자 와카바야시 미키오의 말대로 개인을 사회적 주체로 자리 매기는 지도의 역할을 떠올려볼 때 오늘날의 격변은 우리의 지리 감각은 물론 정체성에까지 위기인지 모른다. 계원디자인예술대학 이영준 교수는 작년 말 <디자인 저널: 양귀비 1>에서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가 우리에게 그렇게 정착된 지리감각을 주지는 못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지적한다.

"매일 바뀌는 도로와 건물, 수시로 이전하는 정부 부처, 정보의 표현 방식이 달라 혼란을 주는 각종 지도…. 이런 장소에 대한 혼란 속에 지리 정보를 전해주는 매체에 대한 불신감을 잔뜩 키우는 삶은 근본적으로 이 세계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불행하고 불안하다."

<기념비적인 여행>에 전시된 조민호의 'Remembrance Memorial03', 2008
작가 스스로 지도 제작자가 되어 지리를 기록하는 작업이 늘어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장창 작가는 얼마 전 <이모를 찾아라!>라는 전시에 아이폰을 통해 본 대전역의 변화를 선보였다. 70~80년대 가난한 예술가들의 안식처이자 공론장이었던 '이모집'을 복기하는 전시 취지에 맞닥뜨려 대전 출신의 작가가 떠올린 곳은 대전역 근처 단골 가게였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단골로 드나들었던 그곳은 그러나 작년 말 재개발로 감쪽같이 사라졌다. 몇 개월 사이 아이폰 지도와 위성 사진으로 포착된 대전역 주변은 확연히 달랐다. 갈 곳 없어진 작가의 기억도 저 기록들 사이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것이다.

코리아나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기념비적인 여행> 전은 아예 몸을 지도로 삼아 세계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품들은 재개발 중인 곳, 폐허 등 우리 일상 속 엄연한 환경이지만 공식적인 지도에서 은폐된 곳들을 찾아 '기념'하는 여정에 대한 것이다. 발전과 안정에 대한 사회적 약속이 허물어지고 있는 지금, 자신 안에서 길을 찾아야 할 때라는 뜻일까. 권력 대신 상상력을 도구 삼아 말이다.

참고문헌:
와카바야시 미키오 <지도의 상상력>
제러미 블랙 <지도, 권력의 얼굴>
클라우스 도드 <중동전쟁이 내 출근길에 미치는 영향은: 지정학적으로 생각하기>


장창 작가가 아이폰으로 포착한 대전역 부근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